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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즐거움
위치우위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이다미디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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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장에서 노교수가 제자들에게 당부한 말이 생각난다. 책을 많이 읽어라. 읽음에 끝내지 말고 많이 사색하라. 많이 걸어라. 걷다보면 사색의 시간이 많아지리니 걸으며 읽었던 책들도 곱씹어 보며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란 뜻일게다. 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속에 분명 길이 있고 해답이 감추어져 있다. 그것을 찾아내서 실천하는 일은 독자들의 몫이 아닐까 한다.
 
모처럼 한줄의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끔하는 책을 만났다. 오롯이 '사색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이 책의 저자는 중국에선 꽤 알려진 '우치우위'라는 작가인데 이 책으로 그를 처음 알게 되었으니 내겐 생소한 작가다. 기행문 형식으로 쓰여졌으되 여느 기행문과는 분명 다르다. 그의 거침없는 글 솜씨와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역사와 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고 학문적 소양과 입담에 가히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만든다. 활자가 생명을 지닌것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말그대로 막함없이 물흐르듯 이토록 자연스럽게 쓰여진 글을 실로 오랜만에 대면한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이면 어김없이 인생의 철학 한자락이 숨겨있고 역사나 인물을 소개하고 있지만 그 넘어 그만의 솔직한 사유를 듣게된다. 사물을 바라보는 그만의 안목은  로마와 베니스, 인도의 타지마할, 파리, 사막 가운데서도 여지없이 빛을 발하고 있다. 위치우위의 인문학적인 사고와 그의 탄탄한 지식의 기반위에 상상력이 더해지면 과거의 문명이 되살아난듯 살을 더하고 빛이 달라짐을 느낄 수 있다.
 
본래 인류는 거친자연을 벗어나기위해 문명을 창조하기 시작했지만 점차 뒤바꿔 사람들은 황량하고 삭막한 곳이 되어버린 문명세계를 빠져나와 차라리 우메하고 야만적인 자연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세계각국을 돌아보고 여러나라의 문화를 감상했지만 결국 어떤 인류 문명보다 오래된 역사를 지닌 자연, 네팔의 히말라야를 인류가 고군분투하며 이루어 놓은 어떠한 창조물보더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날이 갈수록 팍팍한 세상에서 가끔은 이렇게  책과 함께 자신을 대면하고 사유의 시가을 가져보는 것도 좋으리린 생각이 든다.

“문화의 뒷받침이 없는 경제 발전은 야만이다.”
사회주의 체제이면서 다른 어떤 나라보다 자본주의가 만연한 나라, 문화혁명 이후 중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유학이나 망명을 택할 때 조차 위치우위는  역사의 흔적을 찾아 중국 방방곡곡을 두루 여행하며 중국문명의 흔적과 역사, 문화를 담백하고 쉬운 그만의 문체로 담아냈다. 

이 책은 위치우위의 50여권의 저서 중에서 손수 골라 뽑은 짧은 글들로 그가 여행을 통해 얻게된 경험과 느낌, 사색의 기록으로 처음부터 읽어도 되지만 순서없이 어느장을 펴 읽어도 무관하다. 지나온 역사를 바라보며, 현재 역사의 한가운데를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그의 여행과 함께하며 그가 사색에 잠길 때마다 역사속에서 길을 묻고  길에서 예술과 과거를 돌아보며 그의 생각을 갈피마다 적어 놓았다. 우정과 질투, 폐허와 문화. 인격, 예술과 심미의 세계에 관한 그의 견해와 식견을 들여다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우치우이의 글을 읽다보면 내자신의 위치를 돌아보게 되며 그의 글은 우리를 사유로 이끌고 삶의 길을 묻는 사색에 잠기게 한다. 

중국에는 학문이 깊은 학자가 꽤 있고, 문학적 재능이 있는 작가도 꽤 된다. 하지만 이 둘을 겸비한 사람은 매우 적다. 위치우위, 중국인 대부분이 그를  학문괴 문학에 뛰어난 학자로 평함에 주저하지 않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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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없는 세상
필립 클로델 지음, 정혜승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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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글을 썼다고 믿어지지 않는 작가가 있다면 아마도 '필립 클로델' 그일 것이다. '회섹령혼'이나 '브로덱의 보고서'와 만난 그의 문체는 간결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단 한 줄에도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하는 깊은 울림이 있다. 아이들과 어른들을 위한 '아이들 없는 세상'은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언어로 쓰여진 아이들의 숨김없는 솔직한 마음이다. 어른이 쓴 책이 맞는가 싶은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더군다나 필립 클로델의 작품이 맞는지 다시한번 표지의 지은이 이름을 확인해 본다. 책 속으로 사라진 아이, 요정을 믿지 않는 아이, 포탄을 피해 다니는 아이, 텔레비전만 보는 아이 등 각기다름 모습의 아이들이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아이들은 때로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어한다.어른들이 매일 싸움만하고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지도 않을때, 졸리지도 않은데 일찍 침대로 가야하고, 이도 매일 닦아야하기에 마음대로 놀고 마음껏 먹고 뛰어도 누가 뭐랄 사람 없는 곳으로.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이 어른이되고 자식들이 생긴다면 그들의 부모가 햇던것 처럼 자식들을 너무도 사랑하지만 어쩔수 없이 꾸중하고 벌줴 된다. 누구나 어른이되면 자신이 어린이였다는걸 잊게 된다.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아이들이 모두 사라졌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아이들없이 단 며칠만이라도 자유롭고 싶단 생각을 했더랬는데.당분간 이런 생각은 안할 것 같다. 

 

 엉뚱하고 기발한 아이들의 생각은 연신 웃음을 짓게 만든다. 세상을 착하게 만드는 백신을 개발하겠다는 아이, 요정이 나타나도 시쿵둥한 반응을 보이는 아이. 잘난 형에게 무시당하고 부모로부터 소외 받는 아이,  전쟁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과 상처입은 그들의 마음과 육체, 아이들의 세상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웃음으로 가득하지만 , 때론 가슴 저린 슬픔이 차곡차곡 쌓여 무거워진 작은 어깨가 안스럽기도 하다.

 

지메 이야기는 쓰레기 가득한 공터에 다다른 재메가 남동생에게 뭘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그들주위에 재메와 남동생을 닮은 아이들 역시 도시가 써서 버리고는 잊어바린 거대한 배설물을 뒤지고 뒤지고 또 뒤져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의 시와도 같은 이 글은 가슴 찡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신이 내린 도시'란 뜻의 바그다드에 사는 한 소년은 그가 사는 도시가 총소리와 화약연기로 뒤덮이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전쟁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 길에 널린 시체가 잠시 죽은척했다가 촬영이 끝나면 툭툭 털고 일어나는 가짜 시체가 아닌 죽어서 꿈쩍도 못하는 진짜 시체들로 도시가 즐비하다고. 아이는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이 있다해도 너무 늙어 버렸거나, 귀머거리나 장님이 되었거나, 아니면 영원히 잠에 빠져 버렸을 거란 생각을 한다. 나 또한 아이와 같은 생각을 해본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피부색이 다르다고 종교가 다르다고  이웃끼리 총뿌리를 겨누는 이런 말도 않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신은 대체 어딜 보고 계시기에 이처럼 모른척하실 수 있는지.

 

책 속에는 아름다운 언어와 함께 아이가 크레파스로 낙서한듯한 그림들은 피카소의 그림속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과 이중섭의 그림 에서 튀어나온 둣한 아이들 모습으로  가득하다. 이 책이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자만 이처럼 마음이 불편한 동화도 없으리란 생각이 든다.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아이들 없는 세상'은 한 때는 아이였던 어른을 위한 이야기인 동시에 언젠가 어른이 될 아이를 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른이 되어도 아이의 순수함이 마음 한켠에 남아있길 바라며 세상 모든 아이들이 사랑받고 꿈 꿀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실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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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덱의 보고서
필립 클로델 지음, 이희수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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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의 배경은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이내 알수 있듯 전쟁과 그속에서 죽은자와 살아남은자의 이야기가 보고서 형식을 빌어 쓰여졌다. 홀로코스트의 지옥과도 같은 참혹한 실상을 직접 경험한 자와 그것이 두려워 모면하고자 하는 이들의 대립된 갈등과 인간 내면의 숨겨진 모습을 과장된 표현 없이 고스란히 담고 있다. 보고서의 객관성을 최대한 살리고 군더더기와 부연 설명 없이 전쟁과 인간의 낯섦에 대한 두려움, 그 한계점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브로덱이라는 제3자이면서 동시에 그들 모두의 눈으로. 

 

전쟁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들 마을에 정체를 알수 없는 한 낯선 남자가 찾아 온다. 이름조차 말해주지 않는 그를 사람들은 '안더러'라 부른다. 즉 '다른사람''타인'이란 뜻이다. 이 낯선 이방인의 정채를 작가 역시 마지막까지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닟선이의 존재만으로도 마을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하고, 어느날 바람처럼 마을로 왔던 안더러는 연기처럼 마을에서 사리진다. 작가는 마을을 둘러싼 사건을 주인공 브로덱에게 맡긴다. 그 역시 오래전 전쟁으로 고아가된 후 떠돌이 여인 페도린과 함께 이 마을에 정착하게된 말하자면 이방인인 것이다. 이방인의 손에 마을 사건의 기록을 맡김으로 객관적인 타자의 시선으로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게 된다. 

 

도대체 마을 사람들이 그토록 감추고자하는 진실이란 무엇일까. 하나씩 밝혀지는 그 때의 기억들. 낯선 이방인의 출현으로 인해 자신들이 숨기고 싶었고 애써 외면해왔던 진실과 마주하게 된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마을을 찾아온 정체불명의 사내에 대한 두려움이 결국 그들 안에 깊숙히 잠자고 있던 본성을 들춰내고 어느 무더운 날 터질듯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그들의 잠재된 폭력성이 마침내 한 남자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듯 거두어 가고 만다. 그가 타인이기에, 익명으로 아니 모두의 손으로 자행된 만행은 브로덱이 전쟁이라는 이름하에 저질러진 수 많은 만행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수용소에서 그토록 보아왔던 죽음위에 하나들 보테거나 빼거나 아무 의미가 없듯.

 

 '신은 나무를 수백년 동안 평화롭게 설도록 해놓고 인간에게는 너무나 짧고 너무나 힘든 삶을 주셨다.'

 

'사람의 기억이 다른 사람을 잊었거나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을 어떻게 붙잡아 두는 것일까? 지나간 순간을 암흑속에 내던저 두지 못하는 사람과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전부 어둠속에 내던져 버리는 사람 중에서 누가 옳은 것일까? 사는것, 계속 살아가는 것, 그것은 혹시 현실이 아닐수도 있다고 치부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본문중)

 

현실을 받아들일수 없을때, 내가 악몽을 꾸고 있는건 아닌지, 모든게 자고 나면 사라져 버렸으면, 사실이 아니길 바랐던 적이 있다. 보고서를 마무리하고 사건의 전모를 알게된 브로덱은 생각한다. 역사를, 세상을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보고서에 쓰여진 이 이야기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 아닌가하고.

 

보고서를 받아든 시장은 조용히 난로속으로 밀어넣고 속삭인다. 종이위의 보고서에 마을 전체가 잊고 싶어하는 모든 것들이 있었다고, 그리고 마을은 잊었노라고. 종이는 불탔어도 머릿 속은 태울수 없기에 그는 기억을 지닌 채 마을을 떠난다. 작가는 말한다. '더이상 말할 수 없게된 사람들을 대신해서 '글을 쓴다고. 인간을 인간답게하는 것이  우리가 스스로의 이름에 책임을 지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올바른 이름으로 부르고 이해하고 보듬어 안는 것이라고 이 보고서를 통해 말하고 있다. 브로덱, 그이름을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 그의 당부대로. 그러므로 전쟁의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그가 또다른 현실속 지옥에서 맞딱뜨리게된 이야기를 적은 보고서는 절망을 넘어선 희망의 보고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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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 사계절 1318 문고 61
지크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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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앞에 무뎌지지 않는것이 있을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망각, 그것이 인간을 살아가게 만드는 시간의 위력이고 그렇기에 시간 앞에 어떠한 인간도 고개숙일수 밖에 없음이다. 권력을 자랑하듯 세우진 우뚝 솟은 건축물들도 오랜 세월 앞에 허물어지고 귀퉁이가 닳아 당당하던 위옹은 사라지고 두루뭉술 세월을 닮아 간다. 목숨과도 바꿀듯 열열한 사랑도 세월이 흐른 뒤 이름과 얼굴조차 기억에서 사라져 추억속으로 남는다. 아마도 사랑이 미완으로 남아 애틋함이 깊어 마음속에 미련으로 남아 영속성을 지니게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현실의 사랑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 이 소설속 사랑이 그러하다. 이루어질수 없기에 더욱 잊혀지지 않는 그런 사랑.

 

시간도 느릿느릿 흘러가는 아름다운 바닷가 작은 도시, 고등학교 13학년, 19살 학생과 영어선생님의 조심스런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젊고 아름답고 사람들을 웃음짓게 만드는 매력적인 슈텔라 선생님, 그녀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소년, 아니, 1318문고라더니 흔히들 이야기하는  교사와 학생의 금지된 사랑 이야기인데 사춘기 아이들이 읽기에 무리가 없을까. 아무리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 서구화되고 개방적이라지만 사제지간의 사랑은 금기시 되어왔고 너무 단단히 뿌리를 내린 그 편견을 깨기란 쉽지 않은데. 너무 통속적이지 않을까. 비교육적이진 않을까하는 생각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 한구석을 떠나질 않았다.

 

금지된 사랑을 빌어 순수하고 애틋한 이룰수 없는 절절한 사랑을 그리기위해 작가가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면 그 사랑을 지켜 보는 수 박에. 한장 한장 넘기다 보니 사랑이야기 치곤 너무도 덤덤하고 차분하게 그려 나가고 있다. 순간처럼 찰라의 짧은 사랑, 뜻밖의 슈텔라 선생님의 죽음으로 인해 사랑은 꽃피워 보지도 못하고 소년은  선생님의 추모식을 통해 그녀와의 너무도 짧고 강렬한 사랑을 기억하며 소년의 가슴속에 사랑을 묻는다. 누군가에게 소리내 말하는 순간 행복했던 순간들이, 사랑의 떨림들이 단번에 사라질것 같기에 영원히 비밀을 간직한채 침묵을 지키기로 한다. 어찌생각하면 시작조차 제대로 못하고 끝나버린 어설프고 시시하기까지 한 사랑이지만 소년의 상실감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 같다. 지크프리트 렌츠 특유의 절제된 문체와 선택된 언어를 통해 백마디의 말보다 더 아프게 가슴에 와닿는다. 달리 그가 할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가슴 한켠에 고이 간직할뿐.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듯 그에게도 새로운 사랑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순수했던 19살의 픗픗한 사랑과는 같지 않으리라.

 

"순간, 나는 깨달았다. 저기 떠가는 꽃들이 내 젊음의 영원한 비극으로 기억되는 동시에, 상실의 아픔을 보듬는 크나큰 위안이 되리라는 것을." (본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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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빈리 일기
박용하 지음 / 사문난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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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벗삼아 전원생활을 꿈꾸며 미련 없이 시골로 내려가거나 도시살이가 여의치 않아 역으로 귀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하지만 생각만큼 그리 낭만적이지도 녹록치도 않단다. 마을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현지인들과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결국은 전원생활자체를 포기하고 되돌아 오는 경우도 종종 본다. 이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들은 시골인심이 예전같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농사도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푸념이다. 이 글의 작가이자 시인 김용하, 그이도 서울을 벗어나 시골로 이주했으나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이유야 여러가지 있겠지만 사람사는 곳에서 사람과 부딪치는 문제가 가장 심각한 것이라 인심도 좋지 않고 배타적인 그곳 주민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다 급기야는 두손 들고 우여곡절 끝에 오빈리에 터를 잡았다. 이름도 생소한 오빈리에서의 일상을 기록한 그의 일기를 모아 엮은 글이 바로'오빈리의 일기'이다.

 

여느 시골처럼 오빈리도 대부분의 주민들은 나이지긋하신 어르신들뿐이기에 환갑을 넘긴 이웃집 어르신이 먼저 통성명하자며 선뜻 손을 내미셨고 놀리고 있던 묵정밭을 선듯 내어 놓으신다. 함께 일하고 음식을 나누며 서로 신뢰가 쌓이고 술 한 잔에 정담과 마음을 터 놓고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었다. 욕심 없는 노파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환해지고 어르신들과 스스럼없이 소주 한 잔 기울이며 노래 한자락 목청껏 부르며 그는 그렇게 오빈리 사람이 되었다.

오빈리의 사계

오빈리에 봄은 꽃소식과 함께 한다. 시인은 집 뜰에 꽃나무 심고 나무들이 피우는 꽃들을 감상하며 꽂에 취하고 밭 일궈 고추, 호박, 참외, 오이, 옥수수, 토마토, 시금치 등을 심어 풀 뽑고 거름 주며 영글어 가는 열매에 땀을 흘려  흙과 함께하는 노동의 즐거움을 배우게 되었다. 비가오면 비가오는 대로 비 한 방울의 의미를 생각하며, 바람과 햇빛의 고마움과 자연의 신비한 치유력을 온몸으로 느끼며 근심과 비판적인 마음도 얼마간 정화된다. 오빈리 들판은 늘 같은적이 없다. 산책하면서, 밭일을 하면서 바라본 들녘은 계절마다 빛을 달리하고 봄꽃들의 향연에 왜이리 이쁜 것들 천지냐고 올라오는 새싹에도 피는 꽃들에도 기뻐하고 이뻐하는 시인의 마음이 넉넉하다.

 

텃밭의 오이와 호박은 아침 저녁이 다르게 굵어가는 여름, 눈앞이 신비고 발 밑이 신비라고 시인은 말한다. 주의에 온통 신비 아닌게 없으니 굳이 멀리 가서 구할 필요가 없다며 감탄하는 시인의 모습에서 땀흘려 일한뒤 추수의 기쁨에 들뜬 영락없는 촌부의 마음이 느껴진다.

 

오빈리 들판의 가을이 성큼 다가온다. 벼들도 익어가고 맑고 높고 푸른 가을날, 뜨거운 해가 물러난 후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도 감사하며 행복을 맛본다. 가을빛 곱게물든 하늘에 감동하고 지나온 모든 것들이 경이롭고 지나쳐버린 것들을 아수워한다. 

기골이 장대하던 은행나무도 자연 앞에선 어쩌지 못하는가 보다. 황금빛 절정이더니 추위로 잎이 무녀지고 삶의 그 어떤 화려하고 빛나는 형식일지라도 조용히 눈 내리는 밤보다는 나중의 일이다라고 조용히 말한다.

 

일기 곳곳에는 시인의 괴로움과 고통의 순간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아마도 일기이기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마음을 시인도 갓출수 없었나 보다. 시골생활의 소소한 즐거움과 행복 뒤편으로 마음을 다스릴 수 없을 만큼 절박함이 베어있다. 화에 시달리며 끓어오르는 분노와 증오심을 다스리지 못해 떨쳐내려 해도 괴롭히는 생각들, 마음의 상처, 거짓말과 속임수와 타락한 세상에 대한 울분을, 주인행세를 못하며 노동력이나 제공하는 노예처럼 살아가는지사람들, 괴로움 속에 무기력하게 지나가버리는 날을 안타까워하며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방황한다.


“일기가 사적인 글이라고 생각하면 순진한 생각이다. 일기처럼 정치적인 글도 없다. 모든 글은 정치적이고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이미 정치적이다. 정치적이지 않고 사회적이지 않은 글쓰기란 게 가능할까.”
시인의 말처럼 시인의 일기를 읽으며 일기가 사적임을 넘어서 정치적일 수 밖에 없는지 그 연유를 알것 같다. 그의 일기는 자신의 이야기인 동시에 세상으로 부터 도망쳐 아무리 숨으려해도 숨을 수없고 술에 취해도 잊혀지지 않는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적 모순과 썩어버린 정치, 경제, 교육에 관한 분노이며 탄식이다. 책상 앞이 그가 있어야 할 곳이며, 투쟁할 곳이라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정성을 다해 글을 써 보지만 한 줄도 쓸 수 없는 날이 더 많다.

역설적이게도 스스로 끓어오르는 화를 다스리지 못해 괴로움의 날들을 보낸 시인은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한 다짐을 한다. '내 앞에는 내가 가보지 못한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인간을 용서하는 길이고 또 하나는 인간을 사랑하는 길이다'라는 시인의 말처럼 그 길은 시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길이리라. 비록 힘들고 가시밭 투성이라 할지라도 피흘리며 가야할 양심의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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