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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공황이 찾아왔다
클라우스 베른하르트 지음, 이미옥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7월
평점 :
주변에서 '바쁘고 정신없어 죽겠네.'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현대인은 정신병을 달고 살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다소 무겁고 가라앉는 기분과 함께 '우리 아이는 정신이 없다는 말은 가급적 하지 않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어른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곤 한다. 페터 빅셀의 산문집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의 제목처럼 아들도 그런 삶을 살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이다. 정신이 없다는 것은 실제로 정신이 없다는 게 아니라 수많은 생각들이 동시에 겹치고 순간순간 떠오르는 여러 생각들을 도무지 제 의지만으로는 정리할 수 없는 상태일 터, 그러므로 일의 우선순위도 정할 수 없을 테고, 따라서 해야 할 일은 계속 쌓여만 가는 게 아닐까. 제때 처리하지 못한 일들, 산더미처럼 쌓인 일들을 대면한다는 건 공포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능력 너머에 있는 그 일들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게 되지 않을까. 공포와 두려움 속에.
"정신이 보내는 경고 신호로는 갑작스러운 기억력 저하 또는 집중력 저하, 의욕 저하, 무기력, 아무런 이유도 없이 슬퍼지는 현상 등이 있다. 공황은 이런 여러 가지 증상의 마지막 단계에 나타나는데, 정신이 보내는 경고 신호 가운데 가장 강력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p.19)
클라우스 베른하르트의 저서 <어느 날 갑자기 공황이 찾아왔다>는 의사로서의 진료 경험을 바탕으로 공황이나 불안장애를 겪고 있는 세상의 모든 환자들에게 약간의 가능성을 제시한 좋은 책이다. 더구나 약에 의존하지 않고 '최신 뇌 연구를 통한 불안, 공황 극복법'을 제시함으로써 환자들에게는 희망의 빛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현재 1200만 명 이상이 공포증을 앓고 있다는 독일에서 200만 명 이상이 반복적인 공황장애로 고통받고 있다는 현실은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더구나 정신과 진료에 대한 거부반응이 있고 정신병 환자들에 대한 편견이 있는 우리나라이고 보니 일단 공황장애든 불안장애든 의사로부터 확진 판정을 받는다는 건 일반인들로부터 평생 배제된다는 걸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에서는 마지막 선택으로 정신과 병원의 문턱을 넘는 게 아닐까. 우리 몸에 대한 잠재의식의 마지막 경고인 공황에 대해 우리는 마냥 부정적으로 인식할 게 아니라 그와 같은 경고를 적극적으로 감지하고 수용함으로써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당신의 잠재의식이 해결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과제들 가운데 하나는, 당신을 가능한 한 잘 보호하고 너무 오랫동안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가서 위험을 겪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잠재의식은 가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공황은 질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잠재의식이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해주는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p.49)
우리나라의 의료 현실로 볼 때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의 또 다른 공포는 평생 회복이 불가능하거나 심할 경우 정신병원을 평생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으로 인해 환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정신과 의사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은 없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환자보다는 의사들에게 더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본다. 불과 30분을 넘지 않는 짧은 상담 시간, 약물 치료에 의존하는 손쉬운 처방 위주의 진료, 환자의 건강보다는 자신들의 돈벌이에 급급하는 현실 등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끝도 없다. 그 모든 게 우리나라 의사들의 자질 부족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많은 환자들을 진료하다 보니 연구할 시간도 부족하고 상담 시간을 늘리자니 병원 수입이 줄어들고 이런 복합적인 요인들로 인해 변화를 꾀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두려움 없는 행복한 삶은 특별한 사고방식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런 방식을 가르쳐주는 학교나 사회는 없다. 스스로 훈련하는 수밖에 없다. 당신의 뇌가 긍정적인 본보기를 충분히 선례로 삼을 때까지 훈련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한 번쯤 당신 주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신이 매일 어떤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는지 말이다." (p.216)
대한민국의 노인 복지 수준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진 터, 미래를 걱정하는 국민들은 그 숫자가 나날이 늘어나지 않겠는가. 비례하여 공황이나 불안장애를 겪는 환자들도 증가할 수밖에 없는 답답한 현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열악한 복지 환경 속에서 매 순간 불안과 공포를 흡입하고 있는 셈이다. 건강한 긍정의 기운을 호흡하지는 못할망정 불안과 공포라니... 어쩌면 우리는 지난 시절의 아픔도 다 걷어내지 못한 채 새로운 시대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오늘은 74번째 맞는 광복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