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 바보 예찬 - 당신 안의 바보를 해방시켜라!
김영종 지음 / 동아시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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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시 쓰는 21세기의 '우신예찬' 

르네상스의 위대한 학자 에라스무스가 쓴 '우신 예찬'은 사실 제목만 겨우 들어 봤을 뿐이다. 그렇기에 우신 예찬에 앞서 바보 예찬을 먼저 읽게 되었으니 순서가 뒤바뀐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찌됬건 에라스무스의 이야기가 언급되지 않았다면 다분히 개인의 돌출적 발언과 말도 안되는 주장 쯤으로 여겼을 게다. 좀 황당하지만  '우신 예찬'을 들먹이는 통에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지만 지은이가 엄청난 독서량과 재능을 겸비한 김영종이라니, 그가 쓴 21세기에 이땅에 다시 살아난 바보 예찬, 풍자와 입담, 날카로운 현실 비판을 통해 참다운 삶이란 무엇인지 바보에게 그 해답을 찾아 본다.

올해가 에라스무스 '우신예찬' 탄생 500주년이란다. 금서인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딘 이 책은 풍자문학의 성서로 추앙되었으며 교과서에도 실렸으니 어찌보면 '헤이,바보  예찬'은 '우시 에찬.의 오마주가 아닐런지 짐작해 본다.작가는 어리석음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광대 같은 바보와 똑똑한 척하는 지식인이나 현자와 같은 바보가 있다고 말하면서 아는 체하는 자들을 진짜 바보라 풍자한다. 신학자들의 쓸데없는 논쟁,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의 위선, 칼과 불을 가지고 그리스도교도의 피를 흘리게 하는 고위 성직자들을 신랄하게 풍자하며 지식과 지식인들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있다. 

지식은 무엇을 하는가? 목구멍에 풀칠하고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경쟁에서 앞서가고 물건 잘 고르고 잘 사용하고 자식교육에 도움 주고, 그러고 나면 달리 뭐 있나요? 집단적으로 생태 파괴하고 대량 살육하고 억누르고 굴종하고 빼앗고 빼앗기고 교육비 때문에 등골 빠지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악행이 저질러지고 있는데도 지식을 숭상합니다. -본문중-

특히 저자는 자본주의와 21세기 물질문명과 우리가 처한 현실을 돌아보며 욕망과 빠르게 치닫는 변화의 밞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기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아가려는 혹은 적응하려는 온갖 노력들이 결국 현자인 척하는 어리석음에 현혹되고 속은 것이라 하며, 그들의 지식과 이념 등을 거부하고 인간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건강한 바보’를 해방시켜 참된 인간의 삶을 구현하라 말한다. 

그가 제시한 덕목들을 살펴 보면 우습다 못해 통쾌하다. 아이 낳는 위험과 고통 등에서 경솔하지 않으면 과여 결혼이란 걸 하게될지, 경솔함 때문에 고통 속에서 아이를 낳았던 여자가 또 아이를 낳는 것은 망각 때문이라며 걸죽한 입담을 풀어 놓는다. 쾌락을 통해 맑아지는 정신의 세계를, 낙심한 이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아첨을, 분노를 통해 진정한 용기를, 정욕을 사랑함으로써 이성에 대항하라 한다. 게다가 게으름을 자연 그대로 즐기고, 미래의 희망 따위에 속지 말라 한다. 이성의 속임수와 착각에서 깨어나 우리 몸의 주인인 자유인으로서의 바보가 되라고 계산적이지 않고 계획저이지도 않은 이성에서 해방된 진정한 바보를 우리 몸에서 해방시키라고 말한다.

거침없는 말과 사설 속에 그의 사상과 지식이 녹아들어 있고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이 숨겨져 있음을 그의 그을 읽어 보면 금새 알 수 있다. 지금은 우리 내면에 잠들고 있는 바보를 깨워야 할 때다. 위선에 질식하기 전에, 진정한 삶을 살아 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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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조용호 지음 / 문이당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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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갖 입학한 내게 노래로 운동을 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새롭고 흥미로웠다. 강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서정적인 노래가 시작되자 조용해 지고 뒤이어 연단에 오른 열띤 연사에 환호하고 힘께 박수 치고 구호를 외치고 호소력 짙은 노래패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가두 행진에 나서는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노래의 또 다른 힘을 느꼈더랬다. 80년대 대학을 같이 다니던 바로 밑 학번 동생은 노래 꽤나 하였기에 노래패에 들어갔다. 노래패의 공연이 빈정부 시위로 연관되곤 하던때 인지라 부모님 몰래 공연다닐 때 조차도 음료수 사들고 갔던 일이 떠오른다. 

 

기자 출신인 조용호씨의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는 80년대 노래 운동을 배경으로 같은 노래패 동아리 활동을 하던 나와 연우 그리고 승미. 선화의 이야기다. 운동권 가요니 민중 노래니 하여 구분 짓기에 앞서 그저 노래가 좋아서 종종 공연을 보러 가곤 했으며 '오월의 노래' '마른 잎 다시 살아나' '광야에서' 같은 노래를 좋아 한다. 그렇기에 이 글을 읽는 중간중간 마다 나오는 운동권의 명곡들과 칠레 가수 비올레타 파라의 이야기가 뜨겁던 청춘의 시절을 떠오리며 그리움으로 남은 아련한 추억에 젖어 본다.

 

최고의 노래꾼 연우와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승미와 선화, 그리고 승미를 사랑하는 나. 신문기자가 된 나는 둘의 사랑을 축복하고 승미를 가슴에 묻어 둔다. 

그러던 어느 날, 가객 연우가 나에게 비망록을 남긴 채 사라진다. 비망록에는 ‘사라진 노래를 찾아 떠난다’며 칠레의 가수 비올레타 파라의 노래 〈생에 감사드리며〉의 가사가 유언처럼 적혀 있다. 나는 연우의 아내 승미에게 비망록을 건네고 그녀와 함께 연우를 찾아 나선다. 연우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연우가 떠난 목적이 자신의 노래의 이유이던 여인을 찾아 나선 것이란사실을 알게 된다. 오랜 시절 대학 동아리에서 같이 활동했던 선화라는 여인, 아쟁을 켜던 국악과 학생을 기억해 낸다.


소설은 두 여자 사이에서 흔들리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연우와 그의 아 버지. 연우에게 아내 승미는 에덴이며 선화는 몸부림치는 연옥이지만 고통이 없으면 쾌락도 없고, 번민이 없으면 행복도 없다며 연우는 선화를 찾아 칠레까지 찾아간다. 
승미를 보며 나는 오래전 잊은 승미에 대한 감정과 만나게 된다. 한때 좋아했지만 오래전 친구의 아내가 된 여인과 함께 그녀의 남편과 다른 여인을 찿아나선 나. 승미에게 눈에 보이진 않아도 존재로 느낄 수 있는 바람이고 싶다는 그의 마음이 애잔하고 안타깝다. 남편과 사랑을 잃었지만 주어진 자신의 몫의 고통을 견디고 살아갈 승미, 선화의 해금에 연우의 노래를 실어 그들만이 낙원을 꾸리길 바래 본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노래는 사랑을 싣고 자유와 이상을 싣고 사람들의 가슴을 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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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 법상 스님과 함께하는 쿰부 트레킹
법상 지음 / 불광출판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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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방학을 맞이한 아이들의 성화에 남들보다 이른 휴가를 떠나는 사람믈도 있고 다른 해보다 빨리 찾아온 무더위와 장맛비로 습도까지 높다보니 도심을 떠나고 싶은 간절함이 절정에 이른다. 매년 휴가 때마다 유명 피서지로 모여드는 인파로 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한다. 천정부지로 솟은 숙박료에 각종 바가지 요금을 감수하고 서라도 꼭 떠나야 할지 짐짓 망설여 진다. 올해는 시원한 계곡에 텐트치고 각자 좋아하는 책 서너권씩 싸들고 계곡물에 발 담그고 독서 삼매경에 빠져보는 것도 좋으리라여기며 가족들 의견을 타진 중이다. 여름철에 장엄한 설산 히말라야의 절경과 자연을 닮은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법상스님의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이 더위를 잊는데 제격일 게다.

산악인들의 꿈은 히말라야 산자락이라도 밟아보는 것일게다. 산사에서 수행과 명상을 하시던 스님께서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의 반은 성취한 것”, “모든 것을 버리고 히말라야로 떠나라.”는 티베트의 성자 밀라레빠의 말에 히말라야 트레킹에 나섰단다. 스님은 걷는 것이 가부좌 틀고 수행하는 것 못지 않다며 대자연속에서 일기를 써내려가듯 조곤조곤 낮은 목소리로 옆사람에게 이야기 하듯그낡날이 느낌을 풀어 놓는다. 거대한 히말라야 봉우리 앞에서도 결코 야던스레 소리높여 감탄 조차 않고, 다만 바라볼 뿐이다. 히말라야에서 만난 대자연의 장관, 도중에 만났던 사람들, 동물과 바람, 들꽃, 우윳빛 강물색 마져도 감동적이다. 깨달음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스님의 여정을 따라 걷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지혜에 눈뜨게된다. 대자연의 숨결, 햇살의 따스함, 간들거리는 시선한 바람, 코 끝에 스미는 흙내음..  영혼의 고향 히말라야가 가슴 깊이 와 닿는다.

 

“세상에서는 ‘내가 확장되는 즐거움’에 빠져 살지만, 여행을 떠나 삶을 관조하게 되면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를 비로소 깨닫고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작아짐의 즐거움은 곧 정신적 차원의 무한한 확장을 의미한다. 나라는 아상과 에고가 작아지고 작아져 무아(無我)가 되었을 때 비로소 온 우주와 하나 되는 우주적 참된 자아와 만나게 된다.”

히말라야 쿰부 트레킹을 통해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을 느꼈다는 그의 말처럼

사실 알고 보면 이 세상 모든 문제가 '나'로 부터 시작되었으니 세상모든 것이 그저 잠시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가는 것일 뿐. 소유도 명성나 권력도 가족도 심지어 우리의 생명까지도 잠시 왔다가 100년도 안 되는 잠깐 사이에 사라질 뿐인데 욕심 과 집착 때문에 정작 중요하 삶을 재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건 아닌지. 여행을 통해 자기의 에고와 아상을 겸손히 비우고 내려놓게 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어디에도 구속됨 없이 자신의 자유로운 삶의 길을 걷는 것, 그것이야말로 삶 속의 히말라야이며 생의 매 순간이 언제나 순례길이며 여행길 이라는 말이 오래도록 가슴에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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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헨지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9-4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9
버나드 콘웰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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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헨지는 영국의 월트셔 지방 손스베리 평원에 있는 것으로 거대한 기둥모양의 돌들이 서 있는것으로 후기 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고도의 발전된 종족이 1개당 4톤 이상의 무게가 나가는 60여개의 돌기둥을 웨일스 프레슬리 산맥으로 부터 거룻배를 이용하여 운반해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왜 스톤했지를 세웠는지 누가 무슨 목적으로 세웠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다만 과학자들에 의해 달의 움직임이나 일식, 일물이나과 일출 등을 관측하는 천문관측기구가 아닌가 예측할 뿐이다. 이런 그들의 주장을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을 보테 

대서사시 '스톤 헨지'가 탄생되었다.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알려지지않은 고대인들이 이야기를 장대한 스케일과 독창적인 종교의식, 신비한 마법의 영역을 아우르며 재미와 상상의 고대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역사에 관심이 많고 특히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적당히 조화시킨 역사 소설을 좋아하기에 역사소설의 대가 버나드 콘웰의 작품을 즐겨 읽는다. 그의 작품은 상상력과 치밀함, 스릴 넘치는 모험과 사실적 묘사로 인해 역사의 현장에 서있는 듯한 특별한 경험을 하게끔한다. 한 부족의 20여년간의 이야기를 통해 거친 자연속에 살아가는 고대 원시인들의 삶과 종교,문화, 사랑과 야망을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은 가혹한 기후와 굶주림에 맞서고 다른 부족들과 전쟁을 치르며, 노한 신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면서 부족의 존립을 지키려는 라사린 부족을 20년에 걸쳐 조명한다. 고대 브리튼을 배경으로 그려낸 이 삶과 죽음의 이야기는 생생하고 거칠면서 매혹적이다. 콘웰의 독보적인 상상력으로 재탄생한 이 원시 부족들의 이야기 속에서 날것 그대로의 인간 욕망과 광기, 사랑과 배신, 전쟁과 마법이 펄떡펄떡 뛰는 듯하다.



피를 나눈 삼형제의 각기 다른 삶과 야망, 광기와 질투, 권력의 욕망을 통해 인간 본연의 욕망과 그로인해 종국에는 파멸의 길을 걷게됨을 그리고 있다. 뛰어난 전사이자 독재자인 첫째 렌가, 장애를 갖고 태어났지만 운명과 맞서 마침내 위대한 마법사가 되어 거대한 신전을 세우려는 계획을 갖고 세상을 변화 시키고자 하는 꿈을 꾸는 둘째 카마반, 그리고 온갖 고통과 배신에ㅍ의해 족장의 아들에서 노예신분으로 그리고 다시 건축가로서 변신하여 위대한 신전 건설을 이뤄내고 마침내 족장의 자리에 오른 평화주의자 막내 사반이 이야기가 중심에 있다.

지나친 야망과 폭력성을 경게한 아버지에 의해 쫒겨나다시피 마을을 떠난 큰아들 렌가는 이방인들과 함께 이웃을 약탈하고 정복하여 힘을 키우고 약육강식의 원시적 세계에선 힘만이 권력임을 믿는다. 장애로 인해 뒤틀린자 버림 받은자에서 거대한 신전을 꿈꾸는 마법사로 돌아온 둘째 카마반은 종교의 힘을 빌어 세상의 어둠과 겨울을 없애고 삶의 주기를 변화시키기 위해 신전 스톤헨지를 건설하려 한다. 형들에 치이고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며 그의 목숨을 구해준 상인과 함께 세상을 떠돌며 배운 지혜와 합리적인 사고로 신전 건설의 책임을 맡아 그들의 꿈인 신성한 신전을 건설하는 셋째 사반은 역자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이상과 가치 과학을 대표한다.

스톤헨지를 세운 고대 기술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라든지 카마반이 달의 신과 해의 신을 조화를 위해 신전을 짓기를 원하고 있지만 신전 건축을 원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무엇일까?  사반조차  그 이유를 확실히 설명할 수 없다. 분명하 것은 눈에 보이거나  물질적인 이득이 아니며 잡을 수 없는 목적을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재산과 인력을 동원하여 오랜 시간과 노력 끝에 소망하던 신전을 갖게된다. 우리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무형의 가치를 쫒는 이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위대하고 숭고함을 발견한다. 요즘처럼 자고 일어나면 언제 세워졌는지도 모르게 

우뚝 솟은 건물들, 쉽게 세우고 또 간간히 부쉬고 새롭게 다시 세우는  현대사회와는 달리 온갖 험난하 과정을 겪으며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연에 거스르지 않으며 오랜 세월을 바쳐 비로소 세워진 건축물이 신마저 감동시켰으리라. 그들의 정성이 세월을 거슬러 영원히 살아남는 건축물을 완성시켰음이다.

 

하나의 기둥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거대한 돌은 천상의 움직임으로 연결되며 그들의 신들을 연합하고 만족시키기 위한 기원이 담겨있다. 72개나 되는 거대한 석상을 옮기는 과정 하나하나가 신기하기만 하다. 돌 표면을 매끄럽게 깎는 법이라든지, 아치를 세우는 과정이 기계의 힘이 아닌 오롯이 인간의 힘만으로 가능했다는 사실에  고대인의 지혜와 믿음, 그들의 능력에 경탄해 마지않는다.


신전을 세운 사반은 질투와 욕망으로 인한 형들의 몰락을 지켜보며 족장에 오른다.그는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지도자가 되어 구원의 소망으로 지어진 사원을 지키며 부족과 함께 평화를 택한다.
단순히 고대 유적에 얽힌 이야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 현대를 사는 우리보다 더 높은 가치와 이상을 꿈꿨던 고대인들을 통해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를 갖게 한다. 고대 건축물 '스톤 헨지'가 건축물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은 그들의 영혼이 살아 숨쉬고 꿈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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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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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물건을 빼내는 긴장감이 나를 더욱 매혹시켰다. 타인의 물건에 내 손가락이 닿는 순간의 긴장과 그 위에 찾아오는 따끈하고도 확실한 온도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영역으로 뻗쳐진 내 손가락, 위화감 따위는 죄다 지워버리는 내 손가락 끝의 살갗에 내달리는 쾌락을!”
   -본문 중-

이 책의 주인공 니시무라의 직업은 '쓰리'란 제목과도 같은 소매치기다. 도쿄를 무대로 주로 부유한 사람들의 지갑을 훔치는 그는 천재적인 솜씨를 지녔다. 그는 타겟으로 찍은 사람들의 주머니로 손가락을 뻗쳐 그 끝으로 느껴지는 무게감, 쾌락, 긴박감과 스릴을 즐긴다. 소매치기의 순간과 심리를 이토록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눈앞에서 순식간에 벌어지는 소매치기 모습을 보는 것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만드는 작가의 묘사는 읽는 내게도 소름이 돋게 만든다.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지하철 안이나 부유한 계층들이 많이 모이는 클래식 공연장에서, 혼잡한 장소에서 그는 타인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훔친다. 그에겐 죄의식도 거리낌도 순간의 감정도 없다. 그저 버릇처럼 손가락 사이에 누군가의 지갑이 끼워지는 순간의 짜릿함이 온뭄으로 느껴지는 전율의 순간을 즐길 뿐이다. 

 

몇 년 전, 의문의 사내로부터 임무를 부탁받고 일을 끝낸 후 같이 일했던 친구는 소식이 두절되었고 그 역시 도쿄를 떠났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도쿄. 

어느날, 니시무라는 어떤 남자의 지갑을 낚아챈 순간 선글라스를 낀 무표정한 얼굴, 목에 난 상흔이 같이 일하던 친구들과 함께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처럼 임무맡겼던 '기자키'가 바로 그라는 것을 알았다. 기자키는 니시무라의 운명을 쥐고 절대적인 운명의 지배자가 된다. 그는 니시무라에게 세 가지 임무를 제안한다. 자신과 그가 알던 소매치기 모자의 목숨까지 담보로 한 거절할 수 없는 제안. 니시무라는 어쩔 수 없이 한가지씩 임무를 수행해 나간다.


“타인의 인생을 책상 위에서 규정해 나간다. 타인 위에 그렇게 군림한다는 건 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만일 신이 있다면 이 세계를 가장 유쾌하게 음미하고 있는 건 신이다. 나는 수많은 타인들의 인생을 조종하면서 이따금 그 인간과 동화되는 듯한 기분이 들어. 그들이 생각하고 느낀 것이 내 속에 고스란히 들어오는 일이 있어. 여러 인간의 감정이 동시에 침입해 들어오는 상태. 너는 그런 건 맛본 일이 없으니 잘 모르겠지. 다양한 쾌락 중에서도 그게 최상의 쾌락이야. 자, 똑똑히 들어.”
 

운명이란 무엇일까? 누군가에 의해 타인의 인생이 좌지우지될 수 있을까? 타인의 운명을 지배하는 것이 가장 큰 쾌락이라는 기자키. 과연 니시무라의 운명은 그의 뜻에 따라 결정지어질 것인지.

 

니시무라가 어렸을적 보았던 어렴픗한 탑의 영상을 통해 작가는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원하게 되는 어떤 것, 인간의 운명이나 세상에 관여하는 초월적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소매치기 기술로 돈 걱정도 없이 세상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사는 니시무라는 어릴적 가난으로부터 먹을 것을 훔치던 그때부터 희미한 탑의 존재를 떠올린다. 잡을 수 없지만 늘 같은 거리만큼에 서있는 탑. 그는 자유롭고자 했지만 늘 운명에 얽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이 절대 악의 화신인 듯 계획적이고 완벽한 범죄를 자랑하는 범죄를 예술적차원으로 생각하는 한 남자에 의해 운명을 지배자 당하게 된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상황에서 운명에 저항하는 소매치기 니시무라. 운명의 지배자 기자키.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지만 사회는 그를 일회용 소모품 처럼 이용하고 버리고 만다. 니시무라의 모습에서 어렵지않게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모습을 떠올린다. 밑바닥 인생, 그들의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현대인들의 고독을 발견하게 되는건 왜일까? 이글을 다 읽었어도 니시무라이 운명은 아직도 끝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가 새로운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 그의 의지대로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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