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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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은 『마음』이다. 이런 말로 시작하는 게 별 뜻 없이 띄우는 모양새로 비칠지 모르지만, 저자의 명성을 함께 고려하면 그렇고 그런 말이 아니게 된다. 이 소설가로 말하자면 일본의 대문호이자 자국에서 최고로 사랑받는 문인이다. 비단 역사적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현대 일본에서도 수차례 읽히고 인정받는 작가라는 뜻이다. 걸출한 작가들이 여럿 있는 일본 문학계에서도 그의 위상이 드높다는 것은 어쨌거나 대단한 일이다. 근대 한국 소설에도 소세키의 영향이 닿았다고 평가받으니 말 다 했다.

무엇보다 그의 인기 비결은 쉽고 반듯한 문장과 더불어 그에 걸맞은 주제 의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소세키의 글은 읽기 쉽다. 고전 소설을 처음 읽는 분들께 추천하는 작품 목록에 이 책이 자주 소개될 정도로 말이다. 그의 글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사람들도 아마 문장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워서라기보다 일본 고유의 어휘 및 문화가 낯설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런 경우, 대게 쉽게 풀어쓴 번역서를 찾아 읽으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된다.

또 그런 문장으로 쓴 소설은 여러모로 정직하다. 사람으로서 도리가 무엇인지, 윤리를 져버린 인간은 어찌 되는지를 묻는 소설이 많다고 하니까(나도 소세키의 소설을 두 권밖에 못 읽어봐서 잘 모른다. 이런 내용들은 나도 다른 책이나 웹서핑을 통해 찾아본 것이다). 말하자면 잘 정돈된 문장으로 그릇됨 없이 윤리적으로 살려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쓴다. 문장과 이야기가 그렇게 서로 호응하여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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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은 『마음』

이렇게까지 말했지만, 생각보다 나는 소세키의 소설에 크게 감탄한 적이 없다. 그의 책을 이후로 한 권만 찾아 읽은 까닭도 그런 연유에서다. 소설 전면에 일본인으로서 의식을 대놓고 표명해서 그럴지도 모르고 유명 작가의 인기에 괜한 반발심이 생겨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 『마음』을 재독하면서 왜 내가 이 소설에 그리 썩 동감하고 싶지 않았는지 알 듯했다. 이 책은 회개와 참회를 주제로 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혼자 속앓이하는 소극적인 지식인의 자화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할 수 있다.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원년의 풋볼』과 나란히 놓고 생각해 보면 참말이다 - 그런 면에서 선생님이 나에게 항상 꺼내는 말, 자기는 그다지 훌륭한 사람이 못 된다는 말은 정말 진솔했다.

소설은 총 세 파트로 나뉜다. 하나는 선생님과 내가 만나게 된 사연과 교류, 둘은 내가 잠시 선생님 곁을 떠나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 마지막 셋은 내가 떠난 다음 선생님께서 부치신 편지글. 말할 것도 없이 마지막 선생님의 편지글이 『마음』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겠다(심지어 분량도 가장 길다). 그 중요한 세 번째 파트에서 그전까지 비친 선생님의 기이한 행적, 알 수 없는 말들의 근본적인 이유를 모조리 밝혀진다. 따라서 처음 책을 읽는 독자 입장에서 해당 파트에 가까워질수록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더욱 커지게 된다.

이 말은 돌려 말해 두 번째로 읽었을 때는 그만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다는 소리처럼 들린다. 마치 추리 소설의 범인을 안 채로 다시 읽을 때 재미가 반감되듯이. 그러나 내가 하고픈 말은 이런 게 아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선생님의 과거를 몰색하는 추리 소설도 아닐뿐더러, 재독할 시 그 카타르시스가 덜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처음 읽었을 때 보이지 않던 1부, 2부의 숨은 뜻이 표면으로 드러나면서 서사가 풍부해진 감도 없잖아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풍부해진 서사가 우리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제시되는지에 달렸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우리가 확 감명받아도 두 번 들었을 때 똑같이 그러란 법은 없지 않는가.

세 파트로 나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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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으로 들어가서, 선생님은 자기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겼다. 그가 사람을 경멸하고 피한 이유도 스스로가 경말당하고 피해야 할 인간의 전형이었기 때문이다. 사연인즉슨 어린 시절 선생님은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면서 삼촌께 의탁했다.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선생님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삼촌께서 자신의 장래를 책임질 줄로만 알았다 - 평소 삼촌을 훌륭한 사람이라 칭한 아버지의 말씀, 그리고 사업과 정계 일을 동시에 해내는 삼촌의 수완을 마냥 믿은 것이다. 나중에 선생님은 삼촌이 아버지의 유산으로 사업 자금을 충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의 배신감으로 선생님은 삼촌네 식구와 절연했다. 돈이 사람을 타락시킨다는 걸 여실히 깨달으면서. 그렇지만 출가를 할 때 삼촌에게 어느 정도 지원을 받아 - 아버지의 유산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 학생 신분으로 부족하지 않은 돈이 선생님 수중에 떨어졌다. 선생님은 다니는 대학과 가까우면서도 괜찮은 형편의 하숙집을 찾다가 어느 미망인 모녀가 사는 집에 정착했다. 선생님은 그 집안 식구들과 차츰 친해지며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특히 미망인의 딸에게.

미망인의 딸을 선생님이 남몰래 흠모했다는 걸 누구든 쉽게 눈치챌 수 있을 테다. 그렇지만 연애 쪽에 거의 무지했던, 지극히 소심했던 선생님이 상대방 여자의 마음을 알 리가 없다. 그 무렵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K가 장래 문제로 부모님과 다투면서 생활고를 겪게 됐다(부모님이 K에게 보냈던 금전적 지원을 끊은 것이다). 그보다 훨씬 여유로웠던 선생님은 K를 자기 하숙집에 끌어들이려 했다.

이 일을 K도 미망인도 한사코 거절했지만, 선생님 딴에는 궁핍한 친구를 돕는 일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믿으며 강제로 추진하려 했다.

소설은 짤막한 장(章)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말하자면 선생님은 K의 수호천사 역을 자초한 거다. 그에 더해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꺼림직한 반응을 보인 미망인을 두고 도덕적 잣대를 들먹이며 속으로 지탄했다 - 그 집 주인이 정작 하숙생 신세인 선생님이 아니라 미망인이었음에도.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은, 처음에 입을 꾹 닫고만 지냈던 K도 미망인 식구와 친해졌고 그들도 K를 어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생님은 아무하고도 친해지지 않으려 한 K의 폐쇄적인 성격이 그를 좀먹는다고 생각하곤 했다.

문제는 이제 선생님 쪽에서 발생했다. 어느 날 대학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미망인의 딸과 K가 한 방에서 나란히 떠드는 소리를 선생님이 들은 것이다. 선생님이 나타나자 여인은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고 K는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그때 선생님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K가 미망인의 딸을, 혹은 미망인의 딸이 K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게다가 K의 성격이 밝아진 이유가 자신 덕분이 아니라 미망인의 딸 덕분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선생님을 옭아맸다. 왜인지 모르지만, 선생님의 마음속에 K는 자기에게 기대고 의지해야 하는 존재로 남아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생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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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상 줄거리를 늘여 쓰면 이야기도 길어지고 정작 내가 하고픈 말도 못 할까 봐 이만 줄인다. 눈치 빠르신 분들은 여기까지만 듣고도 뒷내용이 어찌 될지 짐작할 수 있을 테다. 더군다나 1부의 선생님이 보인 행적까지 종합하면 그들의 삼각관계가 비극으로 치달았다는 것도.

나 또한 줄거리를 요약하면서 은근히 강조했는데, 선생님은 남에게 호의를 자처하면서 진짜 상대방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생각지 못한 치였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행동이 무조건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고 본 도덕적 강박도 있었다(이는 어린 시절 작은 아버지께 배신당한 트라우마로 생긴 의식일지도 모른다).

이런 도덕적 강박이 생각대로 먹히지 않자 되려 선생님은 K에게 반발심을 가지고 말았다. 분명한 악의를 갖고서 해코지할 속셈까지 없었지만, 마음속으로 언제든 K를 져버릴 준비가 돼 있던 셈이다. 그 결정타가 향후 있을 K의 고백 사건이다. K가 미망인의 딸을 좋아한다고 밝혔을 때, 물론 선생님은 그를 축해해줄 입장이 못 됐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정당당히 그의 연적을 자처했어야 했는데. 선생님은 몰래 미망인을 찾아가 딸을 사랑한다고 고백해버렸다. 여인을 K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온 행동이었지만, 그 일은 여러 모로 인간이 둘 수 있는 최악의 수였다.

내가 이번에 읽은 『마음』의 판본은 문학동네북클럽 한정 특별 보급판이다

그 사실을 알고도 K는 평소와 똑같이 선생님과 모녀를 대했다. 그 사실을 몰랐던 선생님은 죄책감, 부끄러움, 죄를 들킬지 모른다는 초조함과 불안에 시달렸다. 더 이상 선생님은 여인과 K를 따로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K가 죽어버리다니. 그의 죽음이 고백 사건 이후로 벌어진 이상, 선생님 딴에는 - 다른 걸 일단 제쳐두고서라도 - 자신의 도덕성에 커다란 결점이 생긴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선생님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토록 혐오했던 삼촌과 다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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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을 여러 이유에서 배반하는 일이 드물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 비슷한 일이 내게도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도 한 번쯤은 있었기에 『마음』이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가 된 걸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마음』 속 선생님의 죄책감에 자유롭지 못함을 느낀다. 그런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선생님의 반성에 전적으로 동의하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라 하겠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연유는 편지글 속 의문스러운 두 줄의 문장 때문이었다.

내 가슴은 그 슬픔으로 인해 얼마나 편안해졌는지 모릅니다. 고통과 공포로 옭매어 있던 내 마음에 물 한 방울의 윤기를 떨어뜨려준 건 그때의 슬픔이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 『마음』,

문학동네, p.267-268

이 고백은 K의 장례를 치르며 선생님이 느낀 심정을 풀어쓴 것이다. K의 자살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그의 유족들에게 사실대로 고하지 못한 채 다시 죄책감에 시달린 선생님은 눈물을 흘림으로써 비로소 후련해질 수 있었다. 내가 이 눈물을 두고 싸구려라느니 가식적이라느니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우리가 감당 못할 큰 죄를 저질렀을 때 한낱 가치도 없을 법한 눈물이 커다란 위로로 다가올 수 있으니까. 하지만 위로가 순간의 위로로만 그친다면?

그 뒤로 선생님은 피폐해져만 갔다. 아내와 장모님이 된 여인과 미망인은 당최 선생님이 무기력하게 지내기만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럴수록 선생님은 그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그들을 이해시킬 수도 없다는 이 처지를 혼자서, 더 비참하게 여겼다. 세월이 흘러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나'가 등장하는 동안 내내. 그렇다면 이것은 진정한 참회인가? 내가 묻고 싶은 지점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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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인한 한 사람의 죽음은 인생에 있어 씻을 수 없는 과오로 남는다. 따라서 반성과 참회의 과정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필요한 시간이나 노력은 그 누구도 정해 놓은 바 없다. 이것은 ① 온전히 참회하는 입장의 '나'와 ② 피해를 입은 '유족'의 심정에 달려 있다고 봐야 옳겠다. 그래서 일정 기간 동안 반성한다는 식으로 참회의 종결을 고하거나 반성할 기회를 어영부영 떠밀다가 죽음으로 도피하는 사람의 경우, 진정한 의미에서 참회했다고 볼 수 없다.

나는 죄지은 사람이 평생 참회만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참회가 꼭 피해자나 유족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죄지은 당사자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보는 편이다. 결국 소설의 말마따나 마음의 '까만 점'을 직시한 채 살아갈 줄 아는 마음이 참회 비슷하지 않겠는가.

사건을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래서 선생님은 참회를 했다고 볼 수 없겠다. 선생님은 죄를 인정하기가 두려워 세상과 둑을 쌓았고, 감히 아내에게 까만 점을 찍을 수 없어 진실을 고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진실이라는 것은 실상 K와 선생님 사이의 문제였지 아내와 큰 관련성은 없었다 - 그와 동시에 아내는 고백 사건에 휩쓸린 최대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것은 선생님이 그 사건으로 아내가 비통해 할 것임을 가장한 자기 기만에 가깝다. 마치 선생님이 K의 유서에 별말이 없었음에도 그 죽음이 자기 탓이라고 넘겨짚은 것처럼.

소설에 실린 해설 글도 참고하기 좋다

마지막 선생님의 자살은 그래서 찝찝하다. 그 명분은 메이지 정신에 따른 순사였지만,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선생님이 다른 이유로 그 선택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선생님은 끝까지 메이지 정신에 따른 것임을 강조한다. 어쩌면 아내에게 자신의 과거를 덮어 둘 요량일 수도 있겠지만, 선생님은 K를 잃은 죄책감으로 죽는다는 게 여전히 인정하기도 직시하기도 두려워서 메이지 정신을 끌어들인 게 아닐까? 자신을 비겁하다고, 부끄럽다고 여긴 선생님은 이후로도 세상을 외면한 채 비겁하게 살았고, 그것이 최선인 줄로만 알아 제대로 뉘우친 적도 없으며, 결국 그런 식으로 죄를 죽음과 함께 묻었다. 아내는 진실을 영영 알지 못해야 할까? 그것도 선생님이 스스로 생각한 도덕적 잣대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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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순사의 근거를 메이지 정신에 두었다고 밝혔다. 이 말을 비틀어 보면 이처럼 소극적이고 우울한, 자해에 가까운 자기 반성형 인간은 메이지 이후로 종식됐다는 소리일 수도 있다. 선생님 이후의 다음 세대는 그릇된 과거를 바로잡고 반성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담겨 있는 그런 결말로 말이다. 그 반성하는 인간형을 나는 오에의 소설에서 확인했기도 했다. 세대는 그런 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고치고 발전해 나가는 듯하다.

진정한 반성에 이르는 길은 이렇게나 험난한 것 같다.

나를 만든 내 과거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경험의 일부이자 나 이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얘기라서, 과거를 거짓 없이 글로 남겨두려는 내 노력은, 인간을 아는 데 있어서 자네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헛수고는 아닐 것입니다.

나쓰메 소세키, 『마음』,

문학동네,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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