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슬 밥하고 낙지볶음이나 해서 먹으려고 준비하는 중간에 컴을 켜고 기사 검색하다가, 큼직하게 뜬 이윤기 별세. 첨엔 무슨 말인지....이윤기라는 탤렌트가 누구지 , 중견 탤렌트인가 싶어 머리를 굴리며 클릭했다. 클릭한 순간 너무나 낯익은 번역가 이윤기 선생님의 얼굴. 가슴이 쿵 내려 앉는다. 향년 63세. 순간적으로 그럴 나이가 아닌데..아닌데..하는 말만 되네였다. 평소 지병이 있으셨던 것도 아닌데. 심장마비라고 했다. 아직도 20년은 더 살으셔야 할 분이 왜 운명을 달리하셨는지. 아직도 번역할 글이 산더미일텐데. 가까운 누군가를 잃은 것처럼 휑하다. 이윤기 선생님의 작품이 비록 오역이 있을지 몰라도 나는 그래도 선생님이야말로 최초의 스타 번역가이며 안정효 선생님과 함께 우리 번역문학 1세대임을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실제 나는 어느 정도 번역의 오역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완벽한 번역글은 없다고 생각한다. 작품 전체가 오역이라면 문제가 있지만 부분 부분의 오역은 어쩔 수 없는, 문화적 차이에서 사고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기에 인정한다. 오히려 작품을 이 땅위에 출산시켜 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다.
이윤기 선생님은 소설가로 문단에서 기억되길 원했던 것으로 안다. 그가 햐얀 헬리콤터라는 작품으로 문단에 등단했지만 소설로는 먹고 살기 힘들었기에 번역을 오로지 번역에 매달렸다. 번역가로서의 그의 경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번역일에 올인하면서 꾸준히 번역 작품이 나왔고 특히나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예상외로 크게 히트치면서 그는 신화적인 번역가가 되었다. 그 때 문예지마다 일간지마다 선생님의 번역에 대해 경외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그 땐 우리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문예지를 열심히 탐독했던 시절이라, 확실히 기억한다. 그 때 그러니깐 80년대 후반 아니면 90년대 초반 <장미의 이름>이 출간 후, 선생님은 초짜번역가의 존재가 아닌 이제 신화적인 번역가가 되었다. 번역가로서의 인지도가 높아지자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이 소설가로서 자신의 본연의 업무였다. 문예지마다 그의 글이 실렸다. 하지만 그는 소설가로서의 명성보다 번역가 이윤기라는 명성을 앞지를 수가 없었다. <전작주의자의 꿈>은 이윤기 선생님의 작품 그게 소설이든 번역작품이든 간에 그의 이름이 들어간 작품이라는 모든지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조희봉씨가 선생님에게 바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이윤기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작품을 수집하는 사람이 있어 자신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다고 이문열의 작품은 분서 당하지 않았느냐면서 조희봉씨에게 감동했던 것으로 안다. 행복한 기억과 추억으로 남으시길.
63세라는 너무나 안타까운 연세로 세상을 뜨신 이윤기 선생님께서 뿌리신 번역 문학에 감사하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