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풍토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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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기를 통과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물론 시대가 바뀐다는 건 숨 죽이고 살던 사람들에게도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꼭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겠지만 말이다. 결과야 그렇다 할지라도 그 시대를 몸으로 겪어내는 모든 사람들의 고충은 말해 무엇할까. 그러므로 다 지나고 난 뒤에 우리가 추억하는 것들과 과정에서 실제로 겪는 일들은 엄연히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추억은 그야말로 낭만일 뿐 현실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가상의 현실에 불과하다.

 

스마일 카다레의 소설집 <광기의 풍토>에는 새로운 체제에 처한 알바니아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소설, '거만한 여자'가 실려 있다. 읽기에 따라서는 고집 센 장모와 약삭빠른 사위 간의 흔하디 흔한 장서 갈등쯤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실상은 알바니아의 구체제와 공산화된 알바니아의 신체제의 대립으로 보는 게 옳을 듯하다. 공산당의 집권으로 하루아침에 권세와 영화를 잃어버리고 시골의 작은 마을에 정착한 '몰락한 가문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의 처지를 인식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해야만 했다.

 

옛 고위 관리의 미망인인 무하데즈 역시 그들 중 한 사람이다. 국내에 갖고 있던 재산은 모두 수용되었고 그나마 해외의 재산은 국가에 귀속되지 않았던 탓에 언젠가 그 재산을 다시 차지할 날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유일한 삶의 원동력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무하데즈는 자신의 못생긴 딸을 추남인 공산당 소위 알레코 발라와 결혼시킴으로써 또 한 번의 '재기'를 꿈꾼다.

 

"딸이 말한 그대로, 남자는 불쾌감을 주는 용모의 소유자였다. 듬성듬성 난 머리털 때문에 얼굴이 더욱 납작해 보이는 데다, 다소 튀어나온 눈을 두리번거리며 끊임없이 무언가에 집중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차마 보고 잇있기가 괴로웠다. 시간과 습관의 완화작용도 손댈 수 없는 혐오감이란 바로 이런 거라고 무하데즈는 확신했다." (p.122~p.123)

 

그러나 알레코 발라 소위는 당으로부터 축출된 것은 물론 군에서조차 파면당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파면당한 뒤 일주일 후에 무하데즈의 딸과 약속대로 결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이었다. 신부의 집에 눌러앉게 된 알레코는 마을의 난방용 장작 저장소에서 하급 일자리를 얻는다. 상품 취급 전담원이었던 그가 손을 다치는 바람에 임시로 송장 전담 일을 맡게 되었고, 직장 상사와 마을 사람들에게 헌신적이었던 그는 금세 회계 부서의 책임자 자리에 오른다. 거기에는 기획부서 주임을 직원을 탐탁지 않아했던 부장의 생각을 알레코가 읽고 그의 생각에 동조했던 것과 마을 사람들의 우호적인 여론이 합쳐진 덕분이었다. 알레코와 무하데즈의 갈등이 표면화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추악한 괴물, 위선자, 엉큼한 놈! 예전엔 자기한테 무언가 굴러들어 오리라 기대하고 싹싹하게 굴며 굽실댔지. 한데 이제 그런 희망이 사라지고 나니 나한테 욕을 해도 된다고 믿는 거야. 자기 사람들을 팔아먹은 더러운 인간. 넌 날 줄곧 방해물로 여기고 있지. 두 개의 젖통을 동시에 빠는 연습을 했으니, 비굴함과 아첨으로 계속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을 거야. 넌 하이에나처럼 공산주의 지도자와 관리자 사이에 충돌이 잇는 곳마다 찾아가 킁킁대며 냄새를 맡고선 승산이 잇는 쪽에 붙어 알랑거리며 어떻게든 더 많은 이득을 챙기려 하지. 그렇게 해서 좀 더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성공할 수도 있겠지." (p.163)

 

그러나 알레코가 승승장구를 할 때는 무하데즈와의 갈등이 고조되었다가도 숙청의 칼바람이 불어 납작 엎드려 있을 때에는 수그러들곤 했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의 성공을 이유도 없이 미워하곤 한다. 일종의 질투일 수도 있고 열등의식의 발현일 수도 있다. 무하데즈도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무하데즈로서는 사위의 성공이 마냥 반가울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무시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을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해 여름을 나면서 괴롭더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살아 있는 동안 간혹 폭풍우가 물러나기를 기다리며 몸을 낮춰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이었다."    (p.139)

 

그러나 알레코의 성공이 마냥 못마땅하고 누구보다도 사위를 미워하는 듯 보였던 무하데즈의 속마음은 그런 게 아니었다.

 

"노파가 친구에게 심중의 생각을 그대로 고백한 바로는, 사위와 자기 두 사람의 관계가 어찌 됐든 사위 역시 이제는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 또 여하한 경우에도 집안의 수치를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p.166)

 

우리가 이따금 착각하는 게 있다. 갈등이란 언제나 집단과 집단, 세대와 세대 사이의 대규모 단위로 벌어지는 충돌쯤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만한 여자'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체제를 대표하는 알레코와 구체제를 대표하는 무하데즈의 충돌처럼 갈등은 지극히 사적이며 개별화된 사건이라는 사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알레코의 아내가 소설 속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개별적인 사건들이 모여 하나의 사회 현상을 이룰 뿐이지 커다란 사회 현상 속에서 개인의 갈등이 노골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보수주의자도 수구꼴통만 있는 게 아니고 진보주의자 중에도 이념적 좌파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소위 '일반화의 오류'는 어떤 사회를 이해하는 데 지극히 위험하다. 소설에서 알레코가 장모 무하데즈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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