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첫눈이 내리는 동안, 그리움과는 별개의 슬픔이 쏟아졌다. 카톡 문자 메시지를 알리는 진동음이 끝없이 이어졌고, 응답이 없는 나를 걱정하는 몇몇은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어둑어둑 그늘이 진 방에는 진득한 침묵이 내려앉았고, 다리께서부터 차오르던 슬픔이 목과 얼굴을 거쳐 마치 나를 익사시키려는 듯 온 몸을 짓누른다.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이 무기력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정호승 시인의 시를 나즉나즉 읊어보았다.

 

 

첫눈이 오는 날 만나자

정호승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그렇게들 기뻐하는 것일까

왜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아마 그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이 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첫눈과 같은 세상이
두 사람 사이에 늘 도래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한때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첫눈이 오는 날
돌다방에서 만나자고

첫눈이 오면
하루종일이라도 기다려서
꼭 만나야 한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하루종일 기다렸다가
첫눈이 내린 밤거리를
밤늦게까지 팔짱을 끼고
걸어본 적이 있다

너무 많이 걸어 배가 고프면
눈 내린 거리에
카바이드 불을 밝히고 있는
군밤장수한테 다가가 군밤을 사 먹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약속을 할 사람이 없다

그런 약속이 없어지면서
나는 늙기 시작했다
약속은 없지만 지금도 첫눈이 오면
누구를 만나고 싶어 서성거린다

다시 첫눈이 오는 날
만날 약속을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첫눈이 오는 날
만나고 싶은 사람
단 한 사람만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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