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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 - 감정의 연대기 1929~1939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6월
평점 :

세계사에서 중요한 몇몇 장면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세계대전이다. 이 전쟁은 전인류에게 어느 정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결코 그 같은 일이 재발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줬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세계는 다시 평화를 지루하게 느꼈는지,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장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도 그렇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그렇다. 이들만큼 과격한 형태는 아니지만, 현재 북한에서 삼팔선 너머로 삐라를 날리고 있다. 예전 일이 아니라, 당장 오늘날의 얘기다.
그런데도 우리는 전쟁 얘기를 지겹게 느끼는 경향이 있다. 내가 꼭 전쟁 얘기에 항상 관심을 갖자는 뜻에서 하는 말은 아니다. 당장 나조차도 세계 각지의 전쟁 소식에 그리 귀 기울이는 편이 아니니까. 아마 당장의 우리가 평화에 익숙해진 것도 있고, 많은 경우 전쟁과 같은 역사담이 '이미 지난' 일처럼 비춰져서 그런 것 같다. 요컨대 우리는 중고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관해 배웠고, 거기서 배울만큼 배웠다. 거기서 더 이상 할 말이 남아 있을까.

플로리안 일리스가 쓴 『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도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상을 제시한다. 제목에 딸린 부제 '감정의 연대기 1929 ~1939'는 세계1차대전이 끝나고 터진 대공황, 나치즘, 그리고 제2차 세걔대전 발발의 위험이 도사리는 시기를 짚어낸다. 하지만 이 책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될 20세기 초반은 여타의 역서 서적들과 사뭇 다르다. 시작은 파리 고등사범학교, 시몬 드 보부아르와 장폴 사르트르의 눈맞춤이다. 이들은 익히 알려진 바대로 결혼을, 자세히 말해 계약 결혼을 맺게 될 테지만 당장은 아니다. 사르트르는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마침내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날, 그는 퇴짜를 맞았다. 시몬의 여동생 엘렌 드 보부아르의 말에 따르면, "키가 작고, 안경을 썼고, 아주 못생" 긴 그였기에.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뤄두자. 비슷한 시기로 추정되는 어느 늦은 오후. 시인 마샤 칼레코는 베를린 서부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그녀는 집에서 남편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지만 이곳 카페에서 다른 이들과 수다를 떨고 활력을 느끼는 게 즐겁다. 이들 중에 물론 남자도 섞여 있다. 남편은 그런 아내더러 뭐라 말하지 않으나 점차 과묵해질 따름이다.

유명 할리우드 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 토마스 만의 아들이자 동성애에 관한 소설을 쓴 클라우스 만, 복잡한 여성 편력의 소유자 파블로 피카소, 자신이 벌써 구세대가 되어간다고 느낀 시인 겸 의사 고트프리트 벤, 여행지마다 새 애인을 만든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 자기만의 미를 탐구한 화가 타마라 드 렘피카, 배우 역할로서 여성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고팠던 배우 브리기테 헬름, 망가져 버릴 대로 망가진 아내와의 관계를 문학에서라도 구제하고 싶었던 스콧 피츠제럴드...... 이 책에서 잠깐이든 여러 차례든 등장하는 인문의 이름만 나열해도 상당하다. 저자는 시인이나 소설가, 영화 감독, 배우, 사상가와 정치인 등 직업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그 시절에 활동한 유명 인사들의 삶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펼친다. 이들의 생활을 한 권의 책으로 모으기 위해 저자는 무려 394권의 책과 각종 자료를 참고했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옆에 작지 않은 메모지를 준비해야 했다.

실로 이 책은 단순히 쉽게 읽히지만은 않는다. 수많은 이름들이, 그것도 한국에서는 잘 소개되지 않은 시인 마샤 칼레코나 소설가 에리히 뮈잠, 언론인 겸 소설가 요제프 로트같은 인물들이 틈틈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의 생애를 들여다보는 게 오늘날 독자들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가? 오히려 우리는 수많은 이름들 속에서 삶의, 사랑의, 연애와 결혼관의 다양한 표본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직업도 성별도 달랐지만 사랑을 대하는 태도도 너무나 달랐다. 자유 연애와 기존의 결혼관이 충돌하면서 누구는 정말 자유로운 연애를 실현했다. 누구는 젊은 이들을 시샘하면서 멀찍이 바라만 봤고, 다른 누구는 복잡한 애인 관계로 곤혹을 치렀다. 누구는 사상 운동에 매진한 나머지 곁에 있던 사랑을 몰라봤고, 또 다른 누구는 자유 연애와 결혼 제도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했다.
오늘날 사랑은 지극히 자유로운 문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비혼주의를 외치던 친구가 사르트르처럼 어떤 이에게 첫눈에 반할 수 있고, 내 연인이 알고 보니 마를레네 디트리히처럼 다른 이성들과 히히덕덕 어울리는 걸 보고 화를 낼 수도 있다. 이성 간의 사랑이 아니라 동성 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에 관한 한, 시대를 타지 않고 변치 않는 가치가 있을 거라 우리는 기대하는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이 책을 읽은 게 아닐까?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될 사실 ― 이들의 사랑은 세계사에서 가장 굵직하다고 볼 수 있는 세계대전 사이에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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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받은 티저북은 책의 일부 내용만 담겨 있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이 어떤 결말을 마주할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사랑은 시대에 휩쓸리는가, 아니면 시대와 상관없이 제자리를 지키는가. 다가올 정식 출간 도서에서 이를 확인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