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는 것도 사랑입니까
황경신 지음, 김원 사진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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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지고 있다. 가벼워지는 시간이다.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나는 크게 한숨을 토해낸다. 삶의 구획들이 오래된 흙벽돌처럼 숭숭 구멍이 나고 있다. 사랑했던 기억들은 때론 아프고 공유할 수 없는 추억들은 때론 무섭다. 어떤 기억은 세월조차 약이 될 수 없다는 걸 나는 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채 열흘도 지나지 않았을 때 받은 책이다. 황경신 작가의 영혼시 <지워지는 것도 사랑입니까>. 나는 한동안 책을 펼쳐보지 못했다. 예전부터 좋아하던 작가. 나는 황경신 작가의 감각적인 문체를 좋아했었다. 그러나 두려웠다. 어떤 순간에 와락 울음이 터질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살면서 정이 많다거나 지나치게 눈물이 많다는 말보다는 침착하다거나 냉정하다는 말을 더 많이 들었었는데 내 안에 나조차도 몰랐던 눈물이,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그렇게나 많이 존재한다는 걸 나는 최근에야 알았다. 겨우 용기를 내어 펼쳐 든 책, 불면의 밤과 싸우며 나는 몇 날 며칠을 울었는지 모른다.

 

오래전 낙서를 뒤적여보니

내 추억의 기록은 온통 슬픔이네요

낡은 기억을 들추어보니

지금은 이유도 알 수 없는 슬픔뿐이네요

돌 하나 바람 하나 구름 하나

슬픔 아닌 것이 없네요

생각해보니 슬픔이 나를 가두고

나를 버리고 나를 만들었네요 ('하기야 슬픔 아니었다면' 중에서 p.17)

 

미루고 미루던 사망신고를 하러 동 주민 센터에 들렀던 날, 주말부부로 살면서 나와 주소조차 달랐던 아내. 주민 센터 직원은 나에게 구청으로 가라고 했다. 다른 때 같으면 불쑥 화도 났겠지만, '그래, 그렇게 쉽게 처리되면 나조차도 너무나 쉽게 잊을까봐 그랬나 보다' 생각하며 구청을 향했다. 가능한 한 천천히 차를 몰았다. 오늘의 슬픔이 어제의 슬픔을 닮아가는 동안 나는 시간의 흐름을 알지 못한다. 끝나지 않는 긴 하루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듯한 느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풍경은

미처 마르지 않은 물감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당신이 그곳에 있을 때

당신의 부재는 치명적인 가혹이었습니다   ('잊은들 잊지 않은들' 중에서 p.187)

 

추억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가슴을 난도질하는 가장 무서운 흉기는 행복했던 기억이다. 슬픔은 언어가 되지 못하고 추스를 수 없는 생각들이 유령처럼 떠도는 밤. 어젯밤에는 중학생 아들이 카톡으로 노래 한 곡을 보내왔다. 영국 가수 패신저(Passenger)가 부른 'Let her go'. 가사가 좋다면서. ……You see her when you close your eyes/ Maybe one day you'll understand why/ Everything you touch surely dies/ ……(눈을 감으면 넌 그녀가 보여/ 아마도 언젠간 그 이유를 알게 되겠지/ 네가 스쳤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가는 이유를)

 

빛나는 눈물은 차곡차곡 쌓이고

꿈같은 갈증은 깊어가고

맹세할 것 많았던 날들이 별처럼 떨어지는데

운명은 변한 것이 없어

이제야 알게 되었나

처음부터 그것은

허공 위에 쓰인 맹세였다는 것을  ('처음부터 그것은' 중에서 p.229)

 

구름 낀 서쪽 하늘에 노을이 진다. 어제와 다름없는 밤이 다시 또 찾아올 테고, 추억이 난도질하는 긴 시간 동안 나는 무방비로 지새울 수밖에 없으리라. 슬픔은 언어가 되지 못하고 추억은 위로가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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