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 가든 (리커버) - 개정판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소담출판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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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작가에게도 저마다의 장점과 단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권의 책을 잘 읽어낸다는 건 독자의 의무이자 권리라는 생각이 이따금 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작가의 장점과 단점을 잘 구분하여 막연하기 이를 데 없는 평가, 좋은 책이라는 둥 그저 그렇다는 둥 하는 평가는 더 이상 하지 않는 게 성실한 독자로서의 기본적 책무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는 침묵을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난 작가이다. 우리가 사는 인생의 교과서에서 행간에 숨은 의미를 잘 짚어주는 작가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에쿠니 가오리를 통해 침묵의 색깔과, 침묵의 형태와, 침묵이 갖는 의미를 배운다. 그리고 수시로 감탄하곤 한다. 침묵을 말하는 것과 어둠을 그려낸다는 건 누군가에게는 허튼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것을 생생한 현실로 받아들이곤 한다.

 

"기억은 장난감 블록과 비슷하다. 언뜻 보면 색깔도 알록달록 서로 다르고 모양도 다르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편리하게 기획되어 있는 것이다. 가호처럼 기억의 블록을 무수히 쌓아 올려 그 안에 틀어박히고 싶지는 않았다. 현실을 사는 세리자와만을 사랑하고 지금의 세리자와하고만 살고 싶다. 시즈에는 강을 따라 난 길을 성큼성큼 걸었다." (p.92)

 

고등학교 미술 교사인 시즈에는 지금 연애를 하고 있다. 그러나 미혼의 청춘남녀가 하는 그런 연애는 아니다. 연인인 세리자와에게는 아내와 19살 먹은 딸이 있다. 신칸센으로 4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세리자와를 만나기 위해 가슴 설레며 떠났다가도 현실로 돌아올 때는 한없이 안도한다. 첫 번째, 두 번째 애인과는 정신적인 친구로 지내면서도 유독 세 번째 남자인 세리자와만큼은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에 시즈에의 오래된 친구 가호는 5년 전에 끝난 사랑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사랑으로 인해 심인성 섭식장애까지 앓았던 가호는 지금도 그 사람(쓰쿠이)과의 추억이 서린 비스킷 깡통과 머스캣 상자를 신줏단지 모시듯 한다. 자신의 웃는 얼굴이 찍힌 폴라로이드 사진을 모아둔 비스킷 깡통과 차마 깨뜨리지 못한 파란 장미 무늬 홍차 잔이 들어 있는 머스캣 상자. 가호에게는 과거의 기억이 현실적인 삶이고 현실은 그저 부수적인 삶처럼 여겨진다.

 

"쓰쿠이와 함께일 때, 가호는 늘 웃었다. 모든 것이 빛나 보이고, 너무 많이 웃어서 눈초리가 처지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그 사람은 정말 즐거운 것만 보며 사는 재능이 넘쳤다. 그것을 사방에 흩뿌리며 온갖 것을 아름다운 농담으로 만들어버렸다. 쓰쿠이는 심각한 척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p.40)

 

안경점에서 근무하는 가호는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해 친구를 불러 음식을 대접하기도 하고, 정기적으로 들르는 안과 의사나 대학생 코우와 잠자리를 같이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외로움을 잊기 위한 수단일 뿐 마음을 주는 사랑은 아니다. 안경점에는 가호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가호 주변을 맴도는 나카노가 있다. 그러나 가호는 그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순진한 나카노는 가호의 마음을 열기 위해 끝없이 두드린다.

 

"상대가 자신의 불행을 기대하고 있다고, 어쩌다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시즈에는 엽차 한 모금에 닭고기를 꿀꺽 삼킨다. 헛도는 피해의식이 한심했다. 맞지도 틀리지도 않은 말이다. 가호는 시즈에의 밥공기에 두 공기째 밥을 푸면서 생각한다. 자신이 불행할 때 상대도 불행하면 기운이 나는 것은 왜일까. 상대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자신의 행복보다 더 많이 바라는데." (p.106)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현재를 즐기는 시즈에, 과거의 아름다웠던 기억에 탐닉하는 가호, 자신의 감정을 그때그때 드러내는 시즈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는커녕 생각하지 않는 연습을 하는 가호, 연인과 헤어져 현실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안심하는 시즈에,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도 과거의 연인을 떠올리는 가호, 키가 크고 행동에 거침이 없는 시즈에, 키가 상대적으로 작고 소심한 가호, 너무나 이질적인 두 사람의 시간은 때로는 각자, 때로는 뒤섞이면서 흘러간다.

 

"시간은 저렇게 무정하게 흘러가면서, 어떤 곳에서는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척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아주 흐름을 멈춘 척한다. 그래서 모두들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라고 시즈에는 생각한다. 물론 약한 사람만이 겪는 그런 혼란 때문에 허우적대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고 화가 나지만, 그 사실과 사진에서 눈길을 돌린 자신이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p.155)

 

작가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친구로 지냈던 두 사람, 시즈에와 가호를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던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대학에 진학하면서 잠시 헤어지지만 졸업 후에 다시 같이 살기도 했다. 긴 시간의 추억을 공유하는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사랑의 방식으로 인해 충돌을 하고 때로는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친구라는 끈끈한 인연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소외감, 이해할 수 있고, 처음 느껴보는 것도 아니다. 그 시절에도, 하고 시즈에는 생각한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서 가호의 아파트로 굴러들어간 시즈에, 그리운 옛 친구와의 평온한 생활을 기대했던 새내기 교사 시즈에에게, 가호는 무참하게도 소외감만 만끽하게 해주었다. 쓰쿠이와 가호의 끈끈한 사랑의 나날을 시즈에는 꽤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칭칭 뒤얽혀 서로를 구속하는 어리석은 남녀를 처음 보는 시즈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p.267)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읽고 난 후에는 주저리주저리 수다스러워지는 느낌이 든다. 스토리 때문이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가 독자들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소설 속 문장마다 자신의 생각을 주석으로 달아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점점 가팔라지는 계절의 경사를 가늠하면서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읽는다는 건 왠지 모를 쓸쓸함을 더하는 일이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침묵을 번역하는 그녀의 문장마다, 행간의 의미를 설명하는 그녀의 문장 하나하나에 나는 오래전부터 중독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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