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검찰 측 죄인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예전에 어느 교수님이 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신 적이 있다. 그때 난 정의를 실천하며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지켜주는 것이라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그랬더니 그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러면 법은 지켜야 하는 것이냐, 라는 다소 내게는 엉뚱하게 들리는 질문을 다시 하셨다. 역시 난 주저 없이 그렇다, 라고 대답을 했고 교수님은 내게 아직 어리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는 본인이 살아보니 법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더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이용을 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더라는 말씀과 함께. 그때는 그 말을 듣고 반감이 들었다. 법을 가르치시는 분이 아무리 사적인 자리라 해도 저런 말을 해도 되나 싶으면서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그 교수님께 조금 실망도 했다. 그때까지의 내게는 법과 '준수'라는 말은 어울려도 법과 '이용'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법이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완벽하지 않고, 약자들을 마냥 지켜주기만 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씩 깨달으면서 그때 그 교수님의 말씀이 문득문득 생각이 나고는 한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정의란 무엇인가로 시작하여 정의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써 법은 완벽한가로 이어지는 이 추상적이고도 난해한 질문들에 답을 찾기 위해 책을 뒤져보기도 하고 이것저것 검색도 해보지만 역시 이 질문들에 대한 딱 떨어지는 답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쉽게 외칠 수 있던 그 정의가 세상을 조금씩 알게 되고, 조금씩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어려워진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무거운 짐처럼 느껴져 때로는 외면한 채 지내기도 한다.
한동안 그랬다. 당장 내 눈 앞에 현실이 우선이고 그런 고민을 한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애써 외면하면서 지냈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굳이 그런 생각을 해봐야 뭐하나, 라는 나의 열등감도 작용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외면하고 지냈던 그 질문들을 다시 떠오르게 하는 책을 만났다. 일본 연애 소설은 좋아하지 않지만 일본 추리 소설은 좋아하다 보니 읽게 된 <검찰 측 죄인>이 그것이다.
미스터리물이지만 '누가 범인인가'는 그다지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았던 소설이었다. 보통 추리, 미스터리물은 누가 범인인가가 중요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등장인물 한 명 한 명 의심케하면서 읽어나가게 만드는데, 이 소설은 진범이 누구인가 보다 과연 주요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정당했는가, 각자가 외치는 수많은 정의 중 어느 것이 진짜 정의라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23년 전 발생한 여중생 살해 사건과 23년 후 발생한 70대 노부부 살해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가 된다. 공교롭게도 이 두 사건에는 공통된 용의자가 한 명이 있다. 23년 전 여중생 살해 사건에서 마지막까지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마쓰쿠라라는 자가 70대 노부부 살해 사건에서도 용의자 목록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70대 노부부 살해 사건 직후 여중생 살해 사건은 공소시효가 만료된다. 이후 마쓰쿠라를 취조하면서 경찰과 검찰은 23년 전 여중생 살해 사건의 진범이 마쓰쿠라라는 자백을 받아내지만 마쓰쿠라는 70대 노부부 살해 사건은 자신이 하지 않았노라 주장한다. 공소시효가 만료되자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는 마쓰쿠라를 보면서 경찰과 검찰은 마쓰쿠라가 이번 사건에서도 진범일 것이라 생각하고 수사를 진행한다. 오직 마쓰쿠라에 초점을 맞춰서. 그리고 여기서 두 검사의 가치관이 충돌한다. 공소시효 만료로 더 이상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 마쓰쿠라를 다른 죄를 뒤집어씌워서라도 처벌을 받게 하고자 하는 베테랑 검사 모가미와 악인이더라도 그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만 처벌을 해야 한다는 새내기 검사 오키노. 좋은 스승과 제자였던 둘은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서로가 지향하는 정의 실현을 위해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각자 자신들의 방식으로 정의의 검을 들고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
결국 승부는 오키노의 승리로 끝난다. 하지만 오키노는 웃지 못한다. 오히려 모가미가 있는 도쿄 구치소를 바라보며 오열하고 만다. 그리고 소설은 거기서 끝이 난다. 승리자인 오키노의 오열이 보여주듯 소설은 통쾌, 상쾌와는 거리가 먼 찜찜함을 남기고는 끝나버린다. 정의를 외치며 결국 법질서를 해치고 살인까지 저지른 모가미. 분명 그의 정의는 과한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키노처럼 나 역시 그가 안타깝고 또 그의 정의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마쓰쿠라는 자유인이 되었고, 검찰과 경찰로 인해 누명을 쓴 불쌍한 사람이 되어 여론의 동정심을 얻는다. 그리고 급기야 자신이 자백했던 23년 전 여중생 살해 사건도 경찰과 검찰의 강압에 의해 진술했노라 번복하기에 이른다. 선량한 사람을 도왔다로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 하는 유명 인권 변호사의 남은 인생을 위해 그렇게 하라는 조언을 받아들여 말이다.
누구의 정의가 옳다, 그르다 얘기할 수 없을 것 같다. 여전히 난 모가미의 정의도, 오키노의 정의도 모두 어느 정도 일부 옳다고 생각한다. 만일 내 주변 사람이 여중생 유키와 같이 살해를 당해 죽었고, 그 진범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음에도 공소시효 만료로 더 이상 죄를 물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면 나 역시 모가미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법률이라는 검을 든 검사라는 직분에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오키노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말이다.
이번에도 역시 정의에 대한 답을 찾지 못 했다. 그저 나라는 사람은 줏대 없이 머리는 오키노를 따르고 감정은 모가미를 따른다는 것을 확인만 한 것 같다. 그리고 공소시효는 수많은 이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없어져야 하는 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마음이 많이 무거워지는 소설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졌지만 한 명은 제대로 법의 심판을 받지 못하고 죽었고, 한 명은 유유히 법망을 피해 자유인이 되었다. 공소시효와 정의, 그리고 법이라는 검에 대해서 이 소설을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