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의 반란
유전적인 요인을 제외하고, 부모에게는 자식의 인격,지능 또는 자식이 가정 밖에서 행동하는 방식을 형성할 힘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한가?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이 주장은 잘못된 것인가? 환경적인 요인을 통해 자녀에게 영향를 행사할 수 있는 부모의 힘이 제로하고 말한다면, 과연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
고백한다. 내가 10년전에 처음으로 이 안을 제시했을때, 나 자신도 그것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나는 과학적 명료함을 위해 극단적인 입장-부모 영향력 제로의 가설-을 취했다. 나 자신을 표적으로 삼으면서, 나를 무너뜨려 보라며 지도급 인사들-학계의 연구 심리학자들-을 초대했다. 그들의 이론과 주장은 나를 짓밟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곤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내 생각은 육아의 효과가 전혀 없다는 것이 분명했지만, 내가 궁극적으로 인정해야할 적당한 효과가 받으시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한 발달심리학자는 최근에 "부모가 자기 자식을 형성한다"는 증거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충분히 오랫동안 연구를 계속하면 결국 그 증거를 찾아낼 것이라며 여전히 확신을 잃지 않았다.......
좋은 관계는 한 사람의 중심목표가 다른 사람의 인격을 바꾸는 것이 되는 관계가 아니다.
정말 위험한 -아마 더 좋은 말은 비극적인- 것은 전권을 쥐고 있고, 따라서 모든 책임을 져야하는 부모에 대한 지도급 인사들의 생각, 즉 유전적인 요인을 제외하고, 부모에게는 자식의 인격, 지능 또는 자식이 가정 밖에서 행동하는 방식을 형성할 힘이 전혀 없다는 나의 주장에 반하는 생각이다. p310-312
몇 년 전에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이 글을 읽었을 때만 해도, 자식에게 부모가 아무 쓸모 없는 존재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개떡같은 소리야! 라며 격렬하게 부정했었다. 하지만 몇 권의 어쭙잡은 과학책들을 섭렵하고 난 이후(양육서가 아니다), 나는 이 글의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주장에 어느 정도 끄덕거릴 정도가 되었다. 아니 사실 제로까지는 아니여도 부모가 자식의 삶 혹은 교육에 전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당장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부터 당신이 부모로부터 얼마만큼의 영향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라. 책을 좋아하는 당신, 당신의 부모는 당신만큼이나 책을 좋아하는가? 혹 당신이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당신의 당신의 자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가? 아니면 바람 피는 부모를 둔 자식이 부모가 되었을 때 바람피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100% 부모로부터 영향를 받아 폭력을 행사하거나 바람을 필까? 나와 부모는 모든 것(생각, 인격, 신체)이 똑같을까?
실제 주변을 둘러보면 부모와 자식간에 많은 부분 틀린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같은 환경에 살고 있기에 비슷하다고 느끼고 있을 뿐이다. 아니면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비슷한 척 할뿐이고. 부모와 자식은 하나가 아니고 각각 다른 하나이다. 매를 맞고 자란 아이가 성장하여 다정한 남편이 될 수 있고 바람 피는 부모밑에서 자란 아이가 자기 식구라면 끔찍하게 아끼고 사족을 못쓰는,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 되는 것을 목격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인간이 그 어떤 동물보다 집단적(혹은 사회적) 동물이지만 또한 한명 한명이 다른 개별적인 동물이라고 본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서만큼은 그 어떤 결정론으로 진단할 수 없는 예외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어떤 한가지 환경적인 요인이 한 사람의 인격을 설명할 수 있는 전체적인 요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수십명을 죽인 케빈이 괴물이 된 것이 모성애의 부족일까? 우리가 깜박 속고 있는 것은 엄마라면 당연히 모성애를 발휘한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증명되지 않는 어떤 명제가 사회구성원간에 확고한 결정론이 되었는지 왜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부모에게(한 양육자에게) 사랑받으면 성장하면 괴물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마쓰모토 세이초의 논픽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세이초는 세편의 논픽션을 썼는데, 그 중 마지막 논픽션 <어둠속을 내 달리는 엽총>은 하루밤 사이에 마을 사람 삼십명을 죽인 무쓰오에 대한 기록(괴물의 탄생)이있다. 세이초가 묘사한 무쓰오의 가정환경은 불우하긴 하지만, 한 명의 양육자(부모가 없어 할머니가 키움)에게 많은 애정을 받고 자랐고 소학교를 다니는 내내 성적이 상위권이어서 동네 여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어느 순간 마을을 총성과 외침으로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자신를 헐뜯고 비웃는 마을 사람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외지에 나가 총을 사고 총탄을 모아 마을 사람들을 죽인 것이다. 그 과정이 계획적이고 치밀해서 그가 한순간에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것을 논픽션을 읽으면 알 수 있다. 무쓰오의 경우는 케빈과 어떻게 다른가. 케빈의 살인 동기가 양육자에게 애정을 못 받았다고 치면, 할머니에게 떠받들며 자란 무쓰오가 하룻밤 사이에 삼십명을 죽일 수 있는 괴물이 될 수 있는 요인이 무엇이었을까? 케빈과 무쓰오, 같은 결과를 만든 괴물이지만, 상반된 환경에서 자라난 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나의 친정엄마는 자식들에게 사랑을 주는 분이 아니셨다. 성장기의 자식들에게 애정을 충분히 주지 않았던 이유로 먹고 사는 것이 시급했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지금도 손주들을 알뜰하게 살피는 그런 분은 아니시다. 어찌나 차가우신지 손주들이 잘 가지 않을 정도로 할머니와 손주들 사이가 덤덤하다. 친정엄마는 천성적으로 자식을 학대는 하지 않았지만 무한 애정을 주시는 분이 절대 아니였다. 그럼 우리 자식들이 괴물이 되었어야할까? 자식들 그 누구도 괴물은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 새끼들이라면 끔찍하게 위하는 사람들이 되어 있다. 그래서 나와 친정엄마의 관계는 내가 더 많은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는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우리 엄마는 무한 애정을 주는 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식이 잘 되길 바라는, 단지 애정부족 코드가 새겨져 있는 분이시구나라고 말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환경적인 요인이 중요하지만, 100% 그 요인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똑같은 상황에서 성장해도 그 환경을 극복하는 사람들이 있고 부모와 정반대의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으니깐. 어떤 유전자가 성장하면서 스위치가 켜질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은 부모와 자식을 다른 존재로 봐야하는 개별적인 존재들 인 것이다.
인간 행동의 패턴을 데이타해서 집단화하여 결정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심지어 부모와 자식 사이라도 말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람의 안에 있는 유전적인 요인과 어떤 환경이 맞아, 스위치가 켜질때 괴물이 되는 것은 아닐까. 이 말은 역으로 천재성도 발휘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좋은 환경이든 나쁜 환경이든 유전자에 전적으로 미치는 것은 어떤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다만 좋은 환경이 반드시 대물림 되지 않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인슈타인이나 파인만같은 천재도 대를 이어 천재자식이 탄생되는 게 아니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