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랑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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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은미 씨의 네 번째 소설집이다. 새삼스레 작가의 내력을 소개하는 까닭은, 그만큼 『다른 사랑』이 작가로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진 소설가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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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솔직히 말하자. 사실 첫인상이 썩 좋지 못했다. 아스팔트 도로에 자빠진 채 덩그러니 놓여 있는 라바콘. 그걸 찍은 사진은 묘하게 기울어져 있다. 어딘가 반듯하지 못한, 위태로운 인상을 주는 표지 위로 선명하게 찍힌 글자 다른 사랑. 라바콘과 동일한 색상의 서체는 마치 위아래로 길게 잡아당긴 것처럼 늘어졌다. 제목과 표지만 봐서는 알 수 없으니 책장을 넘겨 보자. 곧바로 차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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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리

무장하는 날

정선

김춘영

그곳

이 모든

고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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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들이 수록된 단편들의 제목이라는 소리인데…… 어떠신가. 흥미로운가? 솔직히 말해 이 중에 내 구미를 당기는 제목은 단 하나도 없었다. '김춘영'이나 '정선' 같은 고유 명사 제목은 그렇다고 쳐도, 다른 제목들은 그 짧은 단어 몇 개만 놓고 보면 도저히 소설 제목이라 생각할 수 없는…… 너무나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며 뚜렷한 이미지로 그려지지 않는 단어 군집이었다. 무명작가가 이런 식으로 제목을 짓고 투고했어도 읽혔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 읽었더라도 그들의 기억 속에 남을지는 미지수다. 그것도 한두 편이 아니라 태반이 그렇다니…… 만일 작가 이름을 지우고서 차례만 봤다면 나는 이 책을 고이 책꽂이에 도로 꽂아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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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물론 우리는 블라인드 면접관이 아니다. 이미 소설가가 누구인지 알고 있고, 그가 세 번의 젊은작가상(2014년, 2015년, 2017년)과 네 번의 김승옥문학상(2019년, 2020년, 2023년, 2025년), 그리고 현대문학상과 이상문학상 또한 여럿 수상했으며 2021년에 '소설가 50인이 뽑은 2021년의 최고의 소설'로 뽑힌 소설집 『눈으로 만든 사람』의 저자임을 떠올린다. 차라리 이 같은 무색무취의 제목을 최은미 씨가 의도했다고 보는 편이 나을 정도다. 물론 나는 작가의 수상 내역을 훑고 점수를 매기는 면접관이 아니다. 나는 한낱 방구석 독자 1이기에…… 내 감상과 직관을 솔직하게 드러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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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놀라운 점은 소설이 담고 있는 스케일의 크기였다. 첫 번째 단편 「상리」는 시골 마을 상리에서 벌어지는 법률 분쟁을 맡게 된 변호사가, 두 번째 단편 「무장하는 날」은 과거 군부대 터였던 곳의 지표 조사를 하는 문화재 연구원이 등장한다. 요즘 소설들이 낯선 타자보다 나 자신 ―혹은 나에 준하는 비슷한 인물상 ― 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데 반해 최은미 씨가 제시한 인물상은 그와 정반대다. 다양한 직업군이 소설 속에 등장한다는 뜻은, 그만큼 작가가 그 분야를 깊이 들여다보고 연구했다는 소리다. 동시에 작가가 다룰 수 있는 서사와 문장의 스펙트럼도 넓다는 것을 암시한다. 띠지에서도 볼 수 있는 문구, "강렬한 독서 체험의 설계자, 최은미"라는 말은 한껏 멋부린 차린 찬사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한 편 한 편이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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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무장하는 날」을 보자. 오래전 '류'는 신입 연구원 자격으로 D시의 문화재 연구 발굴 현장에 있었다. 그곳은 DMZ와 가까워서 군인들의 감독 하에 작업이 이뤄져야 했다. 류는 그 당시 군인들 중, 아마 소대장쯤 되는 직책을 맡은 걸로 보이는 '박수현'과 친하게 지냈다. 그게 12년 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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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 뒤로 다시 D시로 오게 된 류. 이번에는 부대 통폐합에 따라 해체된 부대 터를 지표 조사하게 됐는데…… 며칠째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 탓에 조사가 잠정 중단된다. 그때 류를 알아 본 식당 주인(류는 식당 주인을 기억하지 못했다)이 식당 뒤편의 컨테이너 하우스를 빌려주면서 당분간 그곳에서 지내게 된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자 몸이 아프기 시작한 류. 그 식당에서 박수현과 다시 마주친다. 그는 이미 결혼도 했고 아이도 생겼고…… 이혼도 했다. 비가 그칠 무렵, 조사 중인 부지에서 무언가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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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 무언가의 정체는 문화재가 아니었다. 사람의 뼈였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 부지의 흙을 묵묘에서 실어다가 메웠다고들 했다. 류는 직접 묵묘 터를 찾아가기로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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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내가 이 자리를 빌려 「무장하는 날」을 소개한 이유는 수록된 단편 중 가장 스케일이 크기 때문이다. 가상의 공간 D, DMZ와 군인들, 문화재 발굴 현장…… 그리고 12년의 폭을 오가는 시간까지. 류와 그 주변을 둘러싼 세상을 접속하려면 독자들은 시간과 공간의 덧게비를 하나씩 풀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최은미 씨가 설계한 "강렬한 독서 체험"에 차근차근 몸을 맡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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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런데 「무장하는 날」이 잘 읽혔나? 나는 이해가 잘되지 않아 두 번 읽었다. 그래서 이해했느냐 하면, 그렇다고 말 못 하겠다. 소설의 방대한 스케일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방대한 스케일이 이 소설을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착시 효과를 일으킨 감도 없잖아 있다. 무슨 소리냐 하면…… 내가 위에서 옮긴 줄거리를 봐도 이해되지 않는 구석들이 있을 테다. 류가 박수현과 무슨 관계였는지, 식당 주인이 류를 왜 기꺼이 도왔는지, 뼈의 정체는 그렇다 쳐도 왜 류는 스스로 묵묘 터를 찾아가기로 결심한 것인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다. 물론 소설이 모든 걸 말할 필요는 없다(오히려 모든 걸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독자들이 추측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왜 류가 묵묘 터로 떠났는지, 거기서 또 그런 결말로 도달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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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결말부의 미감이다. 해설을 쓴 평론가 박혜진 씨가 밝혔듯, "최은미는 인간의 조건을 적나라하게 투시하면서도 예술이 멈춰야 할 자리를 정확히 아는 작가다."* 류의 동기는 모르겠지만 「무장하는 날」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출된다. 이 결말이 마음속 무언가를 건드려서, 그래서 나는 이 단편을 두 번 읽었다. 그럼에도 나는 류의 동기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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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동기.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라는 독자)는 소설에서 동기를 중요히 보는 입장이다. 동기가 흐릿하면 작품 속 인물들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저 사람을 왜 사랑하지? 왜 쫓아가지? 왜 도와주지? 왜 죽이고 싶지? 세세하게 알려줄 필요는 없다. 그저 귀띔이나 암시만 해줘도 되니까 일말의 근거가 있어줬으면 한다. 이를테면 「무장하는 날」 속 류와 박수현의 관계 묘사 정도면 충분하다는 소리다(두 사람이 서로 사랑했겠지, 하고 예상되니까). 내가 이번 소설집을 읽으며 가장 난감했던, 이해하기 어려웠던 지점이 바로 인물들의 '동기'였다. 왜 「정선」 속 주인공은 옛 집터를 찾아가지? 찾아가고 싶었다면 왜 굳이 '정선이를 찾습니다' 행사를 이용했지? 어릴 적 집터에서 발견한 숟가락이 귀하다는 걸 알겠다. 그렇다고 그걸 성년이 된 지금까지도 품에 쥐고 다닌다고? 왜 동창생에게 사기를 쳤지? 돈이 궁했나? 돈이 궁해서…… '정선이를 찾습니다' 행사로 고향 땅에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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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실 다른 소설의 경우도 비슷비슷하다. 「그곳」의 주인공 '나'는 예전에 야영을 하다가 폭우로 인해 불어난 계곡물과 마주하고 죽을 뻔했다. 그것이 소설 첫 장면으로 제시되고, 이후로 내가 고지대의 체육관 센터를 오가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계곡 사고로 인해 체육관 센터를 오가게 됐다는 유추가 가능한데, 어디에도 정확한 이유가 나오질 않는다. 내가 놓친 걸까? 유추만 해볼 뿐 주인공이 왜 체육관에 오가는지, 그리고 아주 체육관에 눌어붙기로 작정한 건지 선명하게 짚이질 않는다. 동기를 얼추 알겠는데, 그게 정확한지 확신할 수 없으니 내 딴에는 답답하게 읽혔다. 내가 맞게 읽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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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래서 인물의 동기가 명확한 「김춘영」을 제일 흥미롭게 읽었다. 화운령 중턱에 위치한 '김춘영'의 집을 방문하는 구술면담자 주인공의 동기와 야심이 뚜렷했고, 탄광촌 여성 노동자라는 흔치 않는 직업군을 조명했다는 점 또한 주목할 포인트다 ― 어찌 보면 작가 최은미 씨의 야심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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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런 생각을 해본다. 소설가들은 영화로 치면 각본가이자 연출가이다. 훌륭한 이야기를 쓰는 게 각본가의 역할이요, 그걸 예술적이게 담아내는 게 연출가의 역할이다. 나는 이번에 『다른 사랑』을 읽으며 최은미 씨의 연출가로서 능력에 일말의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각본가로서 능력은 모르겠다. 그냥 나와 잘 안 맞는 것인지, 내가 놓친 부분이 많았던 것인지…… 혹시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으셨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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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렇지만 나는 각본가로서 소설가보다 연출가로서 소설가를 더 좋아하고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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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 책을 덮고 최은미 씨의 다른 작품을 읽어본 게 있나 찾아봤다. 예전에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근린」을 읽어봤구나. 제목만 듣고 무슨 내용이었는지 가물가물했지만 첫 문장을 본 순간 기억이 났다. 맞아.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었지. 나 역시 「근린」을 흥미롭게 읽은 사람 중 하나다. 아무래도 최은미 씨의 다른 소설집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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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작가의 말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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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인 '다른 사랑'은 이 소설들 중 한 편을 쓸 때 가제로 삼았던 것이다. 원고 폴더명과 쓰는 동안 듣던 음악의 플레이리스트 폴더명이 내내 '다른 사랑'이었는데 송고 직전 소설의 제목을 바꾸었다. 품고 있었지만 쓰지는 못했던 그 제목을 종종 생각했다. 왜였을까. 내가 써온 세계와 충돌하는 말 같아서였을까.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제목 같아서였을까. 소설집 준비를 위해 일곱 편의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그 말 앞에서 주저했던 시간까지 여기에 함께 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이라는 말도 '사랑'이라는 말도 감당해볼 용기를 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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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해 본다. 송고 직전에 제목이 바뀐 그 작품이 무엇일지를. 아마 「그곳」이 가장 유력하지 않나 싶다. '그곳'이라는 제목이 전체 내용을 아우르기에 너무 폭넓어서도 그렇지만 이야기 속 여러 사랑의 생김생김이 잘 살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역시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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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 농장
성혜령 지음 / 창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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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버섯은 희한한 생명체다. 같은 종이라도 다른 생김새를 갖는데 가느다란 것도 있고 쭈글쭈글한 것도 있고, 개중에는 한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무시무시한 독이 있다. 습한 곳에서 자라며 보통 포자를 통해 번식하는 이 녀석은 생물학적으로 식물도 동물도 아닌 균류에 속한다. 배경지식 없이 이를 자연에서 맞닥뜨리면 식물인지 동물인지, 아니 애초에 식용인지 아닌지조차 구분하기 힘들다. 함부로 식용이라 생각해서 덥석 삼켰다가 어떤 불상사를 맞이할지 모르지 않나. 우리 식생활과 밀접하지만 실은 잘 모르는, 그런 이유로 가까이 두기 껄끄러운 그것. 내게 있어 버섯의 이미지는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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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번에 읽은 성혜령 씨의 단편집이 바로 그런 이미지라고 불러보면 어떨까. 소설집 이름부터 '버섯'이 들어간 것도 그렇지만, 정말 버섯의 이미지에 딱 부합하는 느낌이 든다. 이번 소설집에 실리지 않은 단편 「원경」 얘기를 잠깐 하겠다 ― 이 단편을 읽고 나는 성혜령 씨의 소설 스타일(혹은 매력)에 감명받았으므로. 줄거리는 간단하다. 신오는 여자친구 원경에게 가족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별을 통보한다. 그러나 며칠 뒤, 공교롭게도 암 진단을 받게 된 신오. 자신의 죽음을 인지한 그는 다시 원경을 찾아가지만, 원경은 최근 이모가 당한 사기 피해를 수습하느라 바빴다. 급기야 원경은 신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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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를 두고 평론가 전승민 씨는 엔트로피 개념을 차용했다. 여기서 엔트로피란 흔히 열역학 제2법칙에 소개되는 용어인데, 간단히 말해 균질한 에너지가 무균질해지면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소리다. 커피와 우유를 섞어서 만든 라떼를 생각해 보자. 라떼를 다시 커피와 우유로 분리시킬 수 있는가? 마술 세계에서는 가능할지 모르겠다 ― 일단 나는 할 수 없다. 돌아가서, 전승민 씨는 이 개념과 「원경」을 이렇게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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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오의 실존적 크기는 서사의 진행에 반비례하여 작아지지만(>) 불안이라는 엔트로피는 선형적으로 증대되는(<) 양상을 보인다. 신오가 자신의 불안을 타개하기 위해 내린 선택은 오랜만에 원경을 만나러 가는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선택으로 인해 신오의 눈앞에는 [원경-이모님-보살님-비구니 스님-금괴-구덩이-돼지 뼈]로 이어지는 타자들이 줄지어 출현하고 일단 나타난 그들은 순서대로 존재감을 더해가며 사라지지 않는다. 세계의 부피는 낯선 것들의 출몰 속에서 점점 더 불안하게 증가한다.


*: 전승민, 「불안에 관한 두 개의 방법론」,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pp.22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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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렇다, 엔트로피. 내가 성혜령 씨의 소설에서 느낀 매력도 그렇게 설명 가능했다. 이야기 속 세계관이 계속 팽창하는데, 그래서 도저히 앞길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데…… 그게 싫지 않았다. 결말의 예측 불가함은 실은 (꼭 성혜령 씨가 아니더라도) 많은 소설가들이 강조하고 활용하는 작법이다. 다만 성혜령 씨의 소설은 중반부까지 읽어도 그 결말이 가늠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비유하자면 사건 A와 사건 B가 연쇄적으로 쓰러지는 '도미노' 같은 모양새가 일반 소설인데, 성혜령 씨의 소설은 그 도미노가 방향을 틀어 사건 S로 넘어간달까…… 나쁜 말로 하자면 이야기의 갈피가 안 잡히는 '산으로 가는 이야기'로 비치겠지만, 나는 이 기질 또한 소설가가 갖추면 좋을 덕목 중 하나라고 본다. 어쨌든 결말을 궁금하게 만드니까. 그리고 위의 전승민 씨의 글을 읽은 만큼, 나는 이 소설집을 엔트로피라는 관점에서 읽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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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등단작인 「윤 소 정」을 보자. 세 사람(윤, 소, 정)은 과거 입시 학원 버스에서 만났다가 직장을 갖거나 결혼을 하면서 뿔뿔이 흩어진 친구 사다. 그러나 소원해진 관계 뒤에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서른 번째 생일날 서남부 유럽을 여행할 계획으로 세 사람분의 예산을 모았던 정이 그만 보이스피싱을 당한 것이다. 죄책감에 빠진 정에게 윤과 소는 위로를 건넸지만 사라진 돈은 돌아오지 않았고…… 이 뒤로 정은 두 사람과 멀어졌다. 윤과 소도 딱히 정을 붙잡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참 뒤 정이 선뜻 두 사람을 집에 초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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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기까지 봤으면 소설깨나 읽으신 분들께서는 다음 내용이 유추될 것이다. 세 사람이 서로 화해하든지 아니면 그 시절을 묻어두고 다시 제 갈 길로 가든지. 성혜령 씨가 택한 길은 그 무엇도 아니다. 그 결말은 나로서는 꽤 충격적이고 찜찜했는데…… 그 역시 나쁘지 않았다. 이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궁금할 것 같다. 과연 정의 남자친구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거의 몇 년 만에 정을 만난 소와 정, 그리고 적어도 두 사람보다 최근의 정을 잘 알고 있을 동거인 남자친구. 누구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겠는가. 성혜령 씨가 남자친구를 수성 쩍은 존재인 채 놔둔 것이 이 소설의 서스펜스와 불온한 기운을 살리도록 한몫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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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 역시 엔트로피 개념으로 접근해 보면. 처음에 세 사람의 만남이 있고 → 사기 사건으로 관계가 해체된 다음 → 재결합의 기미가 보이지만 이미 다른 관계(남자친구)가 더해졌고 → 정의 어머니를 뵈러 버스를 탄다. 「윤 소 정」에서 보이는 엔트로피 증가 양상은 낯선 인물의 확대, 그리고 (결말부에 등장하는) 공간 이동까지 확장된다. 이 도식에 더 잘 들어맞는 소설은 표제작인 「버섯 농장」이다. 이는 휴대폰 결제 사기를 당한 진화와 이를 돕는 친구 기진의 모험 이야기로, 인물 관계는 [전남친 → 전남친의 군대 후임 → 그 후임의 아버지]까지 확장되며 공간도 [요양병원 → 버섯 농장]까지 확장된다 ― 장담하건대, 이렇게 도식화된 인물과 장소만 보고 이 소설의 내용을 간파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만큼 이 소설의 줄거리를 종잡기는 힘들다. 특히 결말부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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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말이 나온 김에. 「버섯 농장」의 결말은 당혹스럽다. 하지만 나는 그 당혹스러움, 의외의 상황이 생각보다 기억에 선명하게 찍혔다. 그들이 저지른 행동에 너무 차분하다는 것만 빼면…… 누군가 이를 영화로 만들 것 같은 예감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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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내가 엔트로피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 도식에 들어가지 않는 단편들은 덜 흥미로웠다. 예컨대 「물가」의 주인공 '나'는 '유안'이 기르는 치와와 '치약이'를 임시로 맡았는데, 이 과정에서 지역 커뮤니티 앱에서 만난 '크림'을 알게 되지만 딱 거기까지다. 소설은 주인공이 사는 물가 근처를 벗어나지 않고, 결말부에 맞닥뜨리는 사고에도 그 이상을 넘어가지 않는다 ―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물가를 벗어나려 하는 그 찰나에 소설이 끝난다. 또 다른 예시로 「마구간에서 하룻밤」도 있다. 마구간이라는 공간에 자꾸만 사람이 들이닥친다는 설정은 「주말부부」와 흡사하지만 그 결은 다르다. 「주말부부」 속 손님들은 주인공 조오의 입장에서 완전히 낯선 사람들인 데 반해 「마구간에서 하룻밤」은 주인공 문진이 아는 사람, 혹은 마구간을 보러 온 노부부로 신원이 명확하다. 그래서 후자는 초반부부터 긴장감이 덜하다 ― 물론 나중 가서 손님들에게 감춰진 비밀이 드러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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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렇게 갈무리하면서 보니 더 선명해진다. 여기 소설집에 수록된 이야기들의 패턴은 비슷비슷하다. 낯선 자의 침입이 있고, 그 자와 기묘한 공존(불화까지 가지는 않는)을 시작한다. 이때 '침입 이후'로 이어질 이야기가 성혜령표 소설의 핵심 키(key)가 아닐까 싶다. 내 삶에 갑자기 끼어든 치약이(「물가」)가, 군인(「사태」)이, 아버지의 친구(「간병인」)가 얼마나 흥미로운가? 불쾌한가? 기괴한가? 그런 그들에 주인공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그들은…… 어떤 버섯인가? 그들에 관해 잘 아는가? 가까이 두어도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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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 글을 쓰는 오늘, 그러니까 26년 9월 2일에 성혜령 씨의 두 번째 소설집 『대부호』가 출간됐다. 출판사는 문학동네. 조만간 두 번째 소설집이 출간되리라 기대했지만…… 이렇게 기묘한 타이밍일 줄 몰랐다. 내가 흥미롭게 읽은 「원경」도 그 소설집에 실렸다고 한다. 출간을 축하드리며, 새 책도 조만간 만나기를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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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부수는 말 - 왜곡되고 둔갑되는 권력의 언어를 해체하기
이라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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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술사회학 연구자 겸 페미니스트인 이라영 씨가 쓴, 말에 관한 거대한 담론이다. 내가 작가를 소개하면서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꺼냈는데 혹시 그 말이 당신을 불편하게 했는가? 그 말만 듣고도 이 책이 대략 어떤 논조를 취할지, 특정 성별을 지지하거나 헐뜯는 식으로 제 주장을 펼치겠거니 예측했는가?

  분명 '말에 관한 담론'이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워딩에서 다른 이미지를 상상하신 분도 있을 수 있다. 그분이야말로 이 책의 독자로 환영받을 사람이다. 저자는 『말을 부수는 말』을 통해 평소 우리가 무심결에 쓰는 말에 파고든 오해와 편견 내지 그릇된 표현을 지적하고 분석한다. 비단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만 아니라 노동자, 장애인, 흑인처럼 오랜 시간 사회적으로 배척된 이들까지 포괄하면서 말이다.


  예시 하나. 유모차에서 유아차라는 표현으로 바꾸는 움직임에 관해 생각해 보자. 바뀐 표현이 어색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사실 그 말이 입에 익지 않아서 그럴 뿐이지 자세히 뜯어보면 '유아차'가 실제에 부합하는 표현이다. 이런 언어 교정은 보다 정확한 표현을 위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혹자는 이것이 여성주의자들의 성 갈등(sexual conflicts) 조장 활동 중 하나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나도 이들의 말이 아주 틀리다고 단정 짓지 않는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유모차의 '모(母)'라는 말이 '엄마'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아이를 돌보는 '유모(nanny)'라는 직업에서 따왔기 때문에 성차별을 조장하지 않는다는 거다.

  내 생각은 이렇다. '유모'는 다른 아기에게 제 모유를 먹이고 키운 여성을 뜻하는 말로, 현대에는 사실상 그 의미가 거의 퇴색된 상태다(요새는 젖동냥을 다닐 필요 없이 아이에게 분유를 사 먹이면 된다). 그러므로 돌아가서, 유모라는 말을 굳이 살릴 필요 없이 유아라는 표현으로 대체하는 게 오늘날에 더 정확하다고 본다.

  무엇보다 유모차를 유아차라고 부른다고 해서 언어적 혼선을 야기하지 않는다. 어, 유아차가 뭐지? 하고 잘 쓰던 단어를 괜히 생뚱맞게 바꿔놨느냐는 비판이 나올 우려가 없을 만큼, '유아차'는 의미 파악에 있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인 단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이 옳은지 그른지에 있지 않았다. 이 말이 여성주의자들의 성 갈등 조장 및 언어 검열 활동인지, 그 여부가 더 크게 문제시됐다.

  결론이 어째서 그렇게 된 걸까.

  유모차에서 유아차라고 용어를 바꿨다. 아이들이 타는 차라서 유모를 유아라고 바꿨을 뿐이다. 그런데 이 표현이 어째서 육아의 역할을 남성한테 전가하려 드는 여성주의자들의 암호로 와전된 것일까. '모'가 '아'에서 바뀐 과정에 어디에도 남성의 역할을 따지는 맥락은 없었는데. 여기에 내가 알아채지 못한 사회 · 정치적인 외압이 따라붙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여타의 사정들을 제하고 오직 단어 그대로만 보자면 '유아차'에 별다른 선동적인 뉘앙스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를 두고 여성주의니 검열이니 운운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지 않는가? 이게 내 생각이다.


  이런 언어 차원의 오해와 편견이 '유아차'뿐일 리 없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가장 큰 감상은, 얼마나 우리 사회에 비틀리고 어그러진 언어가 만연한지를 봤다는 거다. 어떤 말은 살아남는 반면 어떤 말은 죽고 만다. 그런데 이 과정이 자연스럽지 않고 어떤 외압에 의해, 특정 표현이 부름을 받고 다른 표현이 묵살당한다면 어떠한가. 대체할 만한 좋은 표현이 있는데도 부정확한 낡은 표현이 고수된다면 어떠한가. 여기서 저자는 정직한 표현을 묵살하려는 움직임이 지배 계층, 오늘날 기득권 자리를 꿰차는 세력들의 소행에 있다고 봤다 - 저자의 정치적 견해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_혐오의 언어가 빠른 속도로 증식하는 것에 비하면 저항의 언어는 늘 순탄하지 못하다. 내가 말하는 '저항의 언어'는 정확한 언어에 가깝다. 정확하게 말하려고 애쓴다는 것은 정확하게 보려는 것, 정확하게 인식하려는 것, 권력이 정해준 언어에 의구심을 품는다는 뜻이다. 권력이 저항의 언어를 항상 진압하는 이유다. 그 대신 권력의 기준으로 왜곡된 언어를 적극적으로 유포한다.

p.8-9


  또한 그 같은 권력을 차지한 이들은 대체로 보수 정당, 가부장제의 혜택을 받았거나 앞으로 받게 될 남성들이라고 봤다. 이런 시선을 저자가 뒀기 때문에 나 같은 남성 독자로서는 아무래도 수용할 여지와 반박할 여지를 나란히 둘 수밖에 없었다. 저자의 모든 말을 우리가 경전처럼, 정답처럼 따를 필요는 없다. 저자도 말했듯이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쓰는 게 아니라, 화두를 던지기 위해 쓴다. 권력의 말을 부수는 저항의 말이 더 많이 울리길 원한다"니까, 나도 그녀의 말을 무작정 수용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자의 시선에 여러모로 동감했으며, 더불어 내 평소 언어 습관에 관해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졌음을 고백해야겠다.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에도 사회적 압력이 깔려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배웠다.


  예시 둘. "나이를 먹으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어라" 같은 말이 있다. 우리는 흔히 경험 없는 젊은이들에게 조언(이라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구박과 타박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을 늘여뜨리는 기성세대를 낮잡아 '꼰대'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를 향해 괜한 조언일랑 접어두고 그냥 '지갑'을 열라고 요청한다. 이 말이 우스갯소리인가? 이런 말은 상대적으로 생산 능력이 떨어지는 노년층에게 제 가치를 증명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통로가 오직 돈뿐임을 시사하는 사회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늙어서 지갑을 열 수 있는, 부를 축적한 사람만이 인정받는 현대 사회상을 반영하는 좋은(하지만 나쁜) 문장일지도 모르고.


  _존중받는 늙음의 보조 도구는 오직 돈이다. 흔히 우스갯소리로 나이를 먹으면 '입은 다물고 지갑을 열라'고 한다. 지갑으로 대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갖출 수 있는 '우아함'일 것이다. 현실에서는 지갑을 여는 사람이 입도 잘 열고, 그들의 말이 세상에 더 잘 들린다. 다시 말해 지갑을 열지 못하는 사람은 입도 열지 못한다.

p.80


  치맛바람이라는 말은 또 어떤가? 요새 의미가 많이 퇴색되기야 했으나 이 말의 본뜻은 "여성의 드세거나 극성스러운 사회 활동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사회용어"다. 쉽게 풀어 자식들의 성공과 출세 가도를 위해 손발 걷어붙인 어머니들을 낮잡아 부르는 말인데, 이게 비단 어머니들의 문제일 리 없다. 고도로 발달한 성공 지상주의, 극심한 빈부 격차가 일으킨 사회 풍토랄 게 결국 어머니들을 악착같이 몬 것은 아닐까? 저출산 고령화 문제는 또 어떤가? 저출산 문제는 저출산 문제고 고령화 문제는 고령화 문제다. 둘은 쌍방으로 영향은 있을지언정 엄연히 다른 문제이고 해결 방안도 제각각이다. 그런데 세간에는 고령화 문제가 저출산에 달린 것처럼, 그래서 여성들이 출산만 하면 고령화 문제도 자연스레 해소될 것처럼 바라보지 않는가?


  이러한 사소한 언어부터 정책 결정까지, 언어는 우리 생활에 상당 부분 밀접해 있다. 언어로 사고하는 우리 입장에서 언어 주위에 어른거리는 허깨비를 벗겨내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이 대신 "몇 학번이세요?"라고 물으며 은연중에 학력주의를 뽐내는 습관을, 남을 비방할 목적으로 일부러 그럴싸하게 과장되고 비논리적인 비유법을 즐겨 쓰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_수사 과잉은 점점 극단적인 언어를 낳는다. 자유한국당 대표였던 황교안은 공수처 설립을 반대하며 기자회견을 통해 "공수처는 독일 나치의 정치 경찰인 게슈타포가 될 것"이라 했다. '좌파독재'라는 언어를 사용하던 그는 '나치'와 '게슈타포'의 의미도 바꿔나갔다. 쉽지만 잘못된 말, 의미가 텅 빈 화려한 수사야말로 경계의 대상이다. 게다가 망언이 항상 상스럽게 들리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꽤 그럴 듯하게 들린다.

p.129


  그렇다면 이 같은 언어 습관을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노력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정확한 언어 표현을 지향하면 될 일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말도 곧 '정확한' 말이다 5). 불필요하게 복잡하고 과장된 비유를 걷어낸, 어쩌면 '정직한'이라는 형용사가 딱 어울릴 법한 말. 이 말은 평소 독서와 글짓기(이 같은 독후감을 포함해서)를 취미로 삼은 내게 큰 귀감이 됐다. 내가 무심결에 뱉은 말속에 알게 모르게 상대방을 두고 벽을 치는 단어가 섞였을지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언어는 지나치게 명료해 보여서, 단순치 않은 일까지 단순하게 전시하는 게 아닐는지 생각해 본다.



/



  2.

  한편으로 저자 또한 언어의 틀에서 사고하고 있다. 따라서 온전하지 못하고 오해를 부르는 표현을 쓰는 데 자유롭지 못하다. 나 또한 내 말이 일으킬 오해와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인지해야 한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얘기해 본다.

  페미니즘 도서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남성 중심적 사고가 그토록 세상을 반쪽짜리로 만들었으니 여성주의적 사고가 등장해야 한다는 말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남성의 역할은 무엇일까? 오늘날 남성들은 어떻게 페미니즘에 동참할 수 있을까? 내가 접해본 페미니즘 도서들은 안타깝게도 이에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거나 관심이 없었다. 마치 남성 독자는 미처 상정하지 못한 것처럼.


  애초에 '페미니즘'이라는 말부터가 (저자가 본문에서 '가족'을 설명할 때 말했듯) 배제의 언어 성향을 띤다. 여성을 뜻하는 어간 'femi-'를 쓴 이상 페미니즘은 여성을 중점에 둔, 달리 말해 남성을 후순위에 둔 이론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성주의는 평등주의가 아니다. 남성주의가 이성과 정의의 동의어가 아니듯, 여성주의도 감성과 공정의 동의어가 아니다. 개중에는 페미니즘을 진정한 선(善)으로 생각해서 과도한 찬양을 보이거나("왜 페미니즘을 안 하세요?" "페미니즘을 모르면 공부하세요") 반대로 비아냥거리기도 하는데("페미 묻으셨어요?" "페미니스트시면서 왜 힘든 일을 남자에게 떠넘기세요?"), 이 또한 언어의 허깨비가 일으킨 착시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이 공정한가? 정의로운가? 평화주의인가? 글쎄, 내 생각에 페미니즘은 그냥 페미니즘이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여성 혐오 용어들은 저자의 착실한 조사와 인용문들로 분석된다. 이들을 본문에서 설명할 때 쓰인 주석들로도 모자랐는지, 뒤에 딸린 미주는 무려 105개나 된다. 그런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 대목은 남성 혐오를 설명하는 저자의 말에 있었다.


  _그렇다면 '남성혐오 용어'는 무엇인가. 오조오억, 허버허버, 웅앵웅 등이라고 한다. 이 언어들의 기원을 굳이 따져보면 처음에는 인터넷상의 신조어였으나 여성들이 남성을 기분 나쁘게 할 때 사용한다면서 '남성혐오'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여성들의 언어를 모두 남성혐오로 규정하여 입을 틀어막으려는 전략이다. 여성들이 현상을 묘사하거나 반영하여 생각, 느낌, 개념을 전달하는 언어를 만들거나 사용하는 것, 다시 말해 대표적인 재현 체계인 언어를 만들고 유통하는 행위를 억압하는 것이다. 여성에게 문화적 입마개를 씌우는 행동이다.

p.199


  이 말을 비롯해서 다른 말도 가져와 보자.

  _우리 현실에서 보면 대체로 억울함을 대하는 방식은 이와는 반대로 움직인다. 사사로운 억울함을 밝히겠다고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데 여념이 없는가 하면, 정작 다른 사람도 억울해질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오히려 방관한다. 예를 들어 백인이어서 잠재적 인종차별주의자로 여겨지거나, 남성이라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로 여겨진다면 억울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아닌데, 왜 나를 의심하느냐며 몹시 분노하고 억울해한다. 이런 억울함은 굳이 밝히려 할 필요가 없다. 그런 감정은 자신의 위치가 만들어낸 권력을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p.111


  저자가 남성을 어떤 위치로 이해하는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오랫동안 기득권을 사수한 남성들은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욕과 멸시를 당하기에 남성들은 사회적으로 높고 견고한 위치를 선점했으며, 여성이 그들에게 행한 공격은 바위 같은 권력에 계란을 던지는 격이라 "억울"할 일도 아니라고. 위의 남성 혐오 표현이나 모 편의점 포스터의 집게손가락 모양은 여성의 "대표적인 재현 체계인 언어를 만들고 유포하는 행위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그 말들은 "여성들이 남성을 기분 나쁘게 할 때 사용한다면서 '남성혐오'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여성에게 입마개를 씌"운다고.


  그런데 이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기득권자라고 해서 비기득권자들에게 모욕당할 수 없는가? 앞서 백인 얘기가 나왔으니까 이를 치환해 보자. 흑인이 백인에게 행한 모욕은 모욕으로 성립되지 않는가? 백인은 흑인이 행한 혐오를 억울해하지 말고 잠자코 듣고 있어야 하는가?

  보통 우리는 법적 보호를 받는 미성년자의 범법 행위도 - 법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을지 몰라도 - 범죄라고 생각한다. 누가 행하든, 혐오는 혐오다. 저 말이 진짜 혐오 표현인지 아닌지와 별개로, 저 말들이 사실상 인터넷에서 혐오를 목적으로 쓰인 바 있지 않는가? 왜 저자는 그토록 많은 주석과 미주를 활용했음에도 남성 혐오 표현에 관해서는 별말이 없었을까. 어휘의 기원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파악하는 저자가 이에 한해서는 "기원을 굳이 따져보면" 운운하며 소홀히 대했을까, 굳이. 이런 나도 페미니스트들의 입에 입마개를 씌우는 사람인가?


마찬가지로 저자의 비유나 고찰도 지나치다 싶을 때가 있었다. 한국 전쟁 이후로 여성상을 포착한 그림에 관한 서술이 그러하다. 내가 저자보다 관련 지식이 부족하고(저자는 예술사회학 연구자다) 미술사에 문외한이라 그럴지 몰라도, 일단 쓰인 글만 딱 봤을 때, 독자로서 왜 이런 결론이 도출되는지 의문스러워서 인용해 봤다.


  _민족의 단결을 위해 일제시대 후반부터 모성을 강조하는 그림이 증가하여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눈에 띄게 늘어났다. 사회가 힘들면 힘들수록 책임감 있고 희생적인 강한 어머니 이미지를 만들었다. 전쟁을 거치며 실제로 아버지가 부재하기도 했지만, 살아 있다고 해도 '가장'의 역할을 하기 힘든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때 모성을 강조하는 방식은 주로 어린 아들을 안고 있거나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모성에 대한 강조는 여성을 전통적인 성역할에 가두려는 의도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장하지 못한 채 '영원한 아들'의 정체성에 갇힌 가부장제 남아들의 초상이기도 하다. 어머니를 숭배하는 듯 보이는 이 아들들은 식민지와 전쟁을 통해 상실한 남성권력을 복구하는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여성을 멸시한다.

p.221


  어머니의 위대함을 표현한 그림이 남성 권력을 복구하는 수단이었다는 시선은 그럴싸하지만 아무래도 찝찝한 해석이다. 미술사조를 잘 모르는 나 같은 감상자가 어머니 그림을 보고 과연 그 같은 해석을 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고. 애초에 위대한 어머니 상을 그린 게 여성 혐오의 일환이라는 주장도 진담인지 모르겠다. 이런 식의 해석이면 남자들은 여자를 그려서도 안 되고 소재 삼아서도 안 된다 - 이건 나의 언어가 일으킨 비약일 테다.



/



  3.

  아무튼 언어를 민감하게 받아들일수록 표현은 더 힘들어질 테지만, 분명 결과는 값질 테다. 저자가 이 책에서 시도한 '도전'만큼, 내 독후감도 상당히 '도전'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덧붙여 내가 후술한 아쉬운 면은 이 책의 사소한 일부에 불과하며, 전체적으로 봤을 때 분명 훌륭한 내용임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그러니까 이 책은 말에 관한 논평이며, 보다 올바른 말을 향한 저자의 집념이자 "화두를 던지기 위한" 도화선과 같다. 두세 번 더 읽어볼 생각이다.



  p.s: 굳이 이런 말을 해야 하나 싶긴 하나, 내 말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있을 테고, 나 또한 이런 저런 책을 더 읽어가며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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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 - 감정의 연대기 1929~1939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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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서 중요한 몇몇 장면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세계대전이다. 이 전쟁은 전인류에게 어느 정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결코 그 같은 일이 재발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줬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세계는 다시 평화를 지루하게 느꼈는지,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장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도 그렇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그렇다. 이들만큼 과격한 형태는 아니지만, 현재 북한에서 삼팔선 너머로 삐라를 날리고 있다. 예전 일이 아니라, 당장 오늘날의 얘기다.

그런데도 우리는 전쟁 얘기를 지겹게 느끼는 경향이 있다. 내가 꼭 전쟁 얘기에 항상 관심을 갖자는 뜻에서 하는 말은 아니다. 당장 나조차도 세계 각지의 전쟁 소식에 그리 귀 기울이는 편이 아니니까. 아마 당장의 우리가 평화에 익숙해진 것도 있고, 많은 경우 전쟁과 같은 역사담이 '이미 지난' 일처럼 비춰져서 그런 것 같다. 요컨대 우리는 중고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관해 배웠고, 거기서 배울만큼 배웠다. 거기서 더 이상 할 말이 남아 있을까.




플로리안 일리스가 쓴 『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도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상을 제시한다. 제목에 딸린 부제 '감정의 연대기 1929 ~1939'는 세계1차대전이 끝나고 터진 대공황, 나치즘, 그리고 제2차 세걔대전 발발의 위험이 도사리는 시기를 짚어낸다. 하지만 이 책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될 20세기 초반은 여타의 역서 서적들과 사뭇 다르다. 시작은 파리 고등사범학교, 시몬 드 보부아르와 장폴 사르트르의 눈맞춤이다. 이들은 익히 알려진 바대로 결혼을, 자세히 말해 계약 결혼을 맺게 될 테지만 당장은 아니다. 사르트르는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마침내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날, 그는 퇴짜를 맞았다. 시몬의 여동생 엘렌 드 보부아르의 말에 따르면, "키가 작고, 안경을 썼고, 아주 못생" 긴 그였기에.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뤄두자. 비슷한 시기로 추정되는 어느 늦은 오후. 시인 마샤 칼레코는 베를린 서부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그녀는 집에서 남편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지만 이곳 카페에서 다른 이들과 수다를 떨고 활력을 느끼는 게 즐겁다. 이들 중에 물론 남자도 섞여 있다. 남편은 그런 아내더러 뭐라 말하지 않으나 점차 과묵해질 따름이다.




유명 할리우드 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 토마스 만의 아들이자 동성애에 관한 소설을 쓴 클라우스 만, 복잡한 여성 편력의 소유자 파블로 피카소, 자신이 벌써 구세대가 되어간다고 느낀 시인 겸 의사 고트프리트 벤, 여행지마다 새 애인을 만든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 자기만의 미를 탐구한 화가 타마라 드 렘피카, 배우 역할로서 여성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고팠던 배우 브리기테 헬름, 망가져 버릴 대로 망가진 아내와의 관계를 문학에서라도 구제하고 싶었던 스콧 피츠제럴드...... 이 책에서 잠깐이든 여러 차례든 등장하는 인문의 이름만 나열해도 상당하다. 저자는 시인이나 소설가, 영화 감독, 배우, 사상가와 정치인 등 직업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그 시절에 활동한 유명 인사들의 삶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펼친다. 이들의 생활을 한 권의 책으로 모으기 위해 저자는 무려 394권의 책과 각종 자료를 참고했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옆에 작지 않은 메모지를 준비해야 했다.




실로 이 책은 단순히 쉽게 읽히지만은 않는다. 수많은 이름들이, 그것도 한국에서는 잘 소개되지 않은 시인 마샤 칼레코나 소설가 에리히 뮈잠, 언론인 겸 소설가 요제프 로트같은 인물들이 틈틈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의 생애를 들여다보는 게 오늘날 독자들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가? 오히려 우리는 수많은 이름들 속에서 삶의, 사랑의, 연애와 결혼관의 다양한 표본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직업도 성별도 달랐지만 사랑을 대하는 태도도 너무나 달랐다. 자유 연애와 기존의 결혼관이 충돌하면서 누구는 정말 자유로운 연애를 실현했다. 누구는 젊은 이들을 시샘하면서 멀찍이 바라만 봤고, 다른 누구는 복잡한 애인 관계로 곤혹을 치렀다. 누구는 사상 운동에 매진한 나머지 곁에 있던 사랑을 몰라봤고, 또 다른 누구는 자유 연애와 결혼 제도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했다.


오늘날 사랑은 지극히 자유로운 문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비혼주의를 외치던 친구가 사르트르처럼 어떤 이에게 첫눈에 반할 수 있고, 내 연인이 알고 보니 마를레네 디트리히처럼 다른 이성들과 히히덕덕 어울리는 걸 보고 화를 낼 수도 있다. 이성 간의 사랑이 아니라 동성 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에 관한 한, 시대를 타지 않고 변치 않는 가치가 있을 거라 우리는 기대하는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이 책을 읽은 게 아닐까?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될 사실 ― 이들의 사랑은 세계사에서 가장 굵직하다고 볼 수 있는 세계대전 사이에 끼어 있었다.



/



내가 받은 티저북은 책의 일부 내용만 담겨 있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이 어떤 결말을 마주할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사랑은 시대에 휩쓸리는가, 아니면 시대와 상관없이 제자리를 지키는가. 다가올 정식 출간 도서에서 이를 확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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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거짓말 ㅣ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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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른하르트 슐링크. 이이의 이름이 여러 사람에게 친숙히 들릴 것 같진 않다. 대신 그가 쓴 대표작 『책 읽어주는 남자』를 영화화한,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더 리더> 얘기를 꺼내면 '아하' 소리가 절로 나올지도. 영화에 문외한인 나도 <더 리더>는 본 적 있고, 이후 원작 소설까지 찾아 읽으며 저자의 탁월한 문장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의 책에 내가 제대로 관심 갖기 시작한 계기는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2014년 제4회 박경리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부터다.

  정작 잘 알려지지 못해 아쉬운 감도 드는데, 이 박경리문학상은 한국판 노벨문학상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빼어난 작가들을 소개한다. 국내 최초의 세계문학상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희소하고 매력적인 해외 작가들을 폭넓게 조망하기 때문에 더 가치있다(이를 역대 수상작가 목록이 증명한다). 나도 훌륭한 외국 작가를 만날 목적으로 해당 목록을 참고하는 편이다. 베른하트트 슐링크는 네 번째로 박경리문학상을 수상한 독일 작가로, 소설을 쓰기 전에 법대 교수를 재직한 특이한 약력의 소유자다.

  법대 교수 출신 소설가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답게, 그는 초창기 범죄 추리 소설을 몇 편 발표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 이후 슐링크는 다양한 소재를 아우르며 본격적인 소설가의 길로 발돋움했다. 이번에 내가 소개할 단편집 『여름 거짓말』도 마찬가지다. 그나저나 제목의 어감이 다소 낯설다. 별다른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명사를 나란히 배치시킨 이유가 무엇일까? 이 물음은 소설을 읽다 보면 깨닫게 될 텐데, 여기 실린 일곱 가지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해 저자가 뜨거우면서도(여름) 서늘한(거짓말) 우리네 삶의 폐부를 들춰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사람이 한 번쯤 겪기 마련인 사랑의 유혹, 질투심, 호기심...... 그 모든 걸 충족시키려 저지른 거짓말들.


  이렇게 보니 『여름 거짓말』은 심리 소설로 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거짓말을 하는 행위 자체가 어떤 저의를 감추고 남을 속이는 거니까. 왜 그런 거짓을 고하게 됐는지를 (속인 사람이) 밝히거나 (속은 사람이) 밝혀내는 것도 이 소설집을 읽는 묘미겠다. 이중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은 단편 「바덴바덴에서 보낸 밤」은 바람 피우는 남자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대변한다 - 옹호가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이야기의 주인공 남자는 희곡작가로서 자신이 쓴 각본의 초연을 보러 바덴바덴으로 향했다. 테레제와 함께. 그녀는 훌륭한 동행자였고, 그를 즐겁게 해줬다. 하지만 이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다음 약혼녀 안네를 마주하자 남자는 양심에 찔렸다. 그녀는 자세한 사정이야 몰랐으나 그가 여행 중에 혼자 있지 않았음을 의심하고 있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외도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던 안네. 그녀에게 지난 바덴바덴에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고해야 할까?

  그는 말하지 않기를 택한다. 그녀를 배신하려 거짓말한 것은 아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고, 다만 그러는 편이 그녀를 충분히 안심시킬 수 있고 둘 사이 관계에 있어도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 잠시 그는 안네에게 브렌너스 파크 호텔에서 보냈던 밤의 진실을 말해줄까 생각해보았다. 그래봤자 괜한 야단법석만 빚어낼 것이다! 그깟 진실이 한 시간 내내, 아니, 두 시간 동안이나 안네에게 둘러댔던 말들보다 더 중요하단 말인가? 뒤늦게 테레제와 보냈던 밤에 대해 고백하는 것은 괜히 그 일을 원래보다 더 부풀리는 것 아닌가? 앞으로 언젠가, 그래, 앞으로 언젠가 안네에게 진실을 말하리라. 미래를 위해 그는 약속을 하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아무 문제도 없어, 안네. 약속할게. 울 필요 없어. 진실을 말해 주겠다고 약속할게."

p.79


  이런 거짓말은 당장의 평화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됐다. 하지만 그 다음은? 아시다시피 허술한 거짓말은, 그리고 끈임없이 의심하는 사람 앞에서 한 거짓말은 언젠가 들통나게 마련이다. 실제로 그날의 진실을 안네가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둘은 대판 싸웠다. 사실 일방적으로 남자가 욕을 먹긴 했지만. 남자가 잘 했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안네가 그의 잘못을 심하게 부풀리고 있다는 것도 얼마간 사실이다. 그는 테레제와 함께 있었지만 그 이상의 관계를 갖지 않았다. 안네는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확신했다. 남녀가 호텔에서 며칠 밤을 함께 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이성을 잃은 안네는 그의 면전에 침을 뱉고 손찌검을 했다. 그가 손 쓸 새 없이 안네는 등을 돌리고 떠나버렸다.

  이 순간에 그는 안네의 이해를 바란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도 과거 여자친구의 외도에 좌절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느끼는 이 착잡함은, 안네를 어떤 말로도 설득시킬 수 없을 거라는 실상에 있었다. 아무리 그가 테레제와 아무 일도 없었음을 설명해도 그녀는 듣지도, 들을 생각도 갖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녀는 남자의 말을 믿지 않기로 작정했으며 안네가 듣게 될, 들어야 할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쯤 되면 더 이상 사건의 진위 여부를 판가름하는 게 의미 없었다.



  - 그 역시 안네가 주도하는 비판과 자아비판의 의식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그저 즐겨야 하나? 마음속으로 웃으면서 그녀가 시인을 하라고 하는 것은 그냥 다 시인해야 하나?

  그러나 시인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알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으면 전부 규명될 때까지 그녀는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가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이렇게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해명을 요구할 것이고, 또 그에 따른 비판이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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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나? 의미 없는 진실을 붙잡으며 그녀와 맞서야 하나, 또 다른 비난을 부를 줄 알면서도 더 진실처럼 보이는 거짓을 시인해야 하나? 이런 상황에서 그가 테레제와 잤다고 거짓말하는 편이 (적어도 그녀와 둘의 관계에 있어)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다면, 이번에도 같은 선택을 해야 맞을 테다. 그런데 왜 그는 주저하나?

  앞선 상황, 바덴바덴에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고할지 말지의 문제는 새 얼굴로 찾아 든다. 이제 상황은 그가 바덴바덴에서 테레제와 잤는지 안 잤는지의 문제로 넘어 왔다. 두 문제는 같은 듯 다르다. 아무래도 후자의 상황에서 문제가 구체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분명해졌기도 하나...... 내 생각에 그가 주저하는 진짜 이유는, 전자가 도덕적 결함을 회피하는 거짓이라면 후자는 인정하는 거짓이기 때문 아닐까 싶다.

  이런 얘기다. 위 상황처럼 자기 잘못이지만 거짓으로 감출 수 있는 일에 우리는 주저 없이 거짓말을 한다. 거기에는 평화라는 꼬리표가 붙고 너와 나(즉 개인이 아닌 다수)를 위한 선의의 거짓으로 위장된다. 한편 자기 잘못이 아닌 일을 거짓으로 인정하는 일에 우리는 열불을 낸다. 아무리 공리를 위한 일이래도 내가 처한 억울함은 지워낼 수 없다. 이 둘의 차이는 당사자성에 있어 보인다. 그 거짓을 통해 다수가 이익을 보는 한이 있어도 내게 득이 못되거나 해가 되면 쓸모없다. 내 이익을 먼저 챙긴 다음, 이를 합리화할 명분으로 다수의 이익을 돌아보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그런 거짓이 정말 안네에게 이익이 될지 소설 속 남자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진실보다 합리적인 거짓의 쓸모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지 않을까? 내 이익보다 앞서는 공리는 말 뿐인 허상에 가깝지 않을까?


  이런 당사자성을 지적하는 또 다른 단편이 『마지막 여름』이다. 여기서 주인공 할아버지는 앓고 있는 지병을 숨긴 채 가족들과 함께 여름 휴가를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아내도, 자식도, 손주도 모르게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생각이었다. 방법이야 간단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방안에서 약을 투약한 다음 자리를 깨끗이 치우고 거실로 돌아간다. 그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위안 삼아 눈을 감을 것이다. 그가 피곤해 잠든 줄 아는 가족들은 다음날이 돼서야 사실을 알아차리겠지. 하지만 계획을 실천하기도 전에 아내에게 약을 들킨 그는 무슨 소리를 듣게 될까? 아내는 그에게 크나큰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며, 그의 거짓이 만든 세상에서 자신은 "단역배우(본문, p.262)"일 뿐이냐고 지적했다.

  그밖의 다른 단편들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야기마다 제각기 다른 거짓말을 품고 있고, 그 거짓을 바라보는 입장 차이도 생각해볼 문제를 던진다. 여담이지만 소설 속에 물음표가 정말 자주 등장한다. 슐링크 소설의 특징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번역가 분은 "작중인물들은 자신이 설정한 행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사실 자신이 행복이라고 느꼈던 것이 나중에 가서 보면 행복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중략) 자신이 생각했던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주인공은 인생의 다른 가정을 해본다. 슐링크의 작품에 수많은 의문문이 등장하는 이유이다. 이런 의문문들은 독자에게 생각의 갈림길에서 나름의 결정을 해야 하는 여운을 남긴다.(365)"라고 말한다.

  거짓말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소설 속 주인공들도 스스로를 향해 물음표를 남발하듯, 우리가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이를 명쾌하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우리는 정답을 찾아낼 수도 있다. 그 물음표 속을 헤짚다보면 말이다. 나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당시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지금 끄집어냈다. 다시 읽게 되는 날에 또 다른 생각이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지 않을까? '여름'과 '거짓말'이라는 두 키워드의 간극 속에서, 이토록 매혹적이고도 거짓된 이야기들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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