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따금 아무것도 아닌 일로 투닥투닥 다투기도 하고, 입을 닫은 채 며칠씩 소 닭 보듯 데면데면 지내기도 하지만 그러다 정 불편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거나 별 재미도 없는 이야기를 옜다 선심 쓰듯 내뱉기도 한다. 그럴라치면 '인생이란 게 참 별거 없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한다. 아주 작은 일에도 내일 당장 갈라설 것처럼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때로는 큰 실수를 하여 잔뜩 주눅이 든 상대방을 향해 '그럴 수도 있지' 더없이 너그러운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변덕이 팥죽 끓듯 하는 게 우리네 인생이지 싶다.
나는 어제 최근에 이혼한 한 친구를 만나 그의 넋두리를 한동안 들었다. 유행처럼 번지는 불륜이나 이혼의 세태가 우리가 갖고 있던 도덕률을 뿌리째 흔들어 선과 악의 개념조차 희미해진 건 맞지만 가까운 사람의 이혼 소식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탓인지 친구의 얼굴은 사뭇 야위고 초췌해 보였다. "너무 마음 쓰지 마. 이혼은 이제 흉도 아니잖아." 하는 틀에 박힌 말을 건네면서도 결국 모든 고통은 당사자에게 귀착될 거라는 사실에 씁쓸한 마음이었다.
흐리고 텁텁했던 어제의 날씨는 온데간데없고 가을 날씨처럼 청명한 오늘. 볼에 와 닿는 부드러운 바람이 더없이 기분 좋게 한다. 산책을 부르는 날씨. 가볍게 거니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나와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긴다. 사람은 결국 경험과 기억의 총체가 아닌가.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모든 기억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삶의 의미를 깨닫도록 한다. 그런 까닭에 기억과 경험에는 선악호오(善惡好惡)나 미추정사(美醜正邪)의 분별이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지나가게 마련이고 지나간 모든 것은 그 사람에게 귀속된다. 사회 전체의 유익을 따질 때에는 도덕적 기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어제 만났던 친구의 얼굴이 머릿속을 맴돈다. 심란하다. 그러나 친구도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낭송되는 폴 발레리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세찬 바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 덮으며/물결은 가루로 흩어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날아가거라 - 눈부신 페이지들이여/부숴라 파도여 - 뛰어노는 물살로 부숴버려라/돛단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해변의 묘지'(총 24연 144행 중 마지막 6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