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 미국 문학의 대가로 추앙받는 마크 트웨인은, 소설가로서의 필력을 펼치기 전에는 지방신문의 신문기자로 일했다. 신문 기자 경력이 후에 소설가로서의 그의 문학적 토대에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끼쳤는지, 잘 모르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진실된 기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소설속 주인공 톰이나 허클 핀처럼 허풍쟁이였다.
신문기자 시절, 그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꾸며 기사를 만들어냈으며 그 기사 내용으로 지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어떤 내용인지는 이 책속의 에피소드로 직접 확인하시길).
그는 자신의 이러한 거짓 기사(혹은 삶)에 대해 "따라서 우리로선 철저하고, 사려 분별 있게 거짓말을 늘어놓도록 열심히 훈련하는 편이 더욱 현명하다.....확고하게, 솔직하게, 단호하게, 고개를 빳빳히 들고, 주저하거나 괴로워 함이 없이, 소심하지 않게, 우리의 높은 소명에 부끄러워하는 일 없이 거짓말 하도록 말이다."라고 충고할 정도로 진실과 거짓의 삶을 걸치듯이 산 인물이었다. 톰과 허클 핀같은 개구지다 못해 유쾌한 인물들을 만들어 낸 마크 트웨인이 말이다.
역사적인 인물들, 우리에게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로 남아 있는 사람들의 삶이 그들이 쌓아올린 업적만큼이나 진실되었을 것이라는 믿음을 쉽게 져버리지 못한다. 우리가 위대한 인물들의 업적만큼이나 그들의 삶이 고귀하고 진실되었을 것이라는, 삶과 업적의 일치성을 당연한 결과로 믿는 것은, 위인 전기물의 미화에 물들어서 그렇고 우리의 획일적인 교육이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길들어져서 그런 것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위대하다고 생각했던 인물, 20세기 건축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그를 뛰어 넘은 건축가가 나오려면 수 십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믿었던, 20세기의 3대 건축가 중의 한명으로 알려진 프랭크 로이트 라이트. 건축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관심 없는 사람일지라도 한번쯤은 들어봄직한 20세기의 위대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그에 대한 관심은 그 분야의 전문가로서가 아니고 그의 뛰어난 아이디어의 건축물로 보고 순간적으로 생겨난 관심이었다.
글
하.지.만.
글이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게 한 작품이다. 자기 삶에 대한 멋드러진 해석(그는 아내와 네 아이들을 버리고 바람을 피웠는데, 놀라운 것은 그 스캔들에 대해 정부의 사생할 간섭이라는 글로 어찌나 논리적으로 썼던지, 그 글을 읽으면 훌러덩 넘어갈뿐 만 아니라 자서전에서 그는 자신의 스캔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크게 다루지 않는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쩍 넘어간다) 과 건축에 대한 자기 신념으로 점철된 이 자서전이 독자 기만과 자기 옹호로 점철된 자서전이라는 것을 요 근래 알았다.
지인의 블로그 투어중 알게 된 사실, 그는 스캔들 메이커였을 뿐만 아니라 철저한 인종 차별주의자였으며 오만했으며 말만 번지르한 거짓말쟁이었다. 라이트의 건축물은 일본의 젠과 불가분의 관계이며, 자서전에서도 그는 일본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인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인종차별주의자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와 그의 연인 마마 체니의 또 다른 이면을 소설화한 이 작품을 보면(지인의 리뷰), 그의 거만하고 인종적인 차별에 못 이겨 분노에 찬 그의 흑인 집사가 마마 체니와 그녀의 아이들을 도끼로 죽여 라이트에게 보복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솔직하게 말하건데, 나 이 리뷰 읽고 머리를 야구망방이에 쿵하고 맞은 것 같았다. 내가 알고 있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하고 너무나 다른,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난 무엇을 읽었던 것이지. 내가 한 사람의 자서전을, 그 사람의 진실된 기록이라고 믿었던 그 글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자서전>에서 마마 체니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게 사랑했던, 그 여인의 비참한 죽음에 대해 당시 감정의 상황이나 무너짐, 그 어떤 말도 글도 쓰지 않았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내가 애써 투자한 시간더미는 허의 시간이었던 말인가. 더군다나 나는 이 거짓의 자서전을 읽고 그의 위대성을 다시 한번 새기고 꼴랑 책 한권 읽고 잘난 척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의 건축물의 위대성을 나불거리고 다닌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마마 체니의 사건을 은폐하려고 무진장 애썼다고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동원해서 언론을 구워 삶아(미국 언론의 거짓보도와 은폐에 대한 저 위의 메인호를 기억하라를 읽어보면 언론을 구워 삶은 일이 전적으로 식은 죽 먹기로 가능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사건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런지 <자서전>의 번역가 이종인씨도 마마 체니의 사건에 대해 크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광인의 도끼에 맞아 죽었다고 후기에 적었을 뿐이다. 이런 식의 축소는 후대까지 영향을 미쳐 그에게 치명적인 스캔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그 어디에도 자세하게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번역가인 이종인씨에게 묻고 싶은 것 하나. 그는 을유문화사의 현대 예술 거장시리즈 중 한권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평전 또한 번역을 했다. 물론 그는 그 이후에도 꾸준히 라이트의 작품에 대한 번역서를 번역하고 있다. 단순히 건축에 대한 호기심에 한 것인지 아니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포장을 걷어낸, 사실 그대로의 직설적인 삶을 읽고 싶었던 것인지 알고 싶다. 어느 정도는 그 또한 라이트의 거짓된 삶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나. 이책의 목록을 대강 훑어보면, 6장 잃어버린 세월, 참혹한 학살극이라는 부제가 나온다. 아마 이 평전은 어느 정도 라이트의 삶을 그대로 까발리며 가감없이 비추고 있을 것이다.
글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의 기록이 아니다. 글은 진실을 덮을 정도로 한 가지 사실을 부풀어 왜곡 할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치명적일 수 있다. 단지 아니다. 그렇지 않다라는 사람만이 글의 부정적인 힘을 막아내는 것이 아닐까. 아니 우리는 문자나 영상에 그대로 노출될 수 있는 폭로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만약 로이드 라이트와 마마 체니의 스캔들이 현재 일어 났다면 그는 타이거 우즈 만큼이나 웃음거리나 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글의 힘으로 무엇을 믿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우리는 글의 취사선택할 수 있는 폭로의 시대에 살고 있을 뿐이다. 아무 것도 믿지 말아라. 그것이야말로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