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왠지 모를 설렘과 달달한 느낌을 준다. 그런 까닭에 첫눈, 첫사랑, 첫 키스 등 처음을 상징하는 이런 낱말들은 듣는 것만으로도 야릇한 흥분을 일으키곤 한다. 매일 아침 산에 오르는 나는 매년 이맘때쯤에 빼놓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 첫밤(栗)을 줍는 일이다. 산의 능선에 밤 농장이 있고 그 주변 산으로 퍼진 밤나무 덕에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은 연례행사처럼 등산로에 떨어진 밤을 줍곤 한다. 전날 밤에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불면 등산로는 떨어진 밤과 도토리로 가득하고, 욕심 많은 사람들은 발길을 멈춘 채 밤을 줍는 재미에 빠져드는 것이다.

올해도 나는 어김없이 첫밤을 주워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해에 난 밤 중 오직 한 개의 알밤을 주워 올뿐이다. 먹기 위해 줍는 것은 아니다. 여름 한철을 인내하고 비로소 새 생명의 씨앗을 잉태하게 된 한 톨의 밤알을 보면서 이따금씩 생명의 위대함을 느껴보기 위함이다. 내가 주워 온 알밤은 나를 가르치는 게 제 소임인 양 책상 위에 놓인 채로 이따금 나의 시선이 머물 때마다 나의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살아라' 당부하는 것이다.
등산로에 떨어진 밤송이는 지난주부터 보았었지만 온전히 내 차지가 되기까지 한 주가 더 걸린 셈이다. 유난히 길고 더웠던 여름, 그래도 여전히 밤은 여물고, 생명의 끈은 끊어지지 않은 채 다음을 기약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