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엠브리오 기담 ㅣ 이즈미 로안 시리즈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담' 하면 역시 일본 출신의 작가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우리나라 작가들이 쓴 기담집도 여러 권 존재하고 중국 기담집이나 기타 다른 나라의 기담집도 즐비하건만 이상하게도 '기담' 하면 일본 작가가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일본인들의 '기담' 사랑이 유난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언뜻 머리에 스치는 책만 하더라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쿄 기담집>이나 오노 후유미의 <영선 가루카야 기담집>, 아사노 아쓰코의 <기담>, 아사베 다쿠의 <기담을 파는 가게> 등이 있다. 그리고 제목에는 기담이 빠져있지만 미야베 미유키의 신작 <금빛 눈의 고양이> 역시 기담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기담' 하면 일본의 이 작가를 빼놓을 수 없다. 야마시로 아사코. 2005년 괴담 전문지 <유幽>로 데뷔한 그는 기담 전문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무작정 별나고 괴상한 이야기들만 다루기보다는 설화에 나오는 신비한 소재들을 바탕으로 마음을 울리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지어내는 작가로 정평이 나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은 그의 재능이 잘 반영된 책이 <엠브리오 기담>이다. <엠브리오 기담>에는 표제작인 '엠브리오 기담'을 비롯하여 총 9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연작 기담집으로 작가는 책에서 항상 길을 잃는 이즈미 로안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여행과 공포를 대비시키고 있다.
"내가 로안의 여행에 동해하지 않게 된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다. 이즈미 로안은 길치였다. 그는 확실히 여행에 익숙했다. 지치지 않게 걸을 줄도 아는지 하루 종일 걸어도 기운이 넘쳤다. 하지만 백이면 백, 길을 잃는다." (p.13)
이즈미 로안은 그가 거래하는 의뢰처(책 집필을 의뢰한 상점)에서 여행 비용을 지원받아 길 안내서를 쓰기 위한 취재를 주업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아직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훌륭한 효능을 지닌 온천이나 한 번쯤 볼 만한 사찰을 소개하기 위해 입소문만 들으면 직접 가서 확인하고 오는 게 그의 임무였다. 그와 몇 번인가 만나 말을 섞었을 때 그는 '나'(미미히코)에게 같이 여행을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일자리가 궁하던 '나'는 로안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인다.
로안과 함께 떠난 세 번째 여행지는 무릎 통증에 좋다는 온천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 주나 걸려 도착한 장소였다. 그러나 온천은 없었고, 완전히 지친 몸으로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서 로안 때문에 길을 잃었고, 갈 때는 지나지 않았던 이상한 마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날이 저물어 여러 명이 공동으로 쓰는 큰 방에서 자게 되었다. 안개에 파묻혀 모든 게 희미했던 그 마을에서 나는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산책에 나섰는데 개울가에서 우연히 무엇인가를 먹고 있는 개들을 보았고, 개들이 먹다 남긴 찌꺼기를 숙소로 가져오게 된다. 새벽녘에 눈을 뜬 로안은 내 손바닥에 얹힌 물건이 인간의 태아(엠브리오)라고 했다.
"인간의 태아지. 모른단 말인가? 인간은 갓난아이가 되기 전에 모친의 배 속에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네. 어제 나카조 산원産院이 있었던 걸 기억하는가? 나카조는 예로부터 낙태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지. 분명 그곳 의사가 여자 배 속에서 빼낸 태아를 근처에 버린 게야." (p.17)
여행에 넌덜머리가 났던 '나'는 여행 세 번만에 로안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금세 죽을 줄 알았던 엠브리오는 예상을 깨고 꿈틀거리며 살아 있었고, 부모를 일찍 여의고 형제도 없었던 '나'는 엠브리오의 입가를 쌀뜨물을 묻힌 헝겊으로 축여 주기도 하고, 미지근한 물을 받아 씻겨 주는 등 애정을 갖고 돌보기 시작했다. 이즈미 로안과의 여행으로 주머니가 두둑해진 '나'는 노름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쉽게 돈을 잃고 말았다.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던 '나'는 집 한구석에 암막을 치고 엠브리오를 감춰 놓은 뒤 사람들을 집 안으로 끌어들여 돈을 받고 엠브리오를 구경시켰다. 엠브리오를 보겠다는 관객은 끊이지 않았고, '나'는 큰돈을 벌게 되었지만 노름으로 감당할 수 없는 큰 빚을 지고 말았다. 노름꾼 우두머리로부터 빚 독촉을 받게 된 '나'는 엠브리오를 지키기 위해 도망갈 궁리를 하고 이즈미 로안에게서 비바람을 막을 도구를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이 녀석에게 지독한 짓을 했다. 내가 이 녀석에게 좋은 아버지였다면 어째서 이런 오밤중에 강가에 멍하니 서 있겠는가? 어째서 이 녀석에게 차가운 바깥바람을 맞히겠는가? 나는 태아를 손으로 감싼 채 지금까지의 행동을 되돌아보며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p.30)
로안은 '나'와 태아 단둘만의 여행을 반대했다. 얼어 죽기 십상이라는 이유였다. 대신에 그가 아는 사람 중에 아이를 원하는 부부가 있으니 '나'의 노름빚을 그들이 대신 갚아주는 조건으로 태아를 그들에게 넘기자고 제안했다. 태아를 가져간 부부는 의사의 도움을 받아 태아를 배 속에 넣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로안의 부탁을 받고 심부름을 다녀오던 중 갈림길에서 쉬고 있는데, 근처에 사는 아이들 무리가 지나갔고, 그들 무리 중 한 소녀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 아이가 말하길, 예전에 소녀는 나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내 손바닥 위에서 잠들고, 밥그릇에 받은 미지근한 물로 목욕도 하고, 내 가슴에 딱 달라붙어 잠들면 마음이 놓였다고 했다. 소녀는 이제 갓 트인 말로 열심히 설명했다." (p.35)
'기담'이란 게 늘 그렇지만 때로는 오싹한 한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에이, 말도 안 돼.'라는 생각과 함께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계속해서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기담의 매력에 푹 빠져들게 되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훈훈한 교훈도 은연중에 깨닫게 된다. 우리는 이따금 '기담집'에나 나올 법한 이상한 이야기들을 현실에서 마주치는 까닭에, 때로는 '기담'보다 더 이상한 이야기들을 현실에서 전해 듣는 까닭에 '기담'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게 아닐까. '세상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까닭도 사람들의 입과 입으로 '기담' 역시 끊이지 않고 전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