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한 세상의 모든 책은 심리서적이다."라고 했더니 그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책이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는 날건달도 아니고 소위 책을 좀 읽는다는 놈이 어떻게 이런 무식한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표정이었다. 잠시 동안의 어색한 침묵이 지나간 후 그도 다시 냉정을 되찾은 듯 "설마, 그럴 리가..." 하면서 서둘러 말을 멈췄다. 적어도 친구에 대한 예의상 더 이상의 심한 말을 하지 않겠다는 듯 말이다.
"멋있어 보이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 그래. 심지어 개인의 정서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과학서적도 말이야." 그는 여전히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내가 납득하거나 수긍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 봐. 밑도 끝도 없이 내뱉듯 툭 하고 던지지 말고." 하면서 의자의 등받이 쪽으로 허리를 젖혔다. 나와 조금 더 멀어짐으로써 사적인 친밀감에서 벗어나 일말의 객관성을 획득하려는 듯. "이를테면 내 생각은 책을 읽는 독자가 책을 처음 받아 드는 순간부터 명확하게 호불호가 갈리는 까닭에 모든 서적은 심리서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야. 누구나 시간을 내서 책을 읽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잖아. 내용이 좋아서일 수도 있고, 저자를 좋아해서일 수도 있고, 표지가 예뻐서일 수도 있고, 기술하는 방식이 맘에 들었을 수도 있고, 주변의 누군가로부터 추천을 받았을 수도 있고, 읽기는 싫지만 내일 당장 책의 내용에 대해 발표를 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읽을 수도 있고, 아무튼 자신의 귀한 시간을 책 읽는 데 쓴다는 건 심리적으로 동해야 한다는 거지. 그러니 세상의 모든 서적은 심리서적이라고 해도 억지는 아니라는 얘기야. 예를 들면 전에 만났던 어떤 사람이 자기계발서를 읽고 나한테 책을 읽은 소감을 말했던 적이 있는데, 책의 내용보다는 다른 책과 비교해서 이러이러한 점이 좋았다고 한 시간 이상을 설명하는데 결국 그것은 그분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한, 순전히 기분이겠지만, 심리적 문제였다는 생각이 들었어." 자기계발서뿐만이 아니야. 과학서적도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해서 좋았다든가, 많은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는 분야를 다루어줘서 좋았다든가 하는 심리적 문제로 연결되는 게 다반사이지."
한참을 듣고 있던 그는 옅은 미소를 띤 채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논리적 비약이 있는 것 같아. 이 자리에서 콕 집어 반박할 수는 없지만 말이야." 하였다. '모든 비평은 일종의 자서전이다.'라고 썼던 데이비드 실즈의 명제가 독자들에게 어떤 영감을 불어넣는 것처럼 때로는 가까운 사람과 하나의 주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활력소가 된다. 논리적으로 맞든 그르든, 비약이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대화의 내용이 이전과 조금 달라짐으로써 우리는 분명 세상이 달라진 듯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