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형과 누나들 밑에서 수년 동안 막내로 자랐던 나는 어쩌다 얻게 되는 사탕이나 과자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꽁꽁 숨겨두었다가 형들과 누나들이 다 먹고 입맛을 다실 때쯤 아주 조금씩 아껴가며 먹곤 했다. 그렇다고 대놓고 약을 올리다가는 빼앗기기 일쑤이므로 안 보이는 곳에서 야금야금 그 맛을 음미하는 것으로 단맛이 주는 행복을 만끽하곤 했었다. 그런 탓인지 어쩌다 맘에 드는 책이라도 만날라치면 아주 조금씩 아껴가며 읽게 된다.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어렸을 적 내 몫으로 주어진 사탕에 침을 발라 조금씩 녹여 먹던 것처럼.
"이 여행은 길을 잃으면서 시작되었다. 나는 정신의 황무지, 그 길고 어두운 우울 속에서 길을 잃었다. 길도 없는 황량한 곳에서 어느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할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 주 동안 계속되던 이런 상태는 여러 달로 이어졌다. 곧고 부드럽던 머리카락은 기름이 덕지덕지 낀 볼썽사나운 모양이 되어갔다. 나는 걸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었다. 그 비참한 마음의 폭력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다." ('땅, 물, 불,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 중에서)
제이 그리피스가 쓴 <땅, 물, 불,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는 650쪽이 넘는 결코 가볍지 않은 두께의 책이지만 문장마다 작가의 정성이 가득 묻어나는 까닭에 쉽사리 책장을 넘기지 못한다. '원시의 자유를 찾아 떠난 7년 간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는 것처럼 작가는 야생성이 살아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책 읽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처럼 아무리 좋은 책도 번역가의 실력이 그에 미치지 못하면 한순간에 그렇고 그런 책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작가인 제이 그리피스의 글도 좋지만 번역을 담당한 전소영 번역가의 솜씨도 그에 못지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