힉스 보손의 쓸모에 대한 질문은 어떨까? 힉스 보손은 우리가 아는 한 실용적인 의미는 전혀 없다. 그러나 전자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에도 전자가 뭐가 좋은지 아무도 몰랐다. 똑같은 일이 양자역학의 역사에도 일어났다. 현재 양자 역학은 반도체와 전자 산업에 결정적인 역활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 단계에서 힉스 보손의 실제적인 응용을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이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

.........

가속기 때문에 발전한 초전도 자석기술은 오늘날 의학과 산업적 응용에 이용된다. www도 여러 나라의 공동 연구자들 사이에 정보를 효율적으로 주고 받기 위해 CERN에서 개발되었다. 학생들과 대중을 고무시키는 수학적, 이론적 발전과 함께 공학과 기술의 진보는 사회의 진보를 돕는다.

 

과학자들은 정말로 새로운 입자를 발견했다. 이 입자는 우리에게 빈 공간의 힘에 관해서 말해준다...... 이 입자의 존재는 탁월한 공학 기술과 실험 기술이 없었다면 입증되지 못했을 것이다. 힉손 보손의 발견은 엄청나게 경이로운 일이다.  P61

 

프리드먼는 PC와 모바일 기기의 전세계 확산, 화상 회의, 이멜, 구글과 같은 검색 엔지과 언제 어디서든지 원격 개발이 가능한 소프트웨어등 언제 어디서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지적 작업, 지적 작업을 만들어낼 수 있는 플래폼의 형성이 세계를 평평하게 만들고 있다고 <세계는 평평하다>에서 주장하고 있다는데, 솔직히 나같은 일반인은 프리드먼의 통찰력에는 공감은 하면서도 현실적으론 그닥 피부에 와 닿지 않았는데,

 

둥그런 지구 반대편, 미국에 살고 있는 친구와 스마트폰 카톡으로 실시간으로 문자를 주고받으면 아, 이래서 세계는 평평하다고 하는구나를 실감한다. 아서 클라크의 제3의 법칙, 마술세계가 별건가~. 25년전 미국으로 유학 간 이 친구와 연락을 하기 위해선 전화나 한달정도 걸리는 항공우편 전부였는데, 요즘은 비용도 따로 들지 않는 카톡으로 실시간 문자를 주고 받으며 근황을 묻는 세상이 되었다. 90년대만에도 나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흔히들 첨단이란 말을 하지만 마술적인 기술의 진보를 상상도 하지 못했다.

 

둥그런 세계가 평평할 수 있게금 한, 기술혁명의 바탕에는 양자역학이 아니였으면 꿈도 못 꾸었을 터. 양자론은 금속이나 절연체, 반도체 같은 다양한 고체의 성질을 밝혀냄으로써 IT 사회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양자역학의 핵심을 광자에너지, 리사 랜들에 따르면, 고전 물리학에서는 힉스 보손이 광자와 상호 작용할 수 없지만, 양자역학에서는 양자 벅칙은 상호 작용을 허용한다고 한다. 힉스 보손 붕괴로 생긴 무거운 입자쌍이 소멸하면서 광자를 방출한다는 것이다. 

 

힉스라는 물질에 대해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힉스입자가 엄청난 에너지를 가질 수 있어 양자 역학과보다 더 차원이 높은 과학 기술의 혁명을 가져 올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미치오 카쿠가 말하는 불가능하다는 물리적 현상이 현실로 가능한 물질로, 혹은 진공에서도 무한한 에너지를 추출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싶다. 해리 포터의 투명 망토나 공간 이동이나 시간 이동이 가능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나라에서 힉스에 대한 최신 자료를 접할 수 있게 하는 사람들이 이강영, 김연중, 이민재같은 분들 덕택인데, 이강영씨같은 경우는 본인의 저서와 번역서가 활발하게 진행중이다. 이강영씨의 작품 < LHC>, 현대물리학의 최전선이란 부제답게 현재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물리학 이론들을 접할 수 있다. 

 

이강씨가 쓴 글에 의하면, 현대에는 이론물리학와 실험물리학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고 한다. 이론물리학자였던 아인슈타인같은 경우가 특이한 경우였다고. 물론 분리되어 있다고 해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론물리학자들이 내 놓은 이론을 실험물리학자들이 피 터지게 검증한다는 말. 리사 랜들도 그녀의 책에서 자신과 같은 이론물리학자와 힉스 보손의 충돌을 실험하는 실험학자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힉스 보손이 우리 우주의 탄생을 설명할 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핵심 입자일뿐만 아니라 미치오 가쿠가 말하는 21세기에 불가능한 세계가 미래에선 어느 정도 가능한 세계로 인도할 가능성이 있는 에너지이기에 힉스 보손에 관심을 갖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의 경우 몇 명의 물리학자가 저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이런 책들이 널리 읽혔으면 하는 바램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나 또한 저런 책을 통째로 다 읽지는 않는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꾸준히 천천히 부분부분 읽는다. 읽다보면 원저자나 번역자들의 학문적 열정과 호기심이 느껴지기도 하고, 무슨 무슨 발견 하나에도 가슴 벅차 오르는 동질감을 조금이나마 느끼곤 하는데, 실제 실험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힉스 보손이 발견되었을 때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성취했다는 그 기분은 어땠을까.

 

나는 흔히들 뉴스에 뜨는 힉스 보손의 발견으로 과거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우주 기원에 대한 궁금증보다 이제 미래의 모습,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게 될지 그게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리사 랜들의 말대로 힉스 보손은 과거를 알 수 있는 열쇠가 아니고 미래의 에너지가 될지 그건 모르는 일이다. 마이클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전자기장이 어떻게 사용될지, 양자역학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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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른과 요르단은 하이젠베르크의 천재성이 발현된 독창적인 성과를 행렬 미적분으로 재구성하면서 연구 결과를 작성하고 있었다. 이 작업을 거의 완성하기 직전에 리더퍼드가 보른에게 디랙이 쓴 출간 전 논문을 보내왔다. 보른은 이렇게 썼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그 논문은 과학적로서의 내 삶에서 가장 놀라운 것 중 하나였다. 디랙은 내가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고 젊은 사람이었는데도 모든 내용이 완벽하고 감탄스러웠다." 괴팅겐에서는 크나벤피지크, 즉 '청년 물리학'에 관해 수군대기 시작했다. 디랙과 요르단은 스물 둘이었고 하이젠베르크는 스물셋이었으며 파울리는 스물다섯이었다.

 

모든 수학자들은 수학이 젊은 사람들을 위한 학문임을 알고 있다. 예술이나 과학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는 수학에서 더욱 절실한 현실이다. 비교적 초라한 수준의 간단한 예를 들자면, 로열 소사이어티 회원의 평균 연령을 비교했을 때 수학자들이 가장 젊다. 휠씬 더 충격적인 예를 찾는 일도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학자중 세 손가락안에 꼽히는 한 인물의 이력을 살펴보자. 뉴턴은 50세에 수학을 포기했으며, 수학에 대한 열정을 잃은 것은 그보다 휠씬 이전이었다. 40세 무렵 그는 이미 자신의 창조적 두뇌가 유효 기간을 넘겼음을 깨달았다. 유율, 중력 법칙 등 그의 위대한 아이디어들은 1666년경에 밝혀진 것인데, 이때 그의 나이는 24세였다. 뉴턴은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그 무렵 나는 발명의 최절정기에 있었고, 그때만큼 수학과 철학에 몰두한 적이 없다."

 

갈루아는 21세에 요절했고, 아벨도 27세에 세상을 떠났다. 라마누잔은 33세에, 리만은 40세에 각각 사망했다. 물론 휠씬 나이가 든 후에 업적을 쌓은 이들도 있다. 가우스의 미분 기하학에 관한 연구 논문이 출간된 것은 그의 나이 50세 때였다.(물론 이 논문의 기본틀은 그보다 10년전에 잡힌 것이다).

 

내가 아는 한, 50세 이상의 수학자에 의해 중요한 수학적 진보가 이루어진 경우는 지금껏 단 한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유전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많은 혼란이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자의 비판이 옳은 것인가?

 

 " 제 생각에는 생화학자들은 철학자들이 유전자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제가 말했듯이, 과학의 있어서의 철학은 섹스에 있어서의 포로노그래피와 같습니다. 더 싸고 더 쉽고, 어떤 사람들은 더 좋아하기도 하죠. 하지만 생물학에서는 이처럼 더 많은 것을 알아낼수록 사정이 더 복잡해지는, 다소 철학적인 지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다분히, 이것저것 잔뜩 알아낸 다음 우리가 안다고 생각한 것의 예외들을 발견하고 있는 입장입니다.p26

 

철학은 대체로 쓸모가 없지만, 약간의 흥미로운 과학철학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과학이란 어떤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칼 포퍼의 견해를 좋아합니다. 만일 롤렉스시계를 차고 있는 네안데르탈인을 발견하다면, 저는 진화론을 포기할 겁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증거는 나타난 적이 없지요. p31

 

잘은 모르겠지만 양자역학에 대해 읽으면 읽을수록,  포스트모던이나 해체주의철학의 베이스는  양자역학이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모든 장르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넘나들며, 본질 혹은 사물의 불정확성과 같은 개념은 양자역학의 주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철학에 대해 잘 모르는 나이기에 섣불리 단정짓기는 뭣하지만, 여튼 양자역학이 현대 과학기술의 기초였을뿐만 아니라, 현대 철학이나 문학 사조의 디딤대 역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현대 철학이나 문학 사조가 과학에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고 과학이 현대 철학이나 사조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터무니 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읽어본 바로는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면, 20세기 들어서 과학이든 철학이든 인문학이든 어떤 쟝르를 불문하고 학문이라는 미명하의 인간 정신 활동은 서로 연관되어 있어 서로 영역을 침범하며 카테고리란 범주의 경계를 허물어 뜨리며 각자 학문의 폭을 넓혀나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래서 어느 학문이든 오늘날의 지식체계를 쌓아 올린 업적은 우월을 가릴 수 없이 비등하다. 흔히 우리가 이분법적으로 보는 인문학/과학이라는 라이벌 관계는 서로 우르렁거리거나 무관심한 채 각각 독립적인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학자들에 의해 서로의 영향력을 인정하며 통합쪽으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한때 나는 인문학과 과학기술은 서로 뒷받침없이 독립적인 관계일 뿐이라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더랬다. 하지만 과학책을 읽어가면 읽을수록 나의 그러한 생각이 오류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나라같이 과학교육이 후져도 너무 후진 나라에서 과학보다 인문학을 우선시하고 중요시하는 사회 분위기는 뭔가 잘 못 되어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래 물론 안다. 인문학을 소리 높여 외치는 이유를, 그 뒷 배경에는 인문학의 위기가 있고 인문학을 배워봤자 돈이 최고인 자본주의 사회에 나가면 아무짝에도 쓰잘데기 없다는 인식이 강하다보니, 현재 인문학이란 학문이 허세 가득한 지적 말놀음에 너덜해질대로 너덜해져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오죽하면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존스 또한 철학은 약간 쓸모가 있고 포로노그라피와 같다는 말을 서슴치 않고 말할까. 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이론과학자들이 현대철학을  폄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오늘 날 철학(혹은 인문학)의 위상이 잘 드러나 있다. 사유의 장난인지 언어의 희롱인 것처럼 읽혀지는 글들이 나열되어 있는 인문학(철학)책을 접하고 나서 그런 오류의 뿌리가 생겨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문학이 바로 나아가야할 길은 지적인 말놀음의 언어의 향연이 아니라 사물의 대상이나 본질 혹은 근원적인 것에 대한 논리적인 사유 체계를 정립하도록 하는 것이다. 과거의 위대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과학자들의 아이디어가 단순히 머리에서 번뜩하며 생겨난 것일까? 아니다. 사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인문학적 기틀에서 사고하고 아이디어를 탄생시키고 다듬었다.  과학적 아이디어는 인문학적 베이스가 없다면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없는 사유체계를 요구한다. 왜? 어떻게? 무엇을?같은 의문이나 호기심은 여러 각도로 아이디어를 검토하고 정립하고 체계화한다. 학문이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며 그 와중에 창의적인 생각과 아이디어를 길러내는 작업이며 인문학은 그 아이디어나 창의적인 사고를 끝까지 끌고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구력같은 학문이기 때문이다.

 

<얽힘의 시대>는 오늘날의 현대 과학 기술을 만들어 낸 양자역학을 창조한 과학자들을 조명한 책이다. 양자역학을 이끈 하이젠베르크, 보어, 아인슈타인, 디랙같은 천재 물리학자들의 과학적인 아이디어는 인문학이나 철학의 사유체계와 흡사하며, 그들이 헤겔이나 칸트와 같은 철학을 10대 시절에 배우지 않았더라면, 자신들이 만들어낸 양자역학의 아이디어나 방정식은 사유하는 법을 요구하고 과학적 사유체계는 인문학적 베이스가 어느 정도 깔려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과학적 사유의 인문학적 베이스는 창의력과 영감이 한창인 젊은 나이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한 순간의 아이디어로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아이디어를 체계화, 강화시켜 준다고 본다. 수학자 하디가 말했듯이, 노년의 과학적 아이디어는 쓸모가 없다. 세상을 바꾼 과학 이론은 과학자들이 젊은 시절, 끓어오르는 혈기에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를 세상을 뒤흔드는 이론으로 탈바꿈 시켰다. 우리식으로 젊은 게 뭘 알겠어? 가 아닌, 20대나 30대 시절의 더오른 아이디어가 인문학적 베이스의 사유체계를 더해서 더 깊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과학적 아이디어의 인문학적 사유 체계의 도입이 아니라, 우리의 과학교육이 아니 초중고 교육이 인문학적인, 과학적인 교육이 전혀 안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무수히 많은 지식을 주입해 봤자, 그 지식을 사유하지 않은 아이디어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사실을, 과학적 아이디어나 인문학적 발상이든 사유체계가 형성되지 않는 현 교육에서 정말 뛰어난 영재도 평범한 일반인으로 역변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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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수필 어딘가에 이런 글이 있다. 자신은 태어나서 한번도 투표를 하지 않았다고. 일본 세습 정치에 대한 환멸을, 그는 정치적 기권으로 강경하게 표현했지만, 겉멋만 잔뜩 들었던 나는 그 말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하루키의 한숨 섞인 그런 글은 왠지 자국의 정치에 대한 환멸을, 세계적인 작가의 좀 있어 보이는(깨어 있는) 정치적 의식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그런 글을 읽고 일본 정치와 도끼니 개끼니 수준인 우리 정치에 반감을 느껴 몇 번인가 투표권을 행사 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다 그의 그런 정치적 기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건 미드 <콜드 케이스>에서 여성참정권에 대한 에피소드를 보고 난 이 후였다. 몇 시즌의 에피소드인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하루키의 영향을 받고 몇 번인가 투표장에 가지 않았던 그 참정권 때문에, 100 여년전에 미국의 수 많은 여성들은  유권자인 남성으로부터 그리고 같은 성의 순종적인 여성으로부터 위협과 조롱 그리고 살해위협 속에서 참정권이라는 정치적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인다. 드라마 특유의 과장이 없던 것은 아니겠지만, 참정권을 얻기 위한 투쟁이 그렇게 녹록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누군가는 참정권을 위한 모임에 나간다는 이유만으로 남편으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루키의 투표권 포기가 멋지다는 이유만으로 투표권 행사를 포기한 나로서는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도 그 때 그 에피소드를 보면서 느꼈던 순간적인 기억을 나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으로 기억한다. 얼마나 나는 어리석었던가.  

당대의 아동문학평론가들에게 스타일이 후졌다는 이유만으로 평가절하 되었던 아동문학가가 있었다. 바로 그 유명한 <오즈의 마법사>의 작가 프랭크 바움. 그의 문학적 상상력을 인정한 것은 디즈니였으며 레이 브레드버리의 단편 <Exile> 정도로 그의 초기 문학적 평가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만큼은 아니었다고 한다.  

아들만 셋을 둔 프랭크 바움은 열혈한 공화당원이었으며 또한 한 때 적극적인 여성운동가였다. 여성 참정권 운동을 위해 그는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역신문의 여성 신장운동과 평등권 문제, 참정권리에 대한 여성운동가들과의 연대, 여성참정권을 반대하는 여성들과의 호전적인 싸움등. 그리고 마침내 그는 도로시라는 소녀를 여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물론 저 평전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는 언제나 낭비벽이 심해 돈에 쪼달렸고 오즈의 마법사도 돈때문에 시리즈가 계속해서 나왔다). 저널로 시작한 글쓰기였기에 그의 글 스타일은 사무적이었지만, 그의 문학적 판타지만은 미국을 사로 잡기에 충분했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이 여자 아이었다는 것이 과연 그의 여성참정권 운동과 연결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바움과 같은 남성작가들도 여성참정권 운동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오랜 기간 참정권을 얻기 위해 애쓴 것에 비하면,  여성이 정치적 권리를 부여 받아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목적을 드러낸 것은 실로 얼마 되지 않는다. 미국은 1920년, 영국은 1928년 그리고 프랑스는 1946년에 이르서야  여성의 참정권을 획득하였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세기가 2010년, 여성 참정권 시작의 역사가 100년이 되기 위해서는 20년을 더 기다려야만 한다

올해로 정확히 여성의 참정권을 획득한지 80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80년동안 많은 일들이 있어왔을 것이다. 20세기를 뒤흔들었던 것은 세계를 양분화했던 이데올로기나 과학의 발달뿐만 아니다. 여성의 의식 또한 급진적으로 변했다. 여자가 남자들에게 순종하거나 사랑받기 위해 목 매달았던 호시절이 사라져 버린 것(아, 그것에 비해 우리나라 걸구룹의 Oh!는 얼마나 오그라드는 순종적인 표현인지). 이러한 배경에는 수 많은 글로리아 스타이넘같은 여성운동가들, 수잔 손탁같은 뛰어난 여성비평가들, 그리고 일반적인 개념을 뛰어 넘은 애니 리버비츠같은 이미지 사진작가들의 활약을 무시 못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성적인 여성들 저 너머에 있는 팝의 여제 마돈나의 등장이야말로 여성의 순종적인 이미지를 확 벗어버리고, 끊임없이 뮤비를 통해 남성을 지배하려는 이미지를 대중화 확산이야말로 20세기 후반의 여성운동의 결정체일 것이다.   

나는 최근에 나온 미국에서 한참 말많았다고 하는 레이디 가가의 뮤비 <Alejandro>를 보면서 과연, 19세기에, 20세기 초반 참정권을 위해 열심히 운동했던 수 많은 여성들이 레이디 가가의 뮤비를 지금 보았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사회적 억압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코르셋에 꼭 낀 옷을 입어야만 했던 그 여성들이 지금 현재, 저 레이디 가가의 남성을 지배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레이디 가가를 찬양할지어다.   

   

뮤비가 너무 야하고 신성모독이여서 18禁,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절대 권하고 싶지 않다.프랑스 영화 <델리카트슨> 세팅 분위기에 마돈나의 Like a prayer와 Express yourself 의 뮤비를 섞어 놓은 것 같다. 이래나 저래나 레이디 가가는 명백한 마돈나의 후예일 수 밖에 없으려나. 3분 51초 베드씬 민망하지만 상당히 고급스러움. 클레인 사람 뭐 하는 양반이길래, 어떻게 저런 라인을 찍을 수 있을까 싶었다. 현재 유투브 조회 49,758,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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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이 참 괜찮은 음악일 수 있다는 것을 요즘 아들애하고 들으면서 알았다. 락이나 팝세대인 난  80년대 후반에 새로운 음악쟝르로 등장한 랩음악에 익숙하지 않아 좀처럼 내 귀를 끼여맞추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더 이상 음악을 듣지 않았다.  

루헤인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가 은근슬쩍 등장인물들을 통해 내뱉는 말, 랩은 쓰레기 음악이나 마찬가지야라는 말에 수긍하고 동감했는데, 요즘 음악의 주류가 랩이다보니 그런대로 귀에 익기 시작한다. 하기사 이제 랩역사가 근 20년이다. 익숙할 만도 하지 않겠니. 여하튼 뭐 새롭게 랩음악을 들으면서 영어야 운율적이라서 랩이 잘 어울리지만 우리 나라말은 (번역도 그런 문제제기를 많이 하지만) 랩이 참 안 어울리는 산문 언어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또 그러한 내 편견이 글러먹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21이나 브아걸의 파워풀한 걸의 랩이 맘에 들고 아웃사이더는 내 생각을 비웃듯 피에로의 눈물 전체를 랩으로 올렸다.  

은근 괜찮다. 아니 걍 괜찮다라고 해야하나. 이거야 말로 편견타파가 아니고 뭐냐! 우리 나라 노래도 이제 랩이 잘 어울린다고 하고 싶어진다. 영어처럼 리듬미컬하기 보다는 약간 껄끄럽긴 하지만 아웃사이더의 노력에 경의를.... 그래도 가사 참조는 필수 하하하.

옛날 꽤나 아주 먼 옛날 옛적이야기
시골 조그만 마을
눈물이 없는 처녀가 살고있었지
가난했지만 항상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아름다웠고 옆나라에 수많은
부자들과 남자들이 끝없이 청혼을했지만
모두가 거절을 당했고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사람은 가난하지만 성실한 청년 피에로
어느 날 그가 찾아와서 청혼을 했어
그녀는 승낙을했고
그 뒤로 그 뒤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데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바늘에 손이 찔렷어
한번도 울지않았던 아내가 눈물을 흘렸어
그런데 다르게 눈물이 다이아몬드로 변해버렸어
어 그래
믿기지 않은 상황
그때부터 피에론 아내를 때렷어
다이아몬드를 얻었고
흥청망청 다이아몬드를 다 써버렸지
그리곤 다이아몬드가 다 떨어지면
집으로 돌아와 아내를 때렸어
그녀의 가슴에 상처를 새겼어 
두눈 가에 핏물이 흘러와
웃음을 짓거나 춤추네 내 맘 안에
나도 몰래 새겼던 상처가 이렇게 번져가
애타게 너를 찾는데
그렇게 한달이지나 두달이지나 몇년이 흘럿어
다 써버린 다이아몬드를 가지로
집으로 돌아온 날도 술에 취해
아내를 불럿어
그손에 쥔 새빨간 다이아몬드를 보고는
피에론 깜짝 놀랏지
아내의 손에서 빛나는 커다란 다이아몬드에
마냥 기분이 좋앗지
뜨겁게 사랑했던 자신의 피보다 새빨간
그 다이아몬드의 의미를 몰랏지
굳센 사내를 위한 아내의 마지막선물
그리곤 그녀는 목숨을 끊엇지
빨갛게 물드는 양탄자는
활활 타오르던 두 사람의 사랑보다
진하게 바닥을 수놓았어
목놓아서 울어봤자 그녀를 영원히 볼수없어
피에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앗지만 이미늦엇어
그녀는 떠나갓어
그 뒤로 피에론 자신의 얼굴에
분장을할때 눈물을 그려넣고는
미친듯이 웃었어
슬픔을 잊으려 애써 춤을춰봐도
불타는 지나간 사랑의 후회만큼
미소만큼 더
두눈 가에 핏물이 흘러와
웃음을 짓거나 춤추네 내 맘 안에
나도 몰래 새겼던 상처가 이렇게 번져가
애타게 너를 찾는데
(왜그랫을까 그땐 왜그랫을까)
(대체 왜그랫을까 나는 왜그랫을까)
돌이킬수 없다는걸 알아
이미 지나간 시간을 붙잡을수 없다는걸 알아
떠나간 그녀를 추억하면 그냥살아
꿈에서 그녀가 만약 살아 돌아온다면
두번다시는 너를 놓지 않을께
다짐햇지 텅빈 집안 구석 너의 향기로 가득한데
아득해져만 가는 너의 아름다운 미소
다투기도 햇지 눈물에 감추기도 햇지
두눈을 마주친채 바보같이
밤새도록 바라보기만 햇지
왜 그랫을까 그땐 왜그랫을까
가진것 없어도 난 너만 있으면 행복햇는데
대체 왜그랫을까 나는 왜변햇을까
영원히 변치않을꺼라는 약속 계속햇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게는 말도못하고
얼마나 많이 아파햇을까 아무런 힘도없는
그녀를 때리며 웃고있던 나를 영원히 저주할께
용서 하지마 나 제발 부탁할께 눈물흘리지마
두눈 가에 핏물이 흘러와
웃음을 짓거나 춤추네 내 맘 안에
나도 몰래 새겼던 상처가 이렇게 번져가
애타게 너를 찾는데 
두눈 가에 핏물이 흘러와
웃음을 짓거나 춤추네 내 맘 안에
나도 몰래 새겼던 상처가 이렇게 번져가
애타게 너를 찾는데

내가 랩에 관심을 안 가질래야 안 가질 수 없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딸애가 이 책 읽어달라고 가져와 읽어 주고 있는데 옆에서 가만히 듣던 우리 아들이 엄마, 나 이거 랩으로 할 수 있을 거 같아! 이러면서 수줍많은 녀석이 정말로 으로 이 글을 읽었다능~~~
두 놈이 나보고도 랩스탈로 읽어보라고 하는데, 도저히 못 하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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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화욜에 아들애친구 엄마랑 영화 <블랙>이란 영화 보러 갔다가 <트루어글리>라는 광고 할 때 흐르던 음악. 사실 난 개인적으로 힙합음악 좋아하지 않지만 그날은 영화 광고보면서 귀에 쏙쏙 들어오더라는. 아니 이게 뭔일이래!  

내 MP3가 망가지는 바람에 아들애 MP3로 음악 담아 들으며 동네에서 운동하는데, 아들애가 담은 음악들은 그냥 스킵. 빅뱅, 소녀시대, 카라 등등 아들애가 선택한 음악은 t감각적으로 신나고 들썩거리기는 하는데 들을 만한 거 하나 없었다. 아들애세대가 힙합세대라 그런가. 하여튼 진짜 세대차 나는구나, 하며 대신 내가 들을 음악 담아서 놓고 운동하면서 듣는데, 이 노래는 괜시리 신나더라는.  

아들애한테 <heartbreaker> 대신 이 음악 들려주었더니 빅뱅의 노래인줄 알더라는. 근데 왠일이라니, 이 음악은 소스 제공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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