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의 일
김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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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의 일? 제목을 보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숫자 9를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도 생각해야 했다. 구라고 읽을 수도 아홉이라 읽을 수도 있겠는데 둘의 뉘앙스는 또 다르지 않는가. 구 번이라 하면은 보통명사로 특정한 무엇을 지칭하는 듯하다. 아홉 번이라 하면은 횟수가 먼저 연상된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 숫자의 의미를 따지기 전에 이것은 에 관한 소설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사실을 여실히 체감할 수 있는데 내용이 온통, 지독하게 일 얘기뿐이다. 주인공은 일만 하나? 그래 보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 또한 한몫한다. 생활비가 빠듯해서 마트에서 2교대로 근무하는 아내. 대학 진학을 목표로 독서실을 나다니는 아들. 하지만 저성과자로 찍혀 회사로부터 은근히 퇴직을 강요받는 주인공.

양가 부모님께서 모두 아프시고, 설상가상으로 아내마저 몸이 성치 않다. 다시 말해 이런 상황에서 보통 일은 부수적인 기능, 요컨대 자아실현이라든지 직무 능률 향상 따위를 다 제쳐두고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면 족하고 만다.


작가의 얼굴

퇴직을 요구하는 회사 측에서 주인공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일감을 줄 테니 시키는 일을 하라고. 그는 그렇게 회사에서 한참 떨어진 어느 농가의 판매 부서로 발령받게 된다. 그곳이 차로 한 시간 거리든 두 시간 거리든 그로서 상관없었다. 그나저나 영업일은 본래 그의 담당이 아니었다. 그는 엔지니어였다. 26년 동안이나, 이곳 통신회사에서. 사실 그가 이 불합리한 조건을 받아들였을 적부터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해야 했다. 하지만 일찍 직감했더라도 뭔가 달라졌을까. 그는 실제로 영업을 시작하는 첫날부터 그 낌새를 눈치챘지만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건 단지 돈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자부심이 있었다. 어쩌면 지독한 옹고집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는 노동의 가치, 땀으로 번 돈, 직무를 통한 성취감을 믿었다. 오랫동안 몸담은 회사를 믿었고, 그토록 회사가 매몰차게 자기를 내칠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새 업무를 받을 때에도 그가 희망을 잃지 않은 이유가 거기 있다. 사실상 그에게 부여된 영업 일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비닐하우스만 즐비하고, 인터넷에 관심 없는 어르신들을 상대로 통신 기기를 팔라니. 그래도 그가 최선을 다 한 이유는, 그 일 또한 회사에서 다 이유가 있으니까 시킨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문과 첫문장. 돌이켜 보면 참 씁쓸한 문장 같기도 하다

그런 면이 그와 주변 동료들의 가장 큰 차이었다. 발령 받은 뒤 서로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그 말고 다른 동료들은 통성명하기를 거부했다. 어차피 다들 한철 벌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신세라고 한탄하면서. 그가 보기에 동료들은 매사 부정적이고 무엇이든 제대로 할 의욕조차 비추질 않았다. 그들이 왜 저성과자로 찍혔는지 내심 알 것도 같았다 - 하지만 그 또한 그들과 같은 처지로 이곳에 온 게 아닌가? 그렇게 그는 주변 동료들과 서서히 멀어졌다.

회사는 그의 기대를 꺾었다. 분명 일을 시킨 것은 회사다. 그래서 그는 일을 하려고 했다. 비닐하우스에 무선 인터넷을 설치하기로 한 계약을 따냈다. 하지만 회사 측에서 그의 계약을 검토하더니 설치 불가 통보를 때렸다. 그곳이 무허가 건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땅주인과 연락을 해가며 어찌저찌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회사 측에서는 같은 입장을 고수했다. 그가 비닐하우스 건을 해내지 못하면 지금보다 더 먼 곳으로 전출당할 예정이다. 이런 부당한 사실을 그는 영업 팀장에게 고하지만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끄럽게, 물 흐르듯 상황은 잘도 처리된다.

그는 비닐하우스 주변을 돌며 꼼꼼하게 사진을 찍었다. 그런 다음 차를 몰고 곧장 대리점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팀장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산간 오지나 열 가구 남짓한 작은 섬에까지 케이블을 연결하면서 그곳은 왜 안 되느냐고 질문했고, 불가피할 땐 전신주를 빌려 쓸 수도 있는데 그런 가능성은 왜 고려하지 않느냐고 항의했다.

팀장은 마우스를 딸깍이며 느릿느릿 대꾸했다.

모르지요. 제가 뭘 압니까. 위에서 그러라고 하니 그럴 수밖에요.

그런 다음 뭔가 재미있는 걸 발견했는지 모니터를 바라보며 낄낄거렸다.

김혜진, 『9번의 일』,

한겨레출판, p.107

그렇게 새로운 근무지로 전전하던 그는 결국 어딘가로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숫자, 그러니까 9번으로 불리며 일하게 된다. 다시 말해 내가 제목에서 품었던 의문은 보통명사 '구 번'을 뜻하는 거였다. 이제 이름마저 소속으로 대체된 그는 점차 회사와 동질화된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대신 회사 입장에서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 행동하지 않는 대신 회사 입장에서 행동한다. 살아 보자고 시작한 일이 점차 자기 자신을 대체한다. 처음 일을 통한 희열과 자부심을 느꼈던 그는 아예 딴 사람으로 변한다 - "일이라는 건 결국엔 사람을 이렇게 만듭니다. 좋은 거, 나쁜 거. 그런 게 정말 있다고 생각해요?"

희한하지. 일이라는 게. 한번 손에 익고 나면 바꾸기가 쉽지가 않아. 어디, 일이라는 게, 일만 하는 법인가. 사람도 만나고 세상도 배우고 하는 거지.

김혜진, 『9번의 일』,

한계레출판, p.180

우리는 왜 일하는가? 누군가는 살기 위해 일한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일이 살기 위한 수단만으로 그치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일이 그토록 우리 몸과 마음을 상하게 놔둬서는 안 될 테니까. 우리는 힘들어 죽을 것 같을 때도 살기 위해 일한다고 한다. 일에는 그런 면이 분명 존재하고, 저자 김혜진 씨도 이 점을 지적한다. 늘 하고 익숙한 것. 잘 하게 되는 것. 때론 습관처럼 떼어내기 힘들어 그냥 규칙적으로 찾게 되는 것.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것. 곧 나의 성질이 되는 것.

이 말고도 『9번의 일』에서는 노동과 이를 둘러 싼 여러 문제들을 다루지만 나는 딱 두 가지에 집중해서 읽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왜 일하며, 그 일은 무슨 의미인가. 사실 이 중 한 가지 주제만 잘 담어내도, 그래서 독자들에게 의미를 되새겨 보도록 돋울 수 있다면 충분히 좋은 소설이라 볼 수 있다. 얇은 책이지만 쉬이 읽기에는 찝찝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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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실은 소설 첫 문장에서 바로 밝혀진다. 자세히 보면 소설의 매 챕터가 시작될 때마다 그의 소속이 밝혀지곤 한다.

: 본책,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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