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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지 못할 이야기 - 혁신계 정치인 하태환의 옥중록
하태환 지음 / 새봄출판사 / 2013년 7월
평점 :
제목에 끌려 관심을 가졌다가 읽게 된 책이다. 처음에는 표지와 제목을 보고 한 정치인의 생애를 담은 전기소설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다 책 소개를 읽고, 실제 저자가 옥중에서 직접 쓴 수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치 쪽으로는 지식도 관심도 없던 터라 그냥 넘길 수도 있었는데, 원고가 탈고 된지 무려 45년 만에 발행되었다는 문구에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책을 받고나니 후회가 많이 되었다. 책 분량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약 700페이지 정도 되는 꽤 두꺼운 책이었다. 그래서 막상 사고 나서도 손이 쉬이 가지 않고 얼마동안 그냥 책장에 꽂아두기만 했었다. 그러다 올해가 가기 전에 소설만 읽는 나의 이 독서편식을 고쳐보자는 생각에 세운 '소설 외 도서 10권 읽기'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첫 장을 넘겨보았다.
이 책은 1961년 5월 16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은 ‘쿠데타’라 불리는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날이다. 저자인 하태환 선생님은 당시 혁신계 정치인으로 활동을 하고 계셨는데, 이 활동으로 인해 경찰에게 체포되어 같은 해 9월, 국가보안법 제1조에 규정한 반국가 단체의 주요 간부를 처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특별법 제6조 위반으로 15년형이라는 형을 선고 받으신다. 체포 당시만 해도 본인은 법 아래에서 어떠한 위법적인 정치행위도 한 적이 없기에 금방 풀려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선생님은 3년 6월을 소급 실시한 <소급법>에 의하여 결국 수감 중 감형에도 불구하고 7년이라는 옥고를 치르게 되신다. 그리고 그 옥중에서 이 책을 집필하시게 되는데, ‘세상이 자신과 무고하게 투옥, 처형되신 분들의 무죄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책을 내게 되었다’고 저자의 머리말을 통해 전하고 있다.
체포되던 날 풍경부터 당시 서울 각 지역의 경찰서와 유치장의 풍경을 생생히 그리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수기는 읽는 동안 나에게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만큼이나 소소한 감동도 많이 주었다. 그 중 유치장 내에서의 신태악 · 신동영 부자의 이야기(p.43)와 노점 단속에 걸려 들어온 가난한 다섯 아낙네들을 위해 자신도 유치장 신세를 지고 있음에도 대신 벌금을 물어주던 분의 선행 이야기(p.47), 유치인의 편의를 최대한 살펴주었던 군인 서장의 이야기(p.52)는 내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유치장하면 떠오르는 잔상에는 어두운 것들뿐이었기에 이러한 소소하면서도 누군가를 위한 선행들이 유치장 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신기하면서도 따뜻한 기분이 들게 했다.
또 자신들이 왜 붙잡혀왔는지,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에서 다 같이 모여 모의재판(p.56)을 하던 모습은 웃기기도 하면서 얼마나 자신의 신념과 행동에 자신이 있으면 저렇게 여유를 잃지 않을 수 있나, 라는 생각이 들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 이는 지금 생각해보면 저자의 특유의 발랄한 문체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옥중 수기치고는 굉장히 유머러스한 내용과 말투가 많이 쓰여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모의재판 에피소드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분명 어두운 현대사를 담고 있던 만큼 가슴 아픈 이야기도 많았다. 결국 형장의 이슬로 처형되셨던 분들의 이야기는 그 중 가장 나를 아프게 했다. 사형을 언도 받았지만, 집행은 되지 않고 감형 되셨던 분들의 이야기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오신 그 분들의 심정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리기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내 눈길을 오래 붙잡고 있던 분은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 이승만 정권에 의해 사형수가 되어 형장의 이슬이 되셨던 조봉암 선생님이셨다. 죽는 순간까지도 의연하셨다는 죽산 조봉암 선생님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뵌 적이 없음에도 상상이 되었다. “조봉암새”(p.183-186)라 불리는 - 나중에는 “죽산조”라 불림 - 새조차도 그분이 다시 환생하신 것은 아닐까 하고 교도소 내 사람들이 생각할 정도였다니 그 분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정치 지도자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 읽는 도중 너무 궁금해 이분에 대해 인터넷 검색도 해보았지만, 이 분과 관련된 평전이 있는 만큼 조만간 꼭 한번 읽어봐야겠다. - 하태환 선생님도 이분을 무척이나 존경했던 것 같다. 이 책 제목이 이분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죽산 조봉암 선생님의 죽음을 "풍운조화가 반복된 한국의 정치사상, 하나의 ‘지우지 못할 이야기’"라고(p.187)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보니 말이다.
당시 혁신계 인사들이 혁명검찰에 의해 혁명재판을 받는 과정을 보면 정말 이게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인가 싶을 정도로 그들은 인권도, 자유도 법으로부터의 최소한의 보호도 보장 받지 못한다. 없던 죄와 없던 법이 생겨나는 것은 물론이요, 공소사실에 대한 내용조차도 법정에서 검사의 낭독으로 비로소 알게 된다. 이미 죄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끼워 맞춰 조사하는 검사에게 이들은 이미 죄인이었다. 동일한 사건에 동일한 법률 조항이 적용되었음에도 사람에 따라 판결은 달라지기도 하는 등 당시 법과 법조인들은 독립된 기관이 아니라 혁명군에 의해 장악된 정권의 꼭두각시 역할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의 지난 역사 중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래도 법은 정의를 실현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는 꽤 충격이기도 했고, 그동안 제대로 된 역사 공부를 하지 않은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며 반성하기도 했다.

p.272
수많은 혁신계 인사들과 정치인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고, 많은 진보 진영의 단체들도 언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많은 것을 정리한 저자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또 단체들의 성격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던 부분은 나처럼 무지한 사람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어떤 단체가 어떤 면에서 다른 단체와 다른지 상세하게 비교 ·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보기에는 다 똑같은 단체로 보여 이해가 잘 가지 않던 내게는 도움이 많이 되었다. 또 교도소 내 생활을 적나라하게 적고 있어 그분들의 고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고, 다양한 인물들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감동을 주며 그저 잊고 지낼 수 있었던 분들을 한분 한분 기억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중간 중간 하태환 선생님의 가슴어린 충고들 - 예컨대 ‘순간을 참으라.’ - 도, 선생님의 옥고를 통해 간접적이나마 자유의 소중함을 깨닫게 했던 말들도 모두 잊지 못할 것 같다.

p.248
다소 반복되는 내용도 있고, 글로만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는 점 - 물론 약간의 사진도 첨부되어 있었다. - 에서, 옥중 수기라고 하기에는 보고서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정보들을 담고 있었다는 점에서 지루한 감도 없지 않았지만, 교과서에서는 단 한 줄로 배웠던 5.16 군사 쿠데타와 관련해 숨은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더 없이 훌륭한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하태환 선생님이 말씀하신 교도소에서 장만해 갈 수 있는 ‘참된 기념품’이 바로 이 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솔론」이 한 말을 인용한 글을 첨부해본다.
p.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