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면허를 따야할 당위성을 찾지 못해서 지금껏 운전면허를 따지 않고 있었다. 음악을 들으면서 걷는 것을 좋아하고 지하철이나 버스 타는 것을 귀찮게 여긴 적이 없었기에 자가 운전에 대한 로망따윈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든 적이 없었다. 그러다 6월 초입에, 문득 운전면허를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강렬하게.
월급쟁이 아내로 달마다 빠듯하게 살고 있는지라 운전 면허를 딸만한 목돈을 쥐고 있지 않았다. 급한대로 적금을 깨고 운전면허학원에 등록을 했다. 오전 시간에 등록을 했기에 대강 집안을 치워놓고 30분 정도 일찍 학원에 가 대기 시간동안 틈틈히 읽은 책이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정확하게 내가 샌델의 정의론을 이해했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는 강의 내내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의문과 답변, 결론이다 싶은 답변에 꼬리를 무는 의문과 의문으로 점철해 나간다. 결코 완벽한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왜 그리 이해관계가 얽혀있는지. 그래서 수차례의 리와인드 과정을 거쳐 읽었지만, 여전히 그의 정의론은 알쏭달쏭하기만 하다(나쁜 머리를 누굴 탓하리오).
샌델의 정의론을 완전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더라도 어떤 부분에서는 수긍할 수 있었고 우리 사회를 바라볼 때 어느 단면만이 아닌 여러 차원에서 바라 볼 수 있었다. 그의 정의론을 읽으면서 내가 여기 이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비록 나의 극단적인 정의론이 옳지 못하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극단을 꿈꾸게 된데에는 우리 사회의 약자에 대한 보호 장치가 너무나 안일하고 허술하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난 수요일에 또 한번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8살 아이의 성폭행 사건. 김수철사건으로 불리우는 미성년강간 사건으로 인터넷 뉴스가 들썩거렸다. 그 사건를 훑어보면서 같은 또래의 여자아이을 둔 엄마로서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속상한 사건이었다. 맘이 너무 아파, 요 며칠 납덩어리를 가슴에 얹어두고 사는 것 같다.
쓰레기만도 못한 개새끼라는 말이 순간적으로 튀어나왔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발겨도, 평생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갇혀 지내도, 죽어도 관에 갇혀 썩어 문들어지더라도 관채로 감옥에서 수 백년을 징역살이해도 분이 안 풀리는 놈. 사회에서 불필요한 잉여인간. 사회에 전혀 보탬이 안 되는 인간인 그는 감옥에서 평생을 갇혀 있었어야했다. 출소 이후, 그는 인근 주민의 두려움이었고 범죄는 재발되었다. 그에게는 죄책감이나 후회라는, 인간이라면 느낄 수 있는 감정따윈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 측면에서 어느 정도 그의 어린 시절, 청소년시절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불우한 가정생활을 영위했을것이고 학대받는 어린시절과 청소년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그의 불우하고 어려운 어린 시절이 그를 만들었다고 해도 그에게 연민을 느낄 수 없다. 혹자는 그래도 그에게 가해자(범죄자)의 인권이 있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짐승같은 그에게 인권을 운운한들 그에게 그러한 권리는 또 다른 범죄를 양산하는 권리가 아닐까. 김수철같은 범죄자를 보면서 그런 인간들이 어딘가에 평생동안 갇혀 지내면 나머지 우리 다수는 행복을, 안도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극단적인 나의 생각은 잘 못 된 것일까.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 2장에서 최대 행복의 원칙/공리주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 쾌락이 고통을 넘어서도록 하여 전반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벤담에 따르면, 옳은 행위는 "공리"를 극대화하는 모든 행위이다. 그가 말하는 공리란 쾌락이나 행복을 가져오고, 고통을 막는 것 일체를 가리킨다(55). 실제 그의 철학은 오늘 날 정책 입안자,경제학자,경영자, 일반시민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54).
우리는 간단하게 공리주의에 대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정의로 배워왔다. 얼핏 보면 이 말은 그럴싸하게 들리는 말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하는데 그 누가 그러한 구호에 반대한단 말인가.
하지만 샌델은 공리주의에도 함정은 있다고 말하다. 예를 들어 로마 시대, 원형경기장 안에서 벌어졌던 일, 그러니까 사자를 푼 원형경기장 안에 그리스도인을 집어 넣고 환호성을 질렀던 구경꾼들을 생각해보자. 수 많은 사람이 행복과 쾌감을 느꼈다는 이유(그러니깐 공리주의의 모토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었던)만으로 그러한 행위를 도덕적으로 정당화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또 다른 예로 공리주의 함정을 이야기한다. 그리곤 어슐러 르귄의 소설을 예를 들었다. 그녀의 단편집 <바람의 열두방향>이라는 작품중에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단편이 있다.
행복의 도시, 축복받은 시민의 도시 오멜라스에는 왕도 노예도, 광고도 주식거래도 원자폭탄도 없는 곳이다. 독자들이 이곳을 지나차게 비현실적인 곳으로 상상하지 않도록, 작가는 여기에 한가지 사실을 덧붙인다. "오멜라스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공공건물 지하실에 어쩌면 대궐같은 개인 저택 천장에 방이 하나 있다. 방문은 잠겼고, 창문은 없다." 이 방에 아이가 하나 앉아 있다. 지능도 떨어지고 영양 상태도 안 좋은 아이는 방치된 채로 비참하게 하루하루 연명해 간다.
사람들은 오멜라스의 모든 사람들은, 아이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들은 모두 아이가 거기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그들의 행복이 ,도시의 아름다움이, 그들의 따뜻한 우정이, 자식들의 건강이....심지어는 풍요로운 수확과 온화한 날씨까지도 전적으로 아이의 끔찍한 불행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이이가 그 비참한 곳에서 나와 햇빛을 본다면,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위로한다면 물론 좋은 일이겠지만, 그 날 그 시간부터 오멜라스의 모든 풍요로움과 아름다움, 기쁨은 시들고 파괴될 것이다. 그것은 행복의 조건이다(62~63p).
한 아이의 비참한 희생으로 도시는 풍요로울 수 있다는 이 아이러니가 이 도시의 행복조건이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한 아이의 행복쯤은 무시될 수 있다는 것, 샌델은 다수의 행복이라는 명분 아래 죄 없는 아이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잘못이(63p)이라고 말한다. 실제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람들은 오멜라스의 행복을 버리고 그 곳을 떠나버린다.
샌델의 말하는 공리주의의 함정에 빠져보자. 저 르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서 어린 소녀가 아닌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소녀와 같이 비참한 상황 속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행복과 쾌락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떨까? 오멜라스의 사람들이 과연 그 풍요로운 도시를 뒤로 하고 죄책감속에서 길을 떠나려 할까? 물론 다수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 당연하고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소녀와는 다른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 아닐까.
도처에 도덕적인 딜레마는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소녀대신 범죄자가 희생양이 되었다고 해도 도덕적인 딜레마를 겪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리고 그것이아말로 샌델이 말하는 정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어린 약자가 희생되는 사회속에서 사는 한, 극단적인 정의 사회를 꿈꾸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