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른과 요르단은 하이젠베르크의 천재성이 발현된 독창적인 성과를 행렬 미적분으로 재구성하면서 연구 결과를 작성하고 있었다. 이 작업을 거의 완성하기 직전에 리더퍼드가 보른에게 디랙이 쓴 출간 전 논문을 보내왔다. 보른은 이렇게 썼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그 논문은 과학적로서의 내 삶에서 가장 놀라운 것 중 하나였다. 디랙은 내가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고 젊은 사람이었는데도 모든 내용이 완벽하고 감탄스러웠다." 괴팅겐에서는 크나벤피지크, 즉 '청년 물리학'에 관해 수군대기 시작했다. 디랙과 요르단은 스물 둘이었고 하이젠베르크는 스물셋이었으며 파울리는 스물다섯이었다.

 

모든 수학자들은 수학이 젊은 사람들을 위한 학문임을 알고 있다. 예술이나 과학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는 수학에서 더욱 절실한 현실이다. 비교적 초라한 수준의 간단한 예를 들자면, 로열 소사이어티 회원의 평균 연령을 비교했을 때 수학자들이 가장 젊다. 휠씬 더 충격적인 예를 찾는 일도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학자중 세 손가락안에 꼽히는 한 인물의 이력을 살펴보자. 뉴턴은 50세에 수학을 포기했으며, 수학에 대한 열정을 잃은 것은 그보다 휠씬 이전이었다. 40세 무렵 그는 이미 자신의 창조적 두뇌가 유효 기간을 넘겼음을 깨달았다. 유율, 중력 법칙 등 그의 위대한 아이디어들은 1666년경에 밝혀진 것인데, 이때 그의 나이는 24세였다. 뉴턴은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그 무렵 나는 발명의 최절정기에 있었고, 그때만큼 수학과 철학에 몰두한 적이 없다."

 

갈루아는 21세에 요절했고, 아벨도 27세에 세상을 떠났다. 라마누잔은 33세에, 리만은 40세에 각각 사망했다. 물론 휠씬 나이가 든 후에 업적을 쌓은 이들도 있다. 가우스의 미분 기하학에 관한 연구 논문이 출간된 것은 그의 나이 50세 때였다.(물론 이 논문의 기본틀은 그보다 10년전에 잡힌 것이다).

 

내가 아는 한, 50세 이상의 수학자에 의해 중요한 수학적 진보가 이루어진 경우는 지금껏 단 한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유전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많은 혼란이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자의 비판이 옳은 것인가?

 

 " 제 생각에는 생화학자들은 철학자들이 유전자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제가 말했듯이, 과학의 있어서의 철학은 섹스에 있어서의 포로노그래피와 같습니다. 더 싸고 더 쉽고, 어떤 사람들은 더 좋아하기도 하죠. 하지만 생물학에서는 이처럼 더 많은 것을 알아낼수록 사정이 더 복잡해지는, 다소 철학적인 지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다분히, 이것저것 잔뜩 알아낸 다음 우리가 안다고 생각한 것의 예외들을 발견하고 있는 입장입니다.p26

 

철학은 대체로 쓸모가 없지만, 약간의 흥미로운 과학철학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과학이란 어떤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칼 포퍼의 견해를 좋아합니다. 만일 롤렉스시계를 차고 있는 네안데르탈인을 발견하다면, 저는 진화론을 포기할 겁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증거는 나타난 적이 없지요. p31

 

잘은 모르겠지만 양자역학에 대해 읽으면 읽을수록,  포스트모던이나 해체주의철학의 베이스는  양자역학이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모든 장르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넘나들며, 본질 혹은 사물의 불정확성과 같은 개념은 양자역학의 주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철학에 대해 잘 모르는 나이기에 섣불리 단정짓기는 뭣하지만, 여튼 양자역학이 현대 과학기술의 기초였을뿐만 아니라, 현대 철학이나 문학 사조의 디딤대 역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현대 철학이나 문학 사조가 과학에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고 과학이 현대 철학이나 사조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터무니 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읽어본 바로는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면, 20세기 들어서 과학이든 철학이든 인문학이든 어떤 쟝르를 불문하고 학문이라는 미명하의 인간 정신 활동은 서로 연관되어 있어 서로 영역을 침범하며 카테고리란 범주의 경계를 허물어 뜨리며 각자 학문의 폭을 넓혀나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래서 어느 학문이든 오늘날의 지식체계를 쌓아 올린 업적은 우월을 가릴 수 없이 비등하다. 흔히 우리가 이분법적으로 보는 인문학/과학이라는 라이벌 관계는 서로 우르렁거리거나 무관심한 채 각각 독립적인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학자들에 의해 서로의 영향력을 인정하며 통합쪽으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한때 나는 인문학과 과학기술은 서로 뒷받침없이 독립적인 관계일 뿐이라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더랬다. 하지만 과학책을 읽어가면 읽을수록 나의 그러한 생각이 오류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나라같이 과학교육이 후져도 너무 후진 나라에서 과학보다 인문학을 우선시하고 중요시하는 사회 분위기는 뭔가 잘 못 되어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래 물론 안다. 인문학을 소리 높여 외치는 이유를, 그 뒷 배경에는 인문학의 위기가 있고 인문학을 배워봤자 돈이 최고인 자본주의 사회에 나가면 아무짝에도 쓰잘데기 없다는 인식이 강하다보니, 현재 인문학이란 학문이 허세 가득한 지적 말놀음에 너덜해질대로 너덜해져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오죽하면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존스 또한 철학은 약간 쓸모가 있고 포로노그라피와 같다는 말을 서슴치 않고 말할까. 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이론과학자들이 현대철학을  폄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오늘 날 철학(혹은 인문학)의 위상이 잘 드러나 있다. 사유의 장난인지 언어의 희롱인 것처럼 읽혀지는 글들이 나열되어 있는 인문학(철학)책을 접하고 나서 그런 오류의 뿌리가 생겨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문학이 바로 나아가야할 길은 지적인 말놀음의 언어의 향연이 아니라 사물의 대상이나 본질 혹은 근원적인 것에 대한 논리적인 사유 체계를 정립하도록 하는 것이다. 과거의 위대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과학자들의 아이디어가 단순히 머리에서 번뜩하며 생겨난 것일까? 아니다. 사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인문학적 기틀에서 사고하고 아이디어를 탄생시키고 다듬었다.  과학적 아이디어는 인문학적 베이스가 없다면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없는 사유체계를 요구한다. 왜? 어떻게? 무엇을?같은 의문이나 호기심은 여러 각도로 아이디어를 검토하고 정립하고 체계화한다. 학문이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며 그 와중에 창의적인 생각과 아이디어를 길러내는 작업이며 인문학은 그 아이디어나 창의적인 사고를 끝까지 끌고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구력같은 학문이기 때문이다.

 

<얽힘의 시대>는 오늘날의 현대 과학 기술을 만들어 낸 양자역학을 창조한 과학자들을 조명한 책이다. 양자역학을 이끈 하이젠베르크, 보어, 아인슈타인, 디랙같은 천재 물리학자들의 과학적인 아이디어는 인문학이나 철학의 사유체계와 흡사하며, 그들이 헤겔이나 칸트와 같은 철학을 10대 시절에 배우지 않았더라면, 자신들이 만들어낸 양자역학의 아이디어나 방정식은 사유하는 법을 요구하고 과학적 사유체계는 인문학적 베이스가 어느 정도 깔려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과학적 사유의 인문학적 베이스는 창의력과 영감이 한창인 젊은 나이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한 순간의 아이디어로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아이디어를 체계화, 강화시켜 준다고 본다. 수학자 하디가 말했듯이, 노년의 과학적 아이디어는 쓸모가 없다. 세상을 바꾼 과학 이론은 과학자들이 젊은 시절, 끓어오르는 혈기에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를 세상을 뒤흔드는 이론으로 탈바꿈 시켰다. 우리식으로 젊은 게 뭘 알겠어? 가 아닌, 20대나 30대 시절의 더오른 아이디어가 인문학적 베이스의 사유체계를 더해서 더 깊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과학적 아이디어의 인문학적 사유 체계의 도입이 아니라, 우리의 과학교육이 아니 초중고 교육이 인문학적인, 과학적인 교육이 전혀 안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무수히 많은 지식을 주입해 봤자, 그 지식을 사유하지 않은 아이디어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사실을, 과학적 아이디어나 인문학적 발상이든 사유체계가 형성되지 않는 현 교육에서 정말 뛰어난 영재도 평범한 일반인으로 역변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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