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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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은 『마음』이다. 이런 말로 시작하는 게 별 뜻 없이 띄우는 모양새로 비칠지 모르지만, 저자의 명성을 함께 고려하면 그렇고 그런 말이 아니게 된다. 이 소설가로 말하자면 일본의 대문호이자 자국에서 최고로 사랑받는 문인이다. 비단 역사적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현대 일본에서도 수차례 읽히고 인정받는 작가라는 뜻이다. 걸출한 작가들이 여럿 있는 일본 문학계에서도 그의 위상이 드높다는 것은 어쨌거나 대단한 일이다. 근대 한국 소설에도 소세키의 영향이 닿았다고 평가받으니 말 다 했다.

무엇보다 그의 인기 비결은 쉽고 반듯한 문장과 더불어 그에 걸맞은 주제 의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소세키의 글은 읽기 쉽다. 고전 소설을 처음 읽는 분들께 추천하는 작품 목록에 이 책이 자주 소개될 정도로 말이다. 그의 글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사람들도 아마 문장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워서라기보다 일본 고유의 어휘 및 문화가 낯설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런 경우, 대게 쉽게 풀어쓴 번역서를 찾아 읽으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된다.

또 그런 문장으로 쓴 소설은 여러모로 정직하다. 사람으로서 도리가 무엇인지, 윤리를 져버린 인간은 어찌 되는지를 묻는 소설이 많다고 하니까(나도 소세키의 소설을 두 권밖에 못 읽어봐서 잘 모른다. 이런 내용들은 나도 다른 책이나 웹서핑을 통해 찾아본 것이다). 말하자면 잘 정돈된 문장으로 그릇됨 없이 윤리적으로 살려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쓴다. 문장과 이야기가 그렇게 서로 호응하여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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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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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말했지만, 생각보다 나는 소세키의 소설에 크게 감탄한 적이 없다. 그의 책을 이후로 한 권만 찾아 읽은 까닭도 그런 연유에서다. 소설 전면에 일본인으로서 의식을 대놓고 표명해서 그럴지도 모르고 유명 작가의 인기에 괜한 반발심이 생겨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 『마음』을 재독하면서 왜 내가 이 소설에 그리 썩 동감하고 싶지 않았는지 알 듯했다. 이 책은 회개와 참회를 주제로 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혼자 속앓이하는 소극적인 지식인의 자화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할 수 있다.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원년의 풋볼』과 나란히 놓고 생각해 보면 참말이다 - 그런 면에서 선생님이 나에게 항상 꺼내는 말, 자기는 그다지 훌륭한 사람이 못 된다는 말은 정말 진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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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총 세 파트로 나뉜다. 하나는 선생님과 내가 만나게 된 사연과 교류, 둘은 내가 잠시 선생님 곁을 떠나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 마지막 셋은 내가 떠난 다음 선생님께서 부치신 편지글. 말할 것도 없이 마지막 선생님의 편지글이 『마음』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겠다(심지어 분량도 가장 길다). 그 중요한 세 번째 파트에서 그전까지 비친 선생님의 기이한 행적, 알 수 없는 말들의 근본적인 이유를 모조리 밝혀진다. 따라서 처음 책을 읽는 독자 입장에서 해당 파트에 가까워질수록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더욱 커지게 된다.

이 말은 돌려 말해 두 번째로 읽었을 때는 그만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다는 소리처럼 들린다. 마치 추리 소설의 범인을 안 채로 다시 읽을 때 재미가 반감되듯이. 그러나 내가 하고픈 말은 이런 게 아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선생님의 과거를 몰색하는 추리 소설도 아닐뿐더러, 재독할 시 그 카타르시스가 덜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처음 읽었을 때 보이지 않던 1부, 2부의 숨은 뜻이 표면으로 드러나면서 서사가 풍부해진 감도 없잖아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풍부해진 서사가 우리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제시되는지에 달렸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우리가 확 감명받아도 두 번 들었을 때 똑같이 그러란 법은 없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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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파트로 나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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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으로 들어가서, 선생님은 자기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겼다. 그가 사람을 경멸하고 피한 이유도 스스로가 경말당하고 피해야 할 인간의 전형이었기 때문이다. 사연인즉슨 어린 시절 선생님은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면서 삼촌께 의탁했다.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선생님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삼촌께서 자신의 장래를 책임질 줄로만 알았다 - 평소 삼촌을 훌륭한 사람이라 칭한 아버지의 말씀, 그리고 사업과 정계 일을 동시에 해내는 삼촌의 수완을 마냥 믿은 것이다. 나중에 선생님은 삼촌이 아버지의 유산으로 사업 자금을 충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의 배신감으로 선생님은 삼촌네 식구와 절연했다. 돈이 사람을 타락시킨다는 걸 여실히 깨달으면서. 그렇지만 출가를 할 때 삼촌에게 어느 정도 지원을 받아 - 아버지의 유산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 학생 신분으로 부족하지 않은 돈이 선생님 수중에 떨어졌다. 선생님은 다니는 대학과 가까우면서도 괜찮은 형편의 하숙집을 찾다가 어느 미망인 모녀가 사는 집에 정착했다. 선생님은 그 집안 식구들과 차츰 친해지며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특히 미망인의 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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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인의 딸을 선생님이 남몰래 흠모했다는 걸 누구든 쉽게 눈치챌 수 있을 테다. 그렇지만 연애 쪽에 거의 무지했던, 지극히 소심했던 선생님이 상대방 여자의 마음을 알 리가 없다. 그 무렵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K가 장래 문제로 부모님과 다투면서 생활고를 겪게 됐다(부모님이 K에게 보냈던 금전적 지원을 끊은 것이다). 그보다 훨씬 여유로웠던 선생님은 K를 자기 하숙집에 끌어들이려 했다.

이 일을 K도 미망인도 한사코 거절했지만, 선생님 딴에는 궁핍한 친구를 돕는 일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믿으며 강제로 추진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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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짤막한 장(章)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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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선생님은 K의 수호천사 역을 자초한 거다. 그에 더해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꺼림직한 반응을 보인 미망인을 두고 도덕적 잣대를 들먹이며 속으로 지탄했다 - 그 집 주인이 정작 하숙생 신세인 선생님이 아니라 미망인이었음에도.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은, 처음에 입을 꾹 닫고만 지냈던 K도 미망인 식구와 친해졌고 그들도 K를 어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생님은 아무하고도 친해지지 않으려 한 K의 폐쇄적인 성격이 그를 좀먹는다고 생각하곤 했다.

문제는 이제 선생님 쪽에서 발생했다. 어느 날 대학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미망인의 딸과 K가 한 방에서 나란히 떠드는 소리를 선생님이 들은 것이다. 선생님이 나타나자 여인은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고 K는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그때 선생님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K가 미망인의 딸을, 혹은 미망인의 딸이 K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게다가 K의 성격이 밝아진 이유가 자신 덕분이 아니라 미망인의 딸 덕분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선생님을 옭아맸다. 왜인지 모르지만, 선생님의 마음속에 K는 자기에게 기대고 의지해야 하는 존재로 남아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생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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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상 줄거리를 늘여 쓰면 이야기도 길어지고 정작 내가 하고픈 말도 못 할까 봐 이만 줄인다. 눈치 빠르신 분들은 여기까지만 듣고도 뒷내용이 어찌 될지 짐작할 수 있을 테다. 더군다나 1부의 선생님이 보인 행적까지 종합하면 그들의 삼각관계가 비극으로 치달았다는 것도.

나 또한 줄거리를 요약하면서 은근히 강조했는데, 선생님은 남에게 호의를 자처하면서 진짜 상대방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생각지 못한 치였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행동이 무조건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고 본 도덕적 강박도 있었다(이는 어린 시절 작은 아버지께 배신당한 트라우마로 생긴 의식일지도 모른다).

이런 도덕적 강박이 생각대로 먹히지 않자 되려 선생님은 K에게 반발심을 가지고 말았다. 분명한 악의를 갖고서 해코지할 속셈까지 없었지만, 마음속으로 언제든 K를 져버릴 준비가 돼 있던 셈이다. 그 결정타가 향후 있을 K의 고백 사건이다. K가 미망인의 딸을 좋아한다고 밝혔을 때, 물론 선생님은 그를 축해해줄 입장이 못 됐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정당당히 그의 연적을 자처했어야 했는데. 선생님은 몰래 미망인을 찾아가 딸을 사랑한다고 고백해버렸다. 여인을 K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온 행동이었지만, 그 일은 여러 모로 인간이 둘 수 있는 최악의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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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번에 읽은 『마음』의 판본은 문학동네북클럽 한정 특별 보급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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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알고도 K는 평소와 똑같이 선생님과 모녀를 대했다. 그 사실을 몰랐던 선생님은 죄책감, 부끄러움, 죄를 들킬지 모른다는 초조함과 불안에 시달렸다. 더 이상 선생님은 여인과 K를 따로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K가 죽어버리다니. 그의 죽음이 고백 사건 이후로 벌어진 이상, 선생님 딴에는 - 다른 걸 일단 제쳐두고서라도 - 자신의 도덕성에 커다란 결점이 생긴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선생님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토록 혐오했던 삼촌과 다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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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을 여러 이유에서 배반하는 일이 드물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 비슷한 일이 내게도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도 한 번쯤은 있었기에 『마음』이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가 된 걸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마음』 속 선생님의 죄책감에 자유롭지 못함을 느낀다. 그런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선생님의 반성에 전적으로 동의하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라 하겠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연유는 편지글 속 의문스러운 두 줄의 문장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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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은 그 슬픔으로 인해 얼마나 편안해졌는지 모릅니다. 고통과 공포로 옭매어 있던 내 마음에 물 한 방울의 윤기를 떨어뜨려준 건 그때의 슬픔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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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마음』,

문학동네, p.267-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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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백은 K의 장례를 치르며 선생님이 느낀 심정을 풀어쓴 것이다. K의 자살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그의 유족들에게 사실대로 고하지 못한 채 다시 죄책감에 시달린 선생님은 눈물을 흘림으로써 비로소 후련해질 수 있었다. 내가 이 눈물을 두고 싸구려라느니 가식적이라느니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우리가 감당 못할 큰 죄를 저질렀을 때 한낱 가치도 없을 법한 눈물이 커다란 위로로 다가올 수 있으니까. 하지만 위로가 순간의 위로로만 그친다면?

그 뒤로 선생님은 피폐해져만 갔다. 아내와 장모님이 된 여인과 미망인은 당최 선생님이 무기력하게 지내기만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럴수록 선생님은 그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그들을 이해시킬 수도 없다는 이 처지를 혼자서, 더 비참하게 여겼다. 세월이 흘러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나'가 등장하는 동안 내내. 그렇다면 이것은 진정한 참회인가? 내가 묻고 싶은 지점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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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인한 한 사람의 죽음은 인생에 있어 씻을 수 없는 과오로 남는다. 따라서 반성과 참회의 과정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필요한 시간이나 노력은 그 누구도 정해 놓은 바 없다. 이것은 ① 온전히 참회하는 입장의 '나'와 ② 피해를 입은 '유족'의 심정에 달려 있다고 봐야 옳겠다. 그래서 일정 기간 동안 반성한다는 식으로 참회의 종결을 고하거나 반성할 기회를 어영부영 떠밀다가 죽음으로 도피하는 사람의 경우, 진정한 의미에서 참회했다고 볼 수 없다.

나는 죄지은 사람이 평생 참회만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참회가 꼭 피해자나 유족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죄지은 당사자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보는 편이다. 결국 소설의 말마따나 마음의 '까만 점'을 직시한 채 살아갈 줄 아는 마음이 참회 비슷하지 않겠는가.

사건을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래서 선생님은 참회를 했다고 볼 수 없겠다. 선생님은 죄를 인정하기가 두려워 세상과 둑을 쌓았고, 감히 아내에게 까만 점을 찍을 수 없어 진실을 고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진실이라는 것은 실상 K와 선생님 사이의 문제였지 아내와 큰 관련성은 없었다 - 그와 동시에 아내는 고백 사건에 휩쓸린 최대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것은 선생님이 그 사건으로 아내가 비통해 할 것임을 가장한 자기 기만에 가깝다. 마치 선생님이 K의 유서에 별말이 없었음에도 그 죽음이 자기 탓이라고 넘겨짚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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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실린 해설 글도 참고하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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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선생님의 자살은 그래서 찝찝하다. 그 명분은 메이지 정신에 따른 순사였지만,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선생님이 다른 이유로 그 선택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선생님은 끝까지 메이지 정신에 따른 것임을 강조한다. 어쩌면 아내에게 자신의 과거를 덮어 둘 요량일 수도 있겠지만, 선생님은 K를 잃은 죄책감으로 죽는다는 게 여전히 인정하기도 직시하기도 두려워서 메이지 정신을 끌어들인 게 아닐까? 자신을 비겁하다고, 부끄럽다고 여긴 선생님은 이후로도 세상을 외면한 채 비겁하게 살았고, 그것이 최선인 줄로만 알아 제대로 뉘우친 적도 없으며, 결국 그런 식으로 죄를 죽음과 함께 묻었다. 아내는 진실을 영영 알지 못해야 할까? 그것도 선생님이 스스로 생각한 도덕적 잣대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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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순사의 근거를 메이지 정신에 두었다고 밝혔다. 이 말을 비틀어 보면 이처럼 소극적이고 우울한, 자해에 가까운 자기 반성형 인간은 메이지 이후로 종식됐다는 소리일 수도 있다. 선생님 이후의 다음 세대는 그릇된 과거를 바로잡고 반성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담겨 있는 그런 결말로 말이다. 그 반성하는 인간형을 나는 오에의 소설에서 확인했기도 했다. 세대는 그런 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고치고 발전해 나가는 듯하다.

진정한 반성에 이르는 길은 이렇게나 험난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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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만든 내 과거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경험의 일부이자 나 이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얘기라서, 과거를 거짓 없이 글로 남겨두려는 내 노력은, 인간을 아는 데 있어서 자네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헛수고는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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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마음』,

문학동네,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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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나쓰메소세키 #마음 #유은경_옮김

#문학동네 #일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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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5
D.H. 로렌스 지음, 김정매 옮김 / 민음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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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긴 소설이 주는 충만감이랄 게 있다. 이야기가 길면 길수록 그 안에 담긴 등장인물과 사건사고와 생각할 거리의 수가 늘어날 테고 시공간적으로 폭넓은 배경을 종횡무진하는 체험이 가능해지는 덕분이다. 무엇보다도 두꺼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오는 보람도 무시할 수 없겠다. 로렌스의 『무지개』는 도합 900페이지 분량의 두툼한 2권짜리 소설이다. 소설은 브랑원 가의 톰과 이방인 렌스키의 만남으로 시작해서 그들의 딸, 손녀로까지 발을 넓힌다. 그리하여 방대한 분량의 소설은 또 방대한 가문의 서사로 뻗친다. 이런 이야기를 읽고도 보람을 느끼지 않기란 쉽지 않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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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랑윈 가문은 본래 농장의 대지주다. 그들보다 훨씬 앞선 세대부터 농사일을 시작했기에 브랑원 가는 넓은 밭과 하늘, 그리고 교회 첨탑이 우뚝 솟은 시골 풍경에 아주 익숙하게 자랐다. 그런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노동, 활기, 번창, 상속이었다. 남자들은 몸통을 낮추고 땅이나 말의 등판에 딱 붙여 일했다. 여자들은 몸통을 들춰서 시골 바깥의 상류사회를 바라보고 동경했다. 때마침 영국 사회는 한창 산업화의 바람이 불어 교육, 공장, 도시, 새로운 직업과 자아실현 문제가 새로 꿈틀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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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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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브랑윈 식구들은 농사일에 전념했다. 오래된 습관이 바로 깨지는 법은 없고, 변화는 서서히 찾아들기 마련이다. 이때 어릴 적부터 시와 자연을 사랑했던 브랑윈의 막내아들 톰은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여인은 폴란드 출신으로, 남편과 사별한 뒤 어린 딸을 데리고 이곳 시골에 찾아왔다고 한다. 톰은 갈수록 그녀를 향한 마음이 커져간다고 느꼈다. 두 사람은 결혼했다.

하지만 이들 부부 사이가 원활하지는 못했다. 톰의 아내가 된 리디아 렌스키에게는 과거가 있었다. 그녀의 전남편은 폴란드의 독립운동가였는데, 애국주의라는 강력한 신념 하에 항상 무언가를 하느라 바빴다. 그녀에게 전남편은 사실 없는 사람과 같았다. 전남편은 항상 정의를 운운하며 사회로 나가 싸웠지만 가정 일은 매번 뒷전에 뒀으니 말이다. 그래도 렌스키 남편의 비위에 맞춰 알아서 행동해야만 했다. 남편이 곧 정의였으므로. 그 일이 결국 남편을 죽음으로 내몰았더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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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렌스키가 조용하고 수동적인 여인이라고 해서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가뜩이나 폴란드에서 꽤 지체 높은 집안 출신이었던 그녀로서는 브랑윈 가문을 높게 칠 수 없었을 테다. 반면 톰은 그녀가 여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딴에는 아내란 남편에게 말도 건넬 줄 알고 살갑게 대해줘야 한다고 여긴 것 같다. 그 둘은 서로를 사랑하긴 하는데 어느 하나 내색하고 표현하는 일에 서툴렀다. 그래서 조심스럽고, 지레짐작하며, 상대방을 두려워하고, 속으로 울분을 터뜨렸다. 그들은 싸우고 사랑하기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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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스키와 브랑원의 첨예한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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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들을 지켜본 어린 딸 애나는 다른 길을 걷는다. 애나는 어머니를 닮아 고고한 혈통을 알게 모르게 중시했고 새아버지를 닮아 풍요로운 재산을 누릴 줄 알았다. 이 같은 성장 배경으로 그녀는 완만하고 밝은 성격을 갖추되 종종 남에게 불만을 품으면 모멸차게 공격할 줄도 알았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신앙을 배울 때도 그녀의 마음에 피어난 생각은 다소 반항적이다. 그녀 딴에는 신앙심이란 마음속에 있는 동안은 격렬하게 감동적이지만 목사의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순간 천박해진다고 봤다.

이 같은 생각은 나중에 남편 될 사람, 윌리엄을 만나면서 더 날 서게 된다. 두 사람은 사촌 관계로 교회에서 처음 만나게 됐다. 당시 애나는 윌을 어딘가 서툴고 모자란 녀석이라 보고 무시할 생각이었지만 찬송가를 우렁차게 부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역시 그는 어딘가 모자라고 우스꽝스러웠던 것이다! 그 일로 애나는 윌을 자꾸 떠올렸고, 그와 친해졌으며, 마침내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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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첫 만남에 주목하자면, 윌리엄과 애나의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찬송가를 부를 때 그는 한껏 진지했을 것이다. 그런 진지한 태도, 어찌 보면 지나치게 과장된 경건함이 애나를 웃기게 하지 않았을까? 애나는 종교의 의미를 고찰하지도 않고 무작정 믿는 사람들을 깔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바로 그 중 하나였고. 결혼 후 윌리엄이 한창 아담과 하와 조각상을 만드는 일에만 열중하자 애나는 성경 속 내용을 두고 그와 언쟁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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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목각을 계속하지 않아요? 아담과 하와 상을 왜 끝내지 않아요?"

이렇게 묻긴 했어도 아내는 아담과 하와 상에 관심이 없었고, 남편은 그 조각에도 또다시 손을 대지 않았다. 아내는 하와의 모습을 보고는 "꼭 작은 꼭두각시 같네요."라고 빈정댔다.

"왜 저렇게 몸집이 작지요? 아담은 하느님만큼이나 몸집이 큰데 하와는 꼭 인형같이 만들었군요.

아내는 계속해서 말했다.

"여자가 남자 몸에서 생겨났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모든 남자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는데. 남자들이란 얼마나 무례하고 건방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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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무지개 1』,

민음사, p.318-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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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가 종교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애나는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얘기를 믿을 수 없었고 상처 난 예수의 몸을 전시하는 피에타에 동조할 수 없었다. 그것의 의미를 물어봐도 누군가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바로 옆의 남편 윌리엄 또한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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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야."

남편은 격렬한 어투로 냉혹하게 맞섰다.

"당신은 알고 있는 것만 조롱하고 모르는 것은 못하지."

"제가 무얼 몰라요?"

"사물의 의미지."

"그럼, 그 의미가 뭐예요?"

그는 대답하기를 꺼렸다. 대답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도대체 그 뜻이 뭐란 말이에요?"

아내가 다그쳤다.

"부활의 승리지."

아내는 주저하며 낭패감을 느꼈다. 공포가 엄습했다. 도대체 이런 것들이 다 무언가? 어떤 강력하고 어두운 존재가 그녀 앞에서 뻗어나가는 것 같았다. 결국 그건 놀라운 것인가?

그렇지만 그건 아니야, 그녀는 이를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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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무지개 1』,

민음사,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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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포도주로 변했든 안 변했든 그건 나에게 별 상관없어. 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니까."

그가 말했다.

"그래, 있는 그대로가 뭐지요?"

아내는 기대에 차서 다그쳐 물었다.

"그건 성경 말씀 그대로지."

그런 식의 대답에 아내는 격분해서 남편을 멸시했다. 성경에 대해서는 나서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로 하여금 그를 멸시하게끔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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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무지개 1』,

민음사,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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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존중하면서 그것을 무작정 수용하려 들지 않는 애나는 상당히 현대적인 인물이다. 이 말은 그녀가 세상의 이치,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살피고 탐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애나의 자아실현 욕구는 아쉽지만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녀가 출산을 하면서 어머니로서 역할에 보다 충실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남편에게 종속되려 하지 않은 애나였지만, 그녀 생활에서 어린 자식의 비중이 그녀 자신보다 훨씬 커져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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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구체적 내용을 담은 책의 차례들. 위에서 인용한 구절들은 제6장 '승리자 애나'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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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다음 세대인 어슐라가 곱게 받아들일 리 없다. 어슐라는 애나와 윌리엄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딸이다. 그녀를 낳을 적에 부부는 당연히 기뻐하고 감사했으나 둘째와 셋째가 연달아 태어나면서 아무래도 어슐라를 소홀히 대하게 됐는데, 그 때문인지 천성적으로 모계로부터 이어받은 자아실현 욕구 때문인지, 그녀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관심을 쏟았다. 어떻게 하면 진정 어슐라로 살아갈 수 있는지, 세상은 무엇으로 이뤄지고 돌아가는지 등을.

어슐라도 어머니 애나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의미를 먼저 고찰했다. 그녀는 성경에 쓰인 모든 이야기가 우리 삶에 모두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나중 가서 사제 관계로 만난 잉거 선생님과 나눈 대화를 통해 더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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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라는 자기가 알고 있던 모든 종교가 결국은 인간의 열망에다가 특별한 옷을 입힌 것이란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열망은 진실한 것이었다. 그런데 입힌 옷은 거의 국가적인 취향이나 필요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발가벗은 아폴론 신을 섬겼고 기독교인들은 흰옷 입은 그리스도를, 불교도들은 싯다르타 왕자를, 이집트 사람들은 오시리스 신을 섬겼다. 갖가지 종교는 지역적인 것이나 종교 자체는 보편적인 것이었다. 기독교는 지엽적인 분파였다. 아직은 지엽적인 여러 종교들이 하나의 종교로 동화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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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무지개 1』,

민음사,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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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이고 자주적인 스승에게 한껏 경도된 어슐라는 몰래 잉거를 흠모했다. 단순히 그녀를 선생님으로서 동경하는 게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서 말이다. 실제로 이들 사이에 로맨틱한 기류가 흐르는 순간도 찾아오지만 그것도 잠시뿐, 어슐라는 그 뒤로도 수많은 사람과 만나 어울리게 됐다. 장차 사람과 사랑을 알아가며 어슐라는 자기도 남성의 세계, 소위 말해 직업 여성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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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라의 동성애 성향이 드러나는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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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이 이전 세대의 여성들과 달리 어슐라가 한 발짝 앞선 특징이기도 하다. 1대 렌스키와 2대 애나는 자아에 대한 고민을 끌어당기긴 하나 어디까지나 가정에서의 역할로 한정됐다. 아무래도 시골에서 자급자족하며, 굳이 직업을 갖지 않고도 생계가 어렵지 않던 시절이라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어슐라도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브랑윈 가에 머물며 편히 살 수 있음에도 어슐라는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스스로 경제력을 갖춰야지 독립적인 주체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4.

그러나 직업의 세계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다. 어슐라가 남성의 세계라 일컬은 직장은 예상대로 남성의 논리로 돌아갔기에 그녀로서는 오히려 제 자아를 직업의 틀 속에 욱여넣어야 했다. 어슐라가 첫 직장으로 삼은 초등학교에서 얼마나 부푼 꿈을 꿨던가. 그러나 교사 노릇이란 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을 깡그리 무시했고, 교장은 실적 없는 교사들을 내쫓는 궁리나 했으며, 동료 교사들은 매사에 부정적이었다. 그녀도 가르침을 받는 학생보다 그 학생이 제출한 숙제에 더 눈길을 돌렸다. 자아실현을 꿈꾸며 시작한 일이 그녀를 점차 잠식해 가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여러 동료 교사들은 그런 현실을 하등 문제 삼지 않았다. 대체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교육 체제와 관료제를 받아들이는 식이었다. 어슐라도 차마 이 현실을 고치려 들지 못하지만, 무언가 잘못됐음을 분명히 인식했다. 이는 어슐라와 다른 동료의 차이점이자 여성과 남성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직업의 세계는 남성의 무대, 즉 이미 남자들에게 익숙한 세계였다. 그래서 기존의 불합리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일에 남자들은 길들여져 있었다. 처음 직장에 발을 디딘 어슐라에게 보이는 것들이 외려 그들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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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제를 그대로 따르는 교사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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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소설의 도입부는 남녀의 관점 차이를 더없이 적절하게 요약한 역할을 한 것 같다. 내가 처음 『무지개』의 첫 장을 펼친 당시만 해도 저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가늠되지 않았다. 남자들은 소의 젖을 짜고, 말을 타고, 자연과 하나 됨을 느끼는 데 반해 여자들은 고개를 돌려 먼 세상을 바라봤다는 것이. 로렌스는 어쩌면 사회 진출을 막 시작한 여성들만이 바라볼 수 있는, 관성적이고 딱딱한 남성 세계를 묘사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하는 일에 익숙해져 땅바닥에 고개를 박은 남성들과 달리 허리를 바로 세워 현실을 볼 줄 아는 여성상을 제시하려 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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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무튼 이 야심차고 장대한 서사는 내가 쓴 글처럼 두부 자르듯 선명히 나뉘지 않는다. 어슐라 또한 여러 면에서 자기모순적인 인물이고 좌절과 실패를 반복하며 무너질 때도 있다.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휩쓸리지 않을 것처럼 말하면서 사실 꽤 많은 영향을 받고, 자신의 실수에 관대하게 굴곤 한다. 하지만 그녀는 성장한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침울해지는 대신 밝은 면을 바라보며 더 나은 장래를 꿈꿀 준비를 한다. 그녀가 어머니와 할머니보다 더 현대적인 인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 있다. 앞날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찬 긍정. 그런 그녀에게 하늘은 무지개를 띄어준다.

무지개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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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너뿐 아니라 너와 함께 지내며 숨 쉬는 모든 짐승과 나 사이에 대대로 세우는 계약의 표는 이것이다.

내가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둘 터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워진 계약의 표가 될 것이다.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 구름 사이에 무지개가 나타나면, 나는 너뿐 아니라 숨쉬는 모든 짐승과 나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동물을 쓸어버리지 못하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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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 창세기 9장 12~15절

(『무지개 2』, p.127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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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비판적 입장을 취한 듯한 이 작품은 또 한편으로 더없이 종교적이다. 그래서인지 어슐라를 비롯한 브랑원 가의 서사는 쾌활하고 복작하면서도 경건한 느낌마저 든다.




#소설 #데이비드허버트로렌스 #DH로렌스 #무지개

#김정매_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민음사세계문학전집 #영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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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의 일
김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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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의 일? 제목을 보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숫자 9를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도 생각해야 했다. 구라고 읽을 수도 아홉이라 읽을 수도 있겠는데 둘의 뉘앙스는 또 다르지 않는가. 구 번이라 하면은 보통명사로 특정한 무엇을 지칭하는 듯하다. 아홉 번이라 하면은 횟수가 먼저 연상된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 숫자의 의미를 따지기 전에 이것은 일에 관한 소설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사실을 여실히 체감할 수 있는데 내용이 온통, 지독하게 일 얘기뿐이다. 주인공은 일만 하나? 그래 보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 또한 한몫한다. 생활비가 빠듯해서 마트에서 2교대로 근무하는 아내. 대학 진학을 목표로 독서실을 나다니는 아들. 하지만 저성과자로 찍혀 회사로부터 은근히 퇴직을 강요받는 주인공.

양가 부모님께서 모두 아프시고, 설상가상으로 아내마저 몸이 성치 않다. 다시 말해 이런 상황에서 보통 일은 부수적인 기능, 요컨대 자아실현이라든지 직무 능률 향상 따위를 다 제쳐두고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면 족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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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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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을 요구하는 회사 측에서 주인공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일감을 줄 테니 시키는 일을 하라고. 그는 그렇게 회사에서 한참 떨어진 어느 농가의 판매 부서로 발령받게 된다. 그곳이 차로 한 시간 거리든 두 시간 거리든 그로서 상관없었다. 그나저나 영업일은 본래 그의 담당이 아니었다. 그는 엔지니어였다. 26년 동안이나, 이곳 통신회사에서. 사실 그가 이 불합리한 조건을 받아들였을 적부터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해야 했다. 하지만 일찍 직감했더라도 뭔가 달라졌을까. 그는 실제로 영업을 시작하는 첫날부터 그 낌새를 눈치챘지만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건 단지 돈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자부심이 있었다. 어쩌면 지독한 옹고집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는 노동의 가치, 땀으로 번 돈, 직무를 통한 성취감을 믿었다. 오랫동안 몸담은 회사를 믿었고, 그토록 회사가 매몰차게 자기를 내칠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새 업무를 받을 때에도 그가 희망을 잃지 않은 이유가 거기 있다. 사실상 그에게 부여된 영업 일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비닐하우스만 즐비하고, 인터넷에 관심 없는 어르신들을 상대로 통신 기기를 팔라니. 그래도 그가 최선을 다 한 이유는, 그 일 또한 회사에서 다 이유가 있으니까 시킨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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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과 첫문장. 돌이켜 보면 참 씁쓸한 문장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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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이 그와 주변 동료들의 가장 큰 차이었다. 발령 받은 뒤 서로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그 말고 다른 동료들은 통성명하기를 거부했다. 어차피 다들 한철 벌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신세라고 한탄하면서. 그가 보기에 동료들은 매사 부정적이고 무엇이든 제대로 할 의욕조차 비추질 않았다. 그들이 왜 저성과자로 찍혔는지 내심 알 것도 같았다 - 하지만 그 또한 그들과 같은 처지로 이곳에 온 게 아닌가? 그렇게 그는 주변 동료들과 서서히 멀어졌다.

회사는 그의 기대를 꺾었다. 분명 일을 시킨 것은 회사다. 그래서 그는 일을 하려고 했다. 비닐하우스에 무선 인터넷을 설치하기로 한 계약을 따냈다. 하지만 회사 측에서 그의 계약을 검토하더니 설치 불가 통보를 때렸다. 그곳이 무허가 건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땅주인과 연락을 해가며 어찌저찌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회사 측에서는 같은 입장을 고수했다. 그가 비닐하우스 건을 해내지 못하면 지금보다 더 먼 곳으로 전출당할 예정이다. 이런 부당한 사실을 그는 영업 팀장에게 고하지만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끄럽게, 물 흐르듯 상황은 잘도 처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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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비닐하우스 주변을 돌며 꼼꼼하게 사진을 찍었다. 그런 다음 차를 몰고 곧장 대리점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팀장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산간 오지나 열 가구 남짓한 작은 섬에까지 케이블을 연결하면서 그곳은 왜 안 되느냐고 질문했고, 불가피할 땐 전신주를 빌려 쓸 수도 있는데 그런 가능성은 왜 고려하지 않느냐고 항의했다.

팀장은 마우스를 딸깍이며 느릿느릿 대꾸했다.

모르지요. 제가 뭘 압니까. 위에서 그러라고 하니 그럴 수밖에요.

그런 다음 뭔가 재미있는 걸 발견했는지 모니터를 바라보며 낄낄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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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9번의 일』,

한겨레출판,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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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새로운 근무지로 전전하던 그는 결국 어딘가로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숫자, 그러니까 9번으로 불리며 일하게 된다. 다시 말해 내가 제목에서 품었던 의문은 보통명사 '구 번'을 뜻하는 거였다. 이제 이름마저 소속으로 대체된 그는 점차 회사와 동질화된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대신 회사 입장에서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 행동하지 않는 대신 회사 입장에서 행동한다. 살아 보자고 시작한 일이 점차 자기 자신을 대체한다. 처음 일을 통한 희열과 자부심을 느꼈던 그는 아예 딴 사람으로 변한다 - "일이라는 건 결국엔 사람을 이렇게 만듭니다. 좋은 거, 나쁜 거. 그런 게 정말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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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한하지. 일이라는 게. 한번 손에 익고 나면 바꾸기가 쉽지가 않아. 어디, 일이라는 게, 일만 하는 법인가. 사람도 만나고 세상도 배우고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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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9번의 일』,

한계레출판,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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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일하는가? 누군가는 살기 위해 일한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일이 살기 위한 수단만으로 그치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일이 그토록 우리 몸과 마음을 상하게 놔둬서는 안 될 테니까. 우리는 힘들어 죽을 것 같을 때도 살기 위해 일한다고 한다. 일에는 그런 면이 분명 존재하고, 저자 김혜진 씨도 이 점을 지적한다. 늘 하고 익숙한 것. 잘 하게 되는 것. 때론 습관처럼 떼어내기 힘들어 그냥 규칙적으로 찾게 되는 것.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것. 곧 나의 성질이 되는 것.

이 말고도 『9번의 일』에서는 노동과 이를 둘러 싼 여러 문제들을 다루지만 나는 딱 두 가지에 집중해서 읽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왜 일하며, 그 일은 무슨 의미인가. 사실 이 중 한 가지 주제만 잘 담어내도, 그래서 독자들에게 의미를 되새겨 보도록 돋울 수 있다면 충분히 좋은 소설이라 볼 수 있다. 얇은 책이지만 쉬이 읽기에는 찝찝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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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혜진 #9번의일

#한겨레출판사 #한국문학 #장편소설


: 이 사실은 소설 첫 문장에서 바로 밝혀진다. 자세히 보면 소설의 매 챕터가 시작될 때마다 그의 소속이 밝혀지곤 한다.

: 본책,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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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55
파트리크 라페르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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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큰 화두를 던진 게 아닌가 싶다. 제목에서 시사하듯, 그래, 우리의 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 그런데 이 짤막한 인생의 이치를 나란히 두고 보자니 팔짱을 낀 자세로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오히려 나는 상투적이기 짝이 없는 이 문구에 호감을 느껴서(이건 내 병이다) 이 책을 읽게 됐다. 예상한 대로 내용은 빤했다. 내가 아는 한 프랑스 소설은 - 편견이라 해도 좋겠다 - 불륜 소설이 많았는데 이 책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 저 사람을 사랑하고 쟁취하고 싶다는 열망. 내 곁에 애인이 있음에도 다른 사람에게 눈길이 끌리는 현상. 과거에도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또 유효할 문제 아닌가. 그런 것이 욕망이라면, 욕망이란 무엇인가?​

그걸 알고 싶어서 이 책을 읽게 됐다. 그러니까 이번이 네 번째인가. 이 책을 다시 펼쳐든 횟수 말이다. 이런 빤하디 빤한 이야기를 네 차례씩이나 읽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용은 빤할지라도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빤하지 않고 미묘해서. 예전에는 그 느낌이 어떤 충만한 만족감을 준다고 스스로 여겼지만 그게 무어냐 물어보면 잘 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좋아하는 음악을 남들에게 추천할 때 최선의 방법이 그냥 들어보라 하는 것처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 이번에 나는 그 어려움을 파헤치고자 이 책을 다시 펼쳐들었다.

그 결과 썩 시원치 않은 결론이 나올까 봐 걱정됐지만 그래도 뭔 말이라도 지껄일 순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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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벨 소리가 울리는 휴대폰을 확인한다. 화면에 찍힌 이름은 노라. 노라는 자신이 파리에 찾아온 경위를 짤막하게 밝히고는 남자가 몇 마디 꺼내보기도 전에 통화를 끊는다. 남자는 허탈해 한다. 그는 이 전화를 이 년 동안 기다려 왔다.

또 다른 남자는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 짐을 푼다. 불현듯 나쁜 직감에 휩쓸린다. 아니나 다를까, 그와 동거하고 있던 여인이 급히 짐을 싸서 떠난 흔적만이 역력하다. 이 일이 한두 번도 아니긴 하나, 남자의 허망한 심정은 조금도 무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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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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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소개한 남자는 블레리오, 그다음으로 소개한 남자가 머피다. 두 남자는 사는 곳도 다르고 각기 다른 성향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볼품없는 남자이기도 하다.

블레리오는 부모님께서 큰 뜻을 이루라는 의미로 프랑스의 전설적인 비행사 루이 블레리오와 똑같은 이름을 지어주셨(더랬)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는 의약품이나 전자 기기 따위에 붙은 설명서, 과학 기사에 쓰인 자잘한 영 문장을 프랑스어로 옮기는 번역가다. 그의 아내 사빈은 예술 분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말하자면 인텔리다. 모든 면에서 그녀가 블레리오를 앞섰다. 그녀는 그보다 나이도 많았고, 이혼 전적도 있었고, 지적인 데다 성적 매력도 있(었?)고, 사교적인 성격 덕에 사람들과 두루 친했다. 언제나 아내를 볼 때마다 그는 알게 모르게 부채감을 느꼈다. 그 부채감은, 정신적인 면에서도 그렇지만 금전적인 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머피는? 미국인 머피는 하버드 출신의 인텔리이자 런던의 증권중개인으로 일하는, 다소 고지식한 남자다. 사교적인 편도 못 돼서 직장 동료들과 원활히 지내지도 않고 금융인답게(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만) 낭만보다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갖췄다. 따라서 노라가 간혹 그를 떠났다가 돌아오는 이유는 현실적인 문제, 다름 아닌 돈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금전적으로 그녀를 돕는다. 하지만 자꾸만 그녀는 떠나는데. 정말 머피는 돈이 궁해서 그녀가 이곳저곳 손 벌려야 했다고 생각한 걸까? 마찬가지로 그의 이름에서도 얄팍한 운명의 장난기가 느껴진다. <머피의 법칙>: 일이 좀처럼 풀리지 않고 갈수록 꼬이기만 하는 경우에 쓰이는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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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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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소설 속 인물을 무어라 상징하는 짓을 내가 제일 싫어하긴 하지만,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구도다. 블레리오는 욕망의 주체고 머피는 책임의 주체다. 가정에서 누가 봐도 가장 자격을 상실한 블레리오는 아내를 어려워하고, 그렇다고 아내에게서 벗어날 자신도 없다. 암울한 부부 관계는 온통 그의 책임 같아서 괴롭다(하지만 해결은 어떻게?). 그런데 한때 그와 정반대로 건장했던 아버지조차 다 늙어서 어머니한테 맞고 사는 처지 아닌가. 그에게 필요한 것은 긴 하루를 잊게 해주는 찰나의 쾌락이다. 그 쾌락은 아내가 아닌 노라가 충족해 준다.

하지만 욕망을 절제하는 삶 또한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머피는 블레리오와 정확히 대척점에 선 이다. 여전히 블레리오가 부모님과 배우자(이 경우에는 거의 이들을 묶어 '보호자'라고 해야 낫겠다)에게 손 벌리는 것과 다르게 머피는 꽤 많은 재산을 축적했고 근면 성실한 일상을 유지하고자 힘쓴다. 그라고 욕망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노라가 떠났다고 해서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까지 훌쩍 떠날 만큼 낭만적이지는 못하다. 그게 낭만이라 한다면 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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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 사이에서 노라는 자유롭게 사랑을 갈구한다. 노라는 그렇다면 자유의 상징이다. 그녀는 제 마음이 가는 대로 블레리오를, 머피를 - 그리고 소설에서 잠깐 등장하거나 그러지도 못하는 숱한 남자들을 - 선택하고 취한다. 어쩌면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블레리오와 머피가 그녀, 노라라는 한 사람에게 단단히 매인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그들에게는 노라와 같은 자유가 없었으니까. 아내에게, 깨뜨릴 수 없는 일상에, 탈출구 없는 제 자신의 욕망에, 안정적인 삶의 추구에 얽매어 있었으니까. 연극에 비유하자면, 되고 싶은 배역을 받지 못할 때 블레리오는 질투하고, 머피는 다른 대역에 안주하고, 노라는 어떻게든 그 배역을 따낸다. 그러니 두 사람 다 노라를 멍청히 바라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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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등장인물 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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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노라는 그 누구에게도 정착하지 못했을까? 소설 속에서 머피 곁으로 돌아간 노라는 그와 대화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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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 왜 떠났던 거야? 그녀가 식사를 마쳤을 때, 그는 나지막이 묻지 않을 수 없다.

돌아와 자기를 다시 만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나는 그런 여자야. 나는 내가 자유롭다는 걸 느껴야만 하지. 그를 빨아들이기라도 할 듯 갈색 눈을 아주 크게 뜨면서 그녀가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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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라페르, 『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

민음사,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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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노라답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 대답은 그저 형식적인 말뿐일지도 모른다. 노라에게 머피는 블레리오만큼 열정적인 사랑을 주지 못한다. 동시에 블레리오는 머피만큼 안정적인 헌신을 보이지 못한다. 노라가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아무하고나 사랑했다고? 천만에. 사실 두 남자 모두 노라에게 어느 하나 확신할 만한 답을 해주지 못했다. 노라가 정식적인 교재를 제안했을 때 블레리오는 아내 핑계를 대며 둘러댔고 머피는 평소 그녀의 행실을 떠올리며 못 들은 척했다 - 내가 앞서 두 남자 모두 볼품없는 남자라고 폄하한 이유가 이것이다.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갈팡질팡한다. 자유로웠던 노라는 사실 어디 하나 기댈 곳 없는 외로운 사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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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실컷 떠들었지만 나는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를 여전히 설명하지 못했다(적어도 이 같은 줄거리가 좋아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심지어 글쓰기에 돌입할 당시 목표했던 욕망의 의미조차 못 밝힌 것 아닌가. 원체 개인적인 선호는 그런 건가 보다. 설명해보라 하면 그냥 느껴보라 답하고 싶은. 그래도 설명하려 하고 싶은 욕망은 끝이 없다. 이 책은 플롯으로 보면 누구나 알 만한 얘기지만, 이를 문장으로 구체화하는 작가의 시선과 통찰력은 놀랍다. 아니, 놀랍지 않을지도 몰라도 그런 시도들이 내 취향에 부합한다. 허투루 읽히는 문장이 없고, 장면 장면이 생생하다. 이것도 사실 내 눈에만 그래 보일지도 모른다.

대신 이렇게 말해 보자. 모든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단 한 문장이 내게로 꽂혔다고. 나는 욕망을 설명하는, 이보다 정확한 문장은 별로 만나지 못했다. 하나는 시어도어 드라이저 소설에서 봤고 다른 하나는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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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주 강렬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게다가 놀라운 건 그게 그토록 강렬하다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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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라페르, 『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

민음사,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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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좋아하는 이유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내가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이게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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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파트리크라페르

#인생은짧고욕망은끝이없다 #이현희_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모던클래식 #민음사모던클래식 #페미나상 #프랑스문학 #장편소설


: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여명』,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외 다수. 이에 관해 프랑스 문학의 시초가 배우자 몰래 불륜을 저지른 사실을 고해성사한 고백록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듣긴 했으나 정확한 출처가 기억나질 않는다. 믿거나 말거나.

: 소설가 정지돈 씨는 한 에세이(『영화와 시』)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걸 남들에게 설명하려 들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뿐더러 그 과정에서 외려 좋았단 것조차 싫어지게 되므로 짜증이 난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 실존 인물이다. "프랑스의 항공기술자. 1970년 처음으로 단엽기를 제작하였고, 1909년 11호기(25마력)을 조종하여 37분의 비행 끝에 최초의 영국 해협 횡단이 성공하였다"(두산백과 인용)

: 두산백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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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토끼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7
존 업다이크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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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토끼』를 읽었다. 나는 이 책을 무책임한 성인 남자의 뒤늦은 방황기라고 요약했다. 그리고 이런 문장만으로 주인공 레빗의 성격과 행적을 묘사하려는 나도 참 요령부득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글을 쓸 때도 사소한 감상이나 줄거리, 더 나아가 작품 전체를 한 단위로 종합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 마찬가지로 레빗이라는 이 친구를 보면서 떠올린 인상들을 나는 글로 풀어쓰고자 시도했지만 참 쉽지 않다고 느꼈다. 애초에 그는 이해하기는커녕 호의적으로 보기 힘든 면모가 있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한때 잘나가는 농구 선수 출신에 임신 중인 아내를 둔, 그러니까 이제 곧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될 해리 레빗 앵스트롬¹. 어느 날 그는 어머니께 아들 넬슨을 맡겼다는 아내의 말에 부모님 댁으로 간다. 그리고 불현듯 자신이 덫에 걸렸다고 느낀다. 그는 차를 끌고 고속도로를 횡단한다. 어디로 갈지 본인도 모르는 채로 - 그렇게 정처 없이 미국 대륙을 횡단하다가 레빗은 옛 농구 감독인 마티 토세로를 만난다. 그들은 여자 둘을 만나고 거기서 레빗은 루스라는 여자와 사귀면서 동거 생활을 시작한다.

존 업다이크는 소위 말하는 '레빗 시리즈'를 10년 주기로 발표했다². 레빗은 말하자면 업다이크의 생애를 - 그게 한 사람으로서의 생애든 전업작가로서의 생애든 - 함께 한 페르소나라고 볼 수 있다. 레빗이 업다이크, 업다이크가 레빗이라고 표하기란 아무래도 비약이 심할 테지만 미국 전체를 조망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레빗에게 투영된 사실은 부인할 수 없겠다. 그래서 레빗의 눈에 비친 미국은 업다이크가 생각한 미국 그 자체였을 것이다 - 존 업다이크는 말한다. "래빗의 눈으로 본 것이 내 눈으로 본 것보다 이야기할 가치가 더 크지만, 사실 둘 사이의 차이는 미미하다.(본책, p.444 작품 해설 참고)" 내가 생각한 미국의 이미지가 있고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미국의 이미지가 있고 그 둘은 당연히 다를 것이다. 물론 내가 한국인을 대표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인이 생각하는 미국의 이미지 또한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한 미국은 『위대한 개츠비』였다. 샴페인과 축제 분위기 속에서 흐트러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홀로 와인 한잔 기울이는 이. 내가 생각한 개츠비와 미국은 그런 이미지였다.

물론 『위대한 개츠비』가 그런 내용도 아닐뿐더러 미국의 이미지와 동떨어졌음을 안다. 이건 내가 순전히 미국을 떠올리면서 연상하는 이미지이자 환상이 그렇다는 소리다. 업다이크가 바라본 미국은 어디에도 존재하는 미국이다. 그것은 당장 우리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만큼 흔한 사람과 장면 속에 담겨 있다.³ 사람들은 일상 속에 걸어들어가 알아서 괴로워한다. 이유 모를 괴로움에 잠식당하고 불안감에 짜증을 부린다. 마찬가지로 처음 레빗의 일탈 행위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아내 재니스가 아이에게 무심하고 남편이 오기 전에 현관문을 걸어 잠가두며 임신 중에도 술과 담배에 찌든 모습에서 뭔가 그의 가정이 삐거덕거리고 있음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불쾌함이 레빗을 나가게 한 걸까. 말 그대로 덫에 걸린 느낌이 그를 도망가게 한 걸까.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레빗을 옹호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가깝게 다가올 등장인물은 목사 잭 에클스다. 그는 작중에서 레빗을 다시 가족 품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하는 역할을 맡는다. 레빗이 잠깐 차를 두고 옷가지를 챙기려 집에 들른 틈을 타 에클스는 그에게 도망간 이유를 묻고 함께 골프 약속도 잡는다. 그와 가까워질수록 에클스가 레빗의 마음을 다잡고 한 가정에 평화를 깃들게 해야 하는데. 그런데 나중 가서 에클스도 레빗을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 "해리는 분명히 돌아올 겁니다(본책, p.222)" 레빗의 장모를 만난 에클스는 말하지만 그 말을 본인도 확신할 수 없다. 아무래도 그의 도망에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복잡한 문제들이 꼬여 있다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리의 문제가 감정의 부족이라기보다는 통제되지 않는 감정 과잉이기 때문에 섣불리 재결합을 하도록 밀어붙이면 안 돼요(본책, p.244 변형해서 인용)"

그렇다면 이 소설은 아주 웃기는 소설이다. 설명할 수 없는 걸 작가가 던져 놓고 독자들은 그걸 가지고 씨름하는 꼴이니 말이다. 차라리 레빗의 삶을 하나의 담론 거리로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레빗은 그 가출 행위를 제외하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인물이다. 그는 조잡하고 무책임하며 충동적이다. 어쩔 때는 오만하고 금방 풀이 죽으며, 지나치게 소심하고 응석받이다. 그의 다른 점은 가정을 벗어났을 뿐이고 사람들은 그를 가정을 파탄 낸 무뢰한이자 파렴치한이라 부른다. 우리가 레빗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이유가 거기 있다. 다 큰 평범한 성인이 가족을 내팽개치고 도망쳤으면 그것은 책임의 문제지 일탈의 문제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 같은 결론에도 여전히 찝찝한 앙금이 남는 건 왜일까. 그 해답은 어렵지 않다. 살면서 방황하지 않는 존재란 없으며 사실 인생에서 방황하기 좋은 시기란 따로 없다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래서 레빗을 옹호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다.

이 소설에서 레빗은 네 번 도망친다. 네 번의 도망은 곧 네 번의 덫이다. 그리고 그 덫은 갈수록 실체를 가지고 절망스럽게 그의 목을 옥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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