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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회사라는 곳에 다닌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무렵, 퇴근을 하고 종로에서 하는 직장인 영어회화스터디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나는 정말 단순하게 영어회화는 쓰지 않으면 실력(사실 실력이랄 것도 없었지만...)이 뒷걸음질치며, 그나마 알던 것들까지 다 잊어버리게 될까봐 불안한 마음에 그 모임에 간 거 같다. 토익공부를 한창 할 때는 하루에 수백번도 두드리던 전자사전을 오랜만에 챙겨서, 무려 예습도 해서, 그날 비도 왔는데, 갈까말까 고민 백 번 하다가, 귀찮음과 첫 만남에 대한 쑥스러움을 뒤로 하고 거길 갔다.
손님이 뜸한 커피숍에 모여 앉은 20명 남짓의 사람들은 같이 그날 공부할 영어 기사를 읽고 번역하고 영어로 토론도 하고, 서로 질문도 해가며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그들의 나이가 생각보다 많음에 놀랬다. 대부분 20대 후반에서 30대를 지나 40대 초반도 있었다. 게다가 다들 어찌나 영어를 잘 하는지, 또 스터디 준비를 얼마나 많이 해왔는지. 유창한 영어로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그들의 자연스럽고 매끈한 발음에 나는 사실 쫄았다. 그래서 다음 모임도 가지 않았다. 결론은 그거다. "네네...나 영어 못해요."
그런데 사실 짧은 영어 탓도 있긴 하지만, 그들을 보며 느낀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신 그 모임에 안 나갔던 거 같다. 누가 봐도 평범하고, 성실히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내가 느낀 첫 느낌은 바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란 것이었다. 다들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영어공부하고, 바쁘게 실력을 쌓으면서 무섭게 살아가는데, 나만 넋놓고 앉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느낌이랄까. 다들 경력, 경쟁, 발전, 성공 이런 것들을 향해 거침없이 가는데, 나만 배낭여행을 위해선 영어 회화가 필요하지, 이런 맘으로 모임에 나간 느낌이었다.
물론, 어떤 한 가지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할 순 없지만, 사회의 일반적 기준을 보면 나는 이상해도, 한참 이상하고, 한참 게으른 사람임은 분명했다. 그러니까, 내 현 상황을 더 분명하게, 극명하게 보여주는 모임 속으로, 내 발로 걸어가고 싶지 않았다. 에이, 몰라, 그냥 살래. 사실 이런 마음이었지만, 나는 자신은 물론 옆의 사람까지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괜히 싫다. 그래서 너무 과하게(내가 볼때) 성공에 대한 투지를 불태우는 사람을 보면 불편하다. 각자 삶의 기준이 있는데, 그 하나의 기준에 따라 사는 사람을 보면 무섭기도 하다. 그들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 대충 짐작이 가기에, 먼저 그냥 그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내 자신을 두고 싶다.
그치만, 점점 사람들을 더 불안하고 하고, 불안해하지 않은 걸 이상하게 만드는 요즘 사회는 이상해도 한참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보험 같은 사업은 기본적으로 현대인의 불안을 바탕으로 장사하는 것이지 않은가. 또한 종교도 결국 사람의 불안을 근본에 깔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 완벽하지 않고, 삶은 정말 말 그대로 고행의 연속이고, 누구나 꽃길만을 갈 수는 없다. 그치만 그렇다고 더 불안함을 강요하는 건 분명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의 불안과 걱정은 결국 삶과 함께하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고. 그 불안과 함께,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건 숙명과도 같은 일이 아닐까. 다만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은 무조건 불안을 떨쳐내려 힘쓰는 게 아니라, 불안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하고 쓸데없는 불안은 떨쳐내고 대처하는 것일 듯하다.
더 많이 욕망하고 더 많이 바랄수록 더 불안할 수밖에 없다. 만족감이란 상대적인 것이고, 결국 중요한 건 내 중심을 잡고 버텨내는 일이 아닐까. 내가 하는 걱정의 90%는 사실 쓸데없는 걱정이 아닐까. 좀더 천천히, 좀더 여유롭게, 내 마음을 다스리는 그런 대인배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