참 좋았다, 그치 - 사랑이 끝난 후 비로소 시작된 이야기
이지은 지음, 이이영 그림 / 시드앤피드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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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그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젊음이 그렇고, 행복이 그렇고, 사랑이 그렇고... 한낮에는 여전히 성하(盛夏)의 햇살이 따가운데 달콤 쌉싸름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가 자주 눈에 띄는 걸 보니 가을이 멀지 않았나 보다. 다소 무겁고 끈적끈적한 여름 햇살이 말랑말랑한 감성을 방해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사랑과 이별에 어울리는 계절은 가을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를테면 사랑도 활활 불타오르는 청춘의 시기보다는 막연한 동경의 시기인 십대 시절이나 사랑을 뒤돌아보게 되는 장년의 시기에 어울리는 것처럼 사랑과 이별의 에세이 역시 봄과 가을에 어울린다고 막연히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랑은 동경과 반추의 대상일 뿐이다.

 

"네가 나에게 이별을 고했던 그때였다. 나는 한 겹도 걸치지 않은 마음의 민낯을 그대로 내어놓은 채, 온 힘을 다해 막아섰다.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져 엉망이 될 거란 걸 알면서도,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는 없었다. 초라하고 처량하고 볼품없어져도 나 스스로 네 손을 놓으면 정말 후회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랑이라 믿었던 넌 이미 내가 알고 있던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었고, 견고하다 믿었던 사랑은 반쪽만 남은 모래성처럼 부서져만 갔다." (p.168)

 

이지은의 에세이 <참 좋았다, 그치>는 사랑과 이별의 순간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인연의 법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이별과 아픔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총3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작가는 사랑이 지속되는 인생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뿐만 아니라 사랑이 끝난 후의 가슴 저리던 순간들을 되새긴다.

 

'PART 1. 하필 오늘, 이별, PART 2. 이별, 참을 만한가요, PART 3. 우리는 또다시, 그리고 반드시'의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생의 막다른 골목인 듯 여겼던 이별 그 후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사랑, 그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게다가 글에 어울리는 이이영 작가의 그림들이 더해져 책을 펼치는 독자들의 가슴속 깊이 간직된 애틋했던 순간들의 추억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한다.

 

모든 위로는 일회용 밴드 같은 거라서

잠시 달래줄 뿐

결국 새살을 돋게 하는 일은

스스로의 몫.

 

그러니까 더 힘내어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는 스스로 응원하고 사랑해줘야 해요.

 

이별, 그뿐

잘못한 것은 없다고

잘 견디고 있다고. (p.178 '이별, 그뿐')

 

서로 비슷비슷할 것 같던 사랑도, 이별의 모습도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걸 보면 우리는 각자 다른 모습으로 사랑을 하고, 또 각자가 다른 모습으로 이별을 경험하게 되는가 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당신의 사랑에 기뻐하기도 하고, 때로는 당신의 헤어짐에 마치 내 일인 양 가슴 아파하는 걸 보면 나는 아마도 당신을 통해 거울을 보듯 내 젊은 날의 어떤 순간들을 새롭게 인식하는 게 아닌가.

 

"시린 손을 모닥불에 녹이듯 당신의 시린 마음 녹일 수만 있다면 나는 세상의 모든 다정한 단어들을 빌려다 당신 곁에 둘 거야. 그 온기가 번져갈 때쯤 당신은 알 수 있겠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 내디딘 길은 더더욱 아니라, 그저 당신의 모든 여정 중 조금 서글픈 풍경이었단 걸." (p.228)

 

가을을 닮은 바람이 온종일 불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은 가까운 미래가 아니라 우리 곁을 스쳐 지나는 그 숱한 아련한 풍경들과, 함께 노닐었던 시간들과, 서로에게 들려주었던 다정한 언어들임을 여전히 따가운 여름 햇살이 일깨우고 있다. 계절이 바뀌고 가슴을 찌르던 기억들도 둥글둥글 순하게 갈무리될 즈음이면 당신 역시 표표하고 초연한 걸음으로 추억 오롯한 옛길을 걷게 되지 않을까. 오늘처럼 가을을 닮은 바람이 온종일 수런대는 날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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