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
파울로 코엘료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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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
부적절하고 불편함을 야기하는 단어이다.
항상 사랑과 믿음, 희망, 행복 등 우리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가치들에 대해 노래해왔던 파울로 코엘료가 불륜에 대한 신작을 출간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신분 상승을 꿈꾸며 계산적인 결혼을 한 사람이 불륜이라는 다소 비윤리적인 방법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과정을 보여주려는건가? 아니면 불륜에 의해 파괴된 가정과 배우자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경각심을 일깨워 주려는건가?
지금까지 우리나라 영화와 드라마에서 보여줬던 불륜의 다양한 행태를 떠올려 보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혹은 일주일 내내 텔레비전을 틀면 불륜, 혹은 바람의 문제로 고통받는 커플이 하나 이상 포함된 드라마를 언.제.나. 볼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있는 내가 아닌가. 심지어 평이한 불륜은 이제는 식상해져서 더 막장스럽고 자극적이어야만 시청률이 고공행진을 할 수 있는 시대니까.
이렇게 단련된 나를 놀라게 할, 파올로가 이야기하는 '불륜'은 대체 무엇일까??

내가 품었던 궁금증과 기대감에 비해 결말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떻게 이렇게 담담하게 끝맺을 수가 있을까.
그 흔한 악 한 번 쓰지 않고, 머리 끄댕이 잡고 다투는 질펀한 싸움없이 아주 조용히 막을 내렸다.
통상적으로 손가락질 받아 마땅한 주인공이 내적 평안과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치면서.
불륜이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스토리를 기대하고 이 책을 접하면 정말 밍숭맹숭한, 결말마저 현실성이 없는 실망스런 이야기다. 하지만 이 책은 불륜이라는 제목이 무색할 정도로 불륜을 저지르는 여자 주인공 린다와 야코프가 함께 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린다가 불륜을 통해 삶의 의미와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지만 불륜의 현장 또는 치정에 얽힌 사건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린다의 독백을 통해 불륜을 저지르기 이전과 후의 감정적 변화나 생각의 흐름 등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어 린다의 모노드라마 같은 느낌이다.

린다는 제네바의 명망 있는 신문사의 기자로서, 나이 31세, 가장 부유한 스위스인 300인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상한 남편과 아이 둘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조건만을 따져가며 한 결혼도 아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열렬히 사랑해 결혼까지 했고, 두 사람에겐 무한한 신뢰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문득 '고작 이게 다야?' 라는 의문과 함께 은밀한 두려움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일상과 권태가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변해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 사이에 갇혀 버린 것이다. 지난 몇 년간의 결혼 생활을 되돌아 보면서 완벽한 남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우월감이 아닌 악몽으로 느껴진다. 그만큼 본인도 똑같은 책임감을 보여야 한다는 사실이 갑갑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지난 삼십 여년간의 삶은 결코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길만 찾아온 지루한 인생같이 생각된다. 하지만 그녀는 친한 친구, 남편에게도 본인의 심각한 우울증을 드러내지 못 한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그녀가 해온 유일한 반응이고 여전히 보여지는 모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샤워를 하다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거기서는 울 수가 있다. 아무도 내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기에, 누구도 내가 가장 싫어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테니까.
"괜찮은거야?"
물론. 안 괜찮을 리가 없잖아? 내 인생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무 문제 없지.
단지 두려움이 밀려드는 밤이 있을 뿐.
아무런 열의를 느낄 수 없는 낮과,
행복했던 과거의 모습들, 지나가버린 일들에 대한 회한과
감행하지 못한 모험에 대한 갈망과,
아이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공포가 있을 뿐. -p. 23


누가 봐도 행복하고 부유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그녀의 삶을 보면 이러한 고민과 두려움이 사치로 느껴지기도 한다. 당장 하루 벌어 먹고 사는 것이 급급한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존재론적 가치들에 대한 고민 자체가 배불러 할 일 없는 사람들의 놀음에 불과할테니까.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삶의 진정한 의미와 행복감, 만족감을 결정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한다. 남자들에게는 욕망을, 여자들에게는 질시를 불러 일으키는 완벽한 삶을 누리는 주인공에게 우울증을 유발시키는 결핍의 요소는 대체 무엇인지,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하고 만족스런 삶을 위해 목표로 해야할 참다운 가치가 무엇인지.

그래서 파울로는 그녀가 야코프를 만나 불륜을 행하는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책의 처음과 끝까지 우울증에 걸린 여자의 전형적인 모습, 위태롭고 불안정한 그녀의 내적 세계를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평범한 일상에서 갑작스레 찾아온 우울과 무기력한 감정의 근원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의 양상을 세세하게 열거한다. 특히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치료 과정으로 들어가기 전까지의 각 단계들 -방어, 자기 옹호, 자기 확신, 고백,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 은 매우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우울증의 '지옥' 을 경험한 사람들이 대부분 공통적으로 느끼는 일련의 증상들이긴 하다. 하지만 우울증 진단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누구나 다 한 번쯤은 그러한 감정적인 공황상태와 본인의 삶에 대한 무기력함, 회의감 등을 경험한다. 이것이 책을 읽는 동안 린다에게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내 마음 속에서 괴로워하는 누군가가 바로 그 린다이기 때문이다.


침대에서 나오기 싫은 느낌. 아주 단순한 일을 해내는 데도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 같은 느낌. 진정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세상 사람들을 보며 자신은 그런 기분을 느낄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가책으로 마음이 갈갈이 찢기는 느낌. -p. 31

무감각 상태랄까? 행복한 척, 슬픈 척, 오르가슴을 느끼는 척, 즐거운 척, 잠을 잘 잔 척, 살아 있는 척. 그러다보면 가상의 한계선에 다다르는 순간이 있는데, 그 순간을 넘으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돼. 그러면 더이상 불평을 안 하게 되지. 불평을 한다는 건 아직도 무언가를 대상으로 최소한 싸우고는 있다는 뜻이거든. 결국 불평도 없는 식물인간 같은 상태를 받아들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감추려고 노력하게 돼. 그게 정말 힘든 일이야. -p. 32


뉴스를 켜고 신문을 뒤지며 각종 사고들, 혹은 자연재해로 집을 잃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서 위안을 구한다. 평소 본인의 모습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감정적이고 예민한 또 다른 내가 나타나 괴리감을 느끼고 괴로워한다. 결국 우울증임을 인지하고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아보고 약을 처방 받는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과 의사의 진단과 약물의 효과를 믿을 수 없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시도해 보지 못 했던 일탈적인 행동을 일삼는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일탈적인 행동들은 쇼핑 중독-과소비, 알코올 의존 혹은 중독, 안정제나 항우울제의 남용, 도박, 범법 행위, 불륜 등 개개인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린다는 그것이 불륜으로 다가왔을 뿐이다.

린다는 야코프를 떠올리며 사랑의 감정으로 두근거릴 때에도 그녀의 남편 또한 사랑했고 아이들과 함께하는 가정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다. 야코프와 불륜을 저지르든, 아니든 함께 남을 것인가, 영원히 헤어질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올 것이란 것도. 그것이 두 사람, 아니 여러 사람을 고통스럽게 할 상황을 처하게 할 것이며, 본인을 파괴할 일이라는 것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야코프에게 빠져든 것은 고뇌에 빠진 자신의 영혼을 알아봐준 유일한 사람이라는 점, 그리고 그가 자신과 똑같은 슬픔을 지니고 있다는 동질감 때문이었다. 심지어 남편도 그녀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던 행복하냐는 질문은 야코프에 대한 마음을 단단히 굳히는 계기가 된다. 나아가 야코프 앞에서 그녀는 다른 여자가 된다. 욕망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열여섯살의 사춘기 소녀가 될 수 있다.
본인을 감싸고 있던 무기력, 나약함, 패배감, 불안이 사라지고 한없는 희열과 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강력한 힘을 느낀다. 특히 야코프의 부인인 마리안을 만난 후 더욱 큰 승리감을 느끼고 이것이 반듯하게 살아온 자신에게 주는 선물같은 것이라고 느끼기까지 한다.

결국 그녀가 정말 사랑한 것은 야코프가 아니라 무력감을 극복해내는 자신이었단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안정적인 생활이 무료하고 삶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들자 도전 정신을 발휘하여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던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일종의 게임 같은 것 말이다. 미모도, 지성도, 직업도 완벽한 마리안을 만나 굴욕감을 맛본 뒤 그녀에게서 야코프를 뺏어오는 짜릿한 게임을 시작한 것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손에 넣었을 때 밀려오는 성취감과 자아도취적인 기쁨은 그 어떤 마약보다 강렬할테니까. 처음엔 호감 또는 일시적인 설렘이었을지도 모를 감정이 진실한 사랑인 것처럼 둔갑하여 이 도전적인 게임에 빠져들게 만든 원동력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욕구보다 미지의 모험- 그것이 자기파괴적인 모험이라 할지라도- 을 약속하는 악마의 속삭임에 이끌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니까.


하지 말아야할 것을 함으로써 스스로 깨닫게 될 거예요. 아까 말했듯이 기자님 영혼의 빛은 어둠보다 더 강해요. 그렇지만 깨닫기 위해서는 끝까지 가야 합니다. -p. 212


주술사의 조언처럼 본인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 끝까지 나아간 그녀는 마침내 깨닫게 된다. 불륜으로 인한 행복은 마약 중독자들이 마약을 할 때 느끼는 행복 같은 것이라고. 조만간 그 효과는 사라지고 전보다 진한 절망이 찾아든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녀가 죄책감과 절망감에 모든 것을 털어놓으려 했을 때 몹시나 완.벽.한 남편은 그 고백을 제지시키며 무한한 사랑으로 그녀를 끌어안는다. 얼마나 자신이 린다를 사랑하는지 어마무시한 말들로 고백을 하면서.


난 당신 때문에 생기는 질투를 잘 조절했어.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왠지 알아? 난 늘 스스로에게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줘야 하니까. 난 우리의 결혼생활과 유대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해. 절대 아이들 때문이 아니야. 난 당신을 사랑해. 당신을 내 곁에 두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정말로 무엇이든 견딜거야. 하지만 당신이 날 떠나겠다면 잡을 순 없겠지. 언젠가 떠나고 싶어지면, 당신 행복을 찾아 떠나도 돼. 내 사랑은 그 무엇보다 강하니까, 절대로 당신 행복을 막진 않을거야. - p. 301


사랑을 하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여야 해. 사랑은 우리가 어릴 때 갖고 놀던 만화경 같은 거니까. 똑같은 건 없고 항상 변하지.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행복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ㄴ것 때문에 오히려 고통받게 되어버려. 최악은 뭔지 알아? 그 여자같은 사람들이야. 제 결혼생활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항상 걱정하는 사람들. 난 그런 건 관심없어.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게 중요한 건 그것뿐이야. -p. 303


이 부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런지. 일단 의심의 씨앗이 가슴 속에 자리하면 타이밍의 문제일 뿐 언제든 급속도로 자라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야코프와 린다 사이에 썸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 눈치를 챘을텐데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저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린다를 붙잡으려 한다는 게 너무 비현실적이고 허구적이다. 내가 남편이라면 린다의 얼굴만 봐도 자연스럽게 웃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이런 로맨틱한 말들을 내뱉을 수 있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 오히려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거나 아니면 그냥 대화를 회피한 채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게 최선일 것 같은데 말이다.

게다가 린다라는 이 여자는 마지막에 야코프를 만나 뻔뻔한 말도 남긴다.
정작 남편은 비난하지도, 탓하지도 않는 일로 스스로를 탓하고 매질하고 있었으며, 완벽한 이 남편이 어떻게든 본인 곁에 머무르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나름대로 본인이 가치있는 사람이기 때문일거라고.
내가 야코프였다면 한 대 후려쳤을지도 모르겠다. 정신차리라고.
뭐 이런 정신 나간 여자가 다 있나 싶어서 온갖 욕설을 퍼부어주었을 것 같다.
하긴 촉망받는 정치인이니까 이런 여자와의 불장난을 마무리한 것 자체에 엄청 감사했을 것 같지만.
정말 이 부분을 읽을 때는 기가 차서 머리까지 띵한 느낌이었다.
일단 남편의 조건 없는 사랑을 확인하고 가족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갔으니 린다에게는 아주 성공적인 결말이다. 삶, 사랑, 가족 이 모든 것의 소중함과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불륜을 통해 자존감과 자긍심을 회복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은 대체 무슨 소리인지. 전혀 예상 밖의 전개였다. 이게 서양인과 동양인의 사고 방식의 차이인지, 아니면 린다라는 여자는 처음부터 이토록 뻔뻔하고 자기중심적인 여자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결혼이라는 제도가 원시 시대부터 치정때문에 발생한 살인 사건들을 줄이고자 고안한 것이라는 가설을 생각해 보았을 때 동서양의 차이는 아닌 것 같다. 그저 파올로 코엘료의 해피 엔딩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막장보다 더 막장스러운 결론을 내린게 아닌가 싶다.


스스로 더럽다고 느끼거나 그를 속인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도 다시 그 사람 옆에서 잠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그런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거야. - p. 319


그리고 린다는 나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정말로 정말로 대단한 여자이다.
가족과 행복한 한 때를 보내던 린다는 한 해의 마지막 날까지 망언을 한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본인을 남편과 가족 곁으로 돌려보내준 야코프와 마리안이 행복하기를 소망한다며, 이 모든 일이 두 사람을 가깝게 이어주기를 소망한다고 말이다.
이쯤되면 자기애의 결정판이다. 이 여자 소시오패스가 아닌가 생각도 해본다.
역지사지라는 게 없는 건지, 워낙 매력적인 여자면 이따위로 생각해도 되는건지.

아무리 영혼의 연금술사 파울로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결말은 뜬금없다.
그녀가 불륜을 통해 주체로서의 삶의 의미, 사랑의 소중함, 진정한 가족애를 깨닫는 과정과 내적 성찰은 정말 훌륭하다. 그 과정에 포함된 철학적인 질문들과 답들은 나에게 큰 깨우침을 주었지만 이 결말은 정말 실망스럽다. 이렇게 인간의 우울하고 고독한 속내를 완벽하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불륜의 심리적 메커니즘과 결말에 대한 현실적 이해가 이토록 부족할 수 있다니. 결말의 몇 장이 책을 읽는 동안 느꼈던 모든 경이로운 감흥들을 반감시키는 것 같아 좀 아쉽다.

예민한 주제를 고차원적으로 승화시켜 풀어냈지만 끝이 안타까운 책!!
성에 관한 이야기지만 여자 주인공이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고독과 우울만 잔뜩 서술해 놓은 11분이 생각나게 하는 책이다. 책 곳곳에 담겨 있는 주옥같은 삶의 비의들을 발견하고 싶다면, 결말의 생뚱맞음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파올로의 팬이라면 이 책도 충분히 재밌게 읽으실 것 같다!

더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
그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가 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
삶은 우리에게 수 없이 많은 배움의 기회를 베푼다. 모든 남자, 모든 여자가 날마다 사랑에 자신을 내맡길 좋은 기회를 만난다. 인생은 긴 휴가가 아니라 끊임없는 배움의 과정이다.
그리고 우리가 배워야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방법이다. -p. 358

마른 땅? 어떤 관계도 그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죽이는 것이 바로 모험의 부족, 그 무엇도 이젠 새롭지 않다는 느낌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계속 예상 밖의 모습을 보여주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배우자가 예전에 결혼식 제단에서 만나 반지를 교환했던 그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 시간을 멈출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시간을 멈출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우리를 변하게 하는 것은 지혜와 경험이 아니다. 시간도 아니다. 우리를 변하게 하는 것은 오직 사랑이다. 하늘을 날고 있을 때 나는 삶에 대한, 우주에 대한 내 사랑이 그 무엇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p.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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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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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만나 결혼을 합니다. 이들은 자유 분방함, 무절제함이 팽배한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 답지 않게 전통적인 의미의 가정을 꾸리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고자 합니다. 정원이 있는 큰 저택에서 여덟에서 열명 남짓의 아이들을 낳고 사랑이 넘치는 가족을 형성하는 것이 목표였죠. 런던 근교의 한적한 지역에 빅토리아풍 대저택을 마련하고 임신과 출산을 반복합니다. 사실상 그들이 집값을 지불하려면 둘 다 직장을 다녀야 했지만 그들에게는 아이를 낳는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던거죠. 이 때부터 그들의 불행은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려나가는 데 필요한 경제적 부양 능력, 부모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부모가 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그들은 자신들이 꿈꿔오던 이상적 형태의 가정을 꾸리는 일에만 급급했던 겁니다. 결국 그들은 데이비드의 아버지로부터 집값과 생활비를 조달받고, 해리엇의 어머니로부터 가사와 양육의 원조를 받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해리엇은 또 한 번 임신을 하게 됩니다. 그녀는 짧은 시간 간격으로 아이들을 낳았기 때문에 이미 충분히 지쳐 있었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죠. 심지어 이 아이는 너무나 크고 힘이 세서 그녀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임신 기간 동안 진통제를 투약해 가며, 끊임없이 태아를 저주하지요. 산모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 되었기 때문일까요? 아이는 도깨비같은 형상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하고 태어납니다. 여느 태아들보다 힘이 세고, 울지도 않습니다. 엄마나 가족들에게 친근감을 전혀 느끼지 못 하고 성격 또한 포악합니다. 이 아이가 바로 불쌍한 벤입니다. 벤의 등장으로 이 단란한 가정에는 어둠과 공포가 짙게 깔리기 시작합니다. 벤은 타인과의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그의 폭력성때문에 가족들은 위협을 느낍니다.

우리가 복권 추첨에서 무엇이 나올지 선택할 수 없듯이 아기를 갖는 일도 마찬가지랍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간에 우리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 p. 139

이 때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다른 네 아이들과의 행복한 가정을 되찾기 위해 벤을 보호소로 보낼 것인가, 아니면 벤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데이비드는 다수의 행복이라는 대의를 택하고, 벤을 보호소로 보냅니다. 반면 해리엇은 보호소에서 죽어가는 벤을 본 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그를 집으로 다시 데려오게 됩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그녀 자신을 가족과 친척들로부터 고립되게 만듭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사랑과 관심을 주지 못 하고 벤만 챙기기 때문이죠. 벤을 무서워하던 네 아이들 중 셋은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집으로 뿔뿔히 흩어지게 되고,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막내인 폴은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아이로 자라게 됩니다. 행복한 가정을 꿈꾸던 해리엇이 가족들을 와해시킨 장본인이 된 셈이죠.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살해당하는 것으로부터 그 애를 구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의 가족을 파괴했다. 그녀 자신의 인생에 해를 끼쳤다. 데이비드의 인생, 루크와 헬렌과 제인, 그리고 폴의 인생에도. - p. 158

하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은 그녀가 정말 모성에 이끌려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이 맞느냐는 점입니다. 막상 죄책감에, 엄마라는 이유로 벤을 집에 데려온 뒤에 보여주는 그녀의 행보는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어머니의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벤을 위한 특수 교육을 시키거나 보통 사람들과 충분한 교감을 할 수 있도록 인내심있게 사랑으로 대하지도 않습니다. 벤을 감당할 수 없었던 그녀는 벤을 동네 건달들에게 맡깁니다. 하루 종일 벤이 그들을 따라 다닐 수 있도록 돈을 주면서 말이죠. 벤이 위협적이거나 비정상적인 행동을 할 경우에는 보호소에서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살리며 협박(?)도 합니디. 자식을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사육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주고,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것이 전부인 생활이었응니까요. 결국 벤이 청소년이 되고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는 그 순간에도 그저 방관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벤이 떠나면 집을 팔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그녀의 모습에서 비정함 마저 느껴집니다. 정말 벤을 자식으로서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이상적으로 그려왔던 어머니라는 역할 모델을 충실히 수행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모양처라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위해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이죠. 벤에게 어떠한 기대도 없었을 뿐더러, 그로 인해 가정을 떠나야 했던 아이들이나 남편에 대한 죄책감이나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거든요.

우리는 벌 받는거야. 잘난 척 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해서. - p. 159

거기서 군중으로부터 약간 떨어져서 그 도깨비 같은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거나 군중 속에서 자기와 같은 종족에 속하는 또다른 얼굴을 찾고 있는 벤의 모습을 볼 것이다. - p. 179

여러모로 고민할 거리를 잔뜩 던져주는 악몽같은 이야기입니다. 해리엇의 일그러진 모성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과연 나라면 어떠한 선택을 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게 되거든요. 우리가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 당연하게 기대하는 모습들 역시 문명과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고정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가져보게 되고요. 소시오패스로 보여지는 아이, 모성이 느껴지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떠올리게 됩니다. 원치않는 아이를 가진 엄마의 고통과 부정만큼 아이는 어릴 때부터 엄마에 대한 복수심을 드러내거든요. 해리엇과 벤의 모습과 흡사하죠. 사실 이 영화의 케빈과 비교하면 벤은 위험한 살인귀같은 존재가 아닌 그저 공감 능력과 지적 능력이 부족한 아이인 것 같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일부 폭력적인 장면들이 묘사되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익히고 그들의 감정과 반응을 배우는 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 일반인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거든요.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규정하는 범주 내에 들지 못 하는 것뿐, 그를 악하고 위협적인 괴물로 정의 내릴만한 충분한 근거는 없어 보입니다.그러한 면에서 벤은 해리엇이 말하는 원시성을 간직한 존재이자 반문명적인 존재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혹은 이동진님의 말처럼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일 수도 있겠고요. 실제로 후속작으로 출간된 '세상 속의 벤'에서 집을 떠난 벤이 그의 힘과 모자란 지능때문에 어떻게 인간들에게 착취를 당하는지 보여준다고 하니, 그는 단지 집단의 기준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소외된 존재였나 봅니다.

다섯째 아이. 짧지만 반드시 고민해봐야할 근원적인 문제들로 가득한 복잡한 책입니다. 후속작도 읽어봐야 겠어요. 더 생각할 문제들이 늘어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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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 오늘의 일본문학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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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그런 상상을 해본다.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 한 장소에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과의 생경한 만남.
그리고 그 사람과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솔직하고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단, 다시는 그 사람과 내 생활 반경에서 마주치지 않을 것을 기약하면서.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상상이자 바램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역시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도 우리를 온전히 아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또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몹시나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겁거나 혹은 진지한 '진짜 나' 는 가려둔 채 상황과 목적에 맞는 '대외용 나' 를 여럿 만들어낼 수 밖에 없다. 타인들과 원만하고 유쾌하게 잘 어우려저 살아갈 수 있을만큼의 가벼운 '나' 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너무 가깝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주변 인물들이 원하는 인물상은 연기할 수 밖에 없다. 그와 동시에 그 주변 인물들도 '나' 라는 사람을 자신들 옆에 있어주길 바라는, 혹은 그들의 시각에서 정의내린 인물상에 맞추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일시적이든, 가식적이든 상관없다. 누구도 무거운 진실을 감내하며 책임감있는 관계를 형성하고 싶어하진 않으니까.


"그러니까 넌 네가 아는 사토루밖에 모른다는 말이야.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아는 사토루밖에 몰라. 그러니까 요스케나 고토도 그들이 아는 사토루밖에 모르는 건 당연한거야."
"그러니가 모두가 알고 있는 사토루는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야. 그런 사토루는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어. 알겠어?" - p. 183


퍼레이드에는 한 집에 살고 있는 다섯명의 남녀가 등장한다.
이 다섯명의 동거인들에게는 살을 맞대며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형성되는 특유의 친밀함과 편안함이 있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말할 수 없는 고민을 털어놓으며 몹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이것은 친한 척에 불과하다. 다들 속으로는 이것을 계산된 교제 혹은 친구놀이쯤으로 생각한다. 단기간으로 한정되어 있기에 순조로울 수 있는 관계, 모두가 이 생활에 적합한 '나' 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는 관계, 내일 당장 헤어져도 서운하지 않을 관계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독특한 점은 이 다섯명이 차례로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이다.
똑같은 사건에 대해 각자의 관점에서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고 화자가 바뀌는 옴니버스식 구성이다. 아까는 주인공이었던 사람이 다른 글에서는 관잘의 대상이 되는 점이 흥미롭다. 다른 사람의 눈에 비춰진 '대외용 나' 와 내가 표현하는 '진짜 나' 를 비교할 수 있다.
각자가 서술하는 다섯 남녀의 삶은 몹시 가볍고 유쾌해 보이지만 막상 화자로서 자신의 내면 세계를 보여줄 때는 그 진지함에 놀라게 된다. 모두가 대충 사는 것 같고 모자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상황을, 각자의 꾸며진 연기를 냉철하게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거리감을 위해 모두가 이야기해도 되는 것만 이야기하고 공동생활에 필요한 각자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적확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충격적인 결말 그 자체보다 끝까지 덤덤하고 무관심하게 넘어가려는 이들의 태도가 더 섬뜩하게 느껴진다.


당당하고 거리낌없이 살수 있는 이유는 여기가 무인의 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이 무인의 집이 되기 위해서는 여기에 '이 집 전용의 우리' 가 존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 집 전용의 우리' 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역시 우리밖에 없으므로... (중략)... 답답할 정도로 꽉 찬 만실 상태가 된다. 실제로는 꽉 찬 만실이면서도 텅 빈 공실. 그러나 비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꽉 찬 상태. ....... 잘 모르겠다. - p. 133


이야기를 읽는 동안 독자인 나 역시 등장 인물들에 대한 나름의 정의와 함께 개개인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를 갖게 된다. 그러나 관찰자 시점을 통해 단편적으로 보여지는 '대외용 나'(등장인물 중 누군가)와 '진지한 나' 사이의 괴리감을 느끼는 순간 이것 역시 우리들의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피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시니컬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이들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내보이고 싶지 않은 우리들의 '진짜 속마음' 같아서 씁쓸하고 불편하다. 깔깔대며 유쾌하게 읽히던 이야기 속에 씁쓸한 현실과 고독한 내면을 아무렇지 않게 녹여낸 작가의 능력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실제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진짜 그들의 모습과 상관없이 내 안의 잣대로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지금 어떠한 '대외용 나' 를 연기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대외용 나' 는 대체 몇 가지나 존재할까.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익명을 부여받음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만약 내가 익명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면 나는 절대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과장에 과장을 덧붙인 위선적인 자신을 연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세상에서는 '있는 그대로 산다' 는 풍조가 마치 미덕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란 나에게는 '게으르고 칠칠치 못한 생물' 의 이미지로 밖에 다가오지 않는다. - p. 132


블로그에 이 리뷰를 올리고 있는 지금의 '나' 라는 모습도 조금은 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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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다상담 2 - 일, 정치, 쫄지마 편 강신주의 다상담 2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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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다상담 총 3권 중에 저는 2권을 먼저 읽었습니다.
아무래도 요새 진로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계속 학업을 이어갈 것인가, 직업 전선에 뛰어들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이 일이 내 적성에 맞는지 아닌지, 나는 왜 이 일을 계속 하려고 하는지 등등의 문제도 끊임없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현재에 수긍하여 일자리를 구하는 것보다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잘 하는지 알고 그것을 일로 택해야 하지 않을까 자꾸만 흔들렸지요.

이 책을 읽고나니 꽤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입니다.
일의 의미 자체를 다시 설정하게 됐다고 해야할까요..
취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원하는 일이 될 수는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익 창출을 목표로 하는 회사 일을 하면서도 일 자체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발상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게 되었네요.
우리는 결국 자본이 원할 것 같은 스펙과 관련된 일들의 역량을 키우면서 살아온 사람들이더라고요.
정말 내가 원해서 했던 일이 몇 가지나 있는가.. 잘 생각해보면 많지 않을 거예요.
대학가고, 토익 공부하고, 어학 연수 다녀오고.. 모두 본인 스스로 원해서 한 일이기 보다는, 결국 자본이 원하는 최적의 노예가 되기 위해 한 일들인거죠.
'자발적 복종' 말입니다.
노예가 되기를 거부했던 과거와 달리 현재의 우리는 제발 스스로를 써 달라고 조르는 노예가 된거죠.
내가 얼마나 이 회사에 적합한 노예인지를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들을 동원해서 말입니다.
제가 꿈을 꾸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이것이 생계의 수단으로 연결되는 축복을 바랬던겨죠.
실제로 이것은 극소수의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임에도 불구하고요.
아마도 제작하고 창조하고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이 그에 해당될 것 같아요.
물론 제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분야에서도 일 자체가 목적이 되는 행복을 누릴 기회는 충분히 있습니다.
단, 금전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을 완전히 떨쳐내야 겠죠.
돈을 버는 일을 제쳐 놓고 당장 그 일에 뛰어들 수 없다면 자본주의적 관점에서의 일이 아닌 인문학적 관점에서의 일로 의미를 재정립 해야겠습니다.
노동으로서의 일을 하는 시간은 우리가 향유하는 시간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요.

향유하는 시간은 사냥하는 시간이 아니라 사랑하는 시간, 공유하는 시간, 그리고 창조하는 시간입니다.
사냥을 하지 않는다면 항유도, 사랑도, 창조도 불가능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사냥하는 시간을 통해 아무리 많은 사냥감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일정 정도의 사냥감이 모이면 신속하게 부족과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요. - p.97

살아갈 이유, 우리가 일을 해야하는 이유는 바로 이 향유하는 시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일 수도 있고, 장소일 수도 있고, 예술일 수도 있겠지요.
나 아닌 무언가를 향유하고 즐길 게 있다면 삶의 행복이 커질 수 있습니다.
향유하는 이 시간을 위해 일하는 시간을 조절하게 된다면 의미있는 일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일이 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가족도, 친구도, 나 자신도 버린 채 워커홀릭이 되어 쓸쓸하게 살아가는 삶만큼은 막을 수 있겠죠.

우리가 일에 관하여 생각했을 때 잊지 말아야할 절대적인 근본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일하지 않는 자가 먹으려 할 때는 누군가의 것을 뺏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소중한 것이고, 살아있다는 것이 되지요.
노동을 하려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서 노동은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노동하는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질적인 측면이 결정되겠지요.
앞으로 향유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전공과 관련하여 책을 써본다거나 누군가를 지도한다거나..
그러한 시간을 갖는다면 더더욱 바랄 게 없겠지요.
물론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 또한 빼놓을 수 없고요!!

다른 챕터 정치나 뻔뻔함에 관련해서는 다소 공감이 가지 않는 부분들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조금은 거북하게 느껴질 정도로 고압적으로 강하게 이야기하시는 부분도 있더라고요.
정치 이야기 같은 경우에는 누가 이야기해도 저는 불편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더라고요.
자신의 정치색을 드러내게 되고, 독자들로 하여금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져서요.
하지만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사회 현상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준다는 면에서 몹시 유익한 책 같아요.
예를 들어, 왜 노년층이 보수적일 수 밖에 없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분들의 의견을 존중해야하는지 에 대한 이유라던가, 뻔뻔해지기 위한 실천 강령 등은 흥미롭기도 하고 절로 수긍이 되더군요.
나를 괴롭게 하는 강자들에게 써보고 싶은 실천 강령들이 더군요.
아무래도 강연을 글로 옮긴 것이다 보니 과격한 부분이 여과없이 드러났지만 읽기에는 수월했어요.
어쩐지 1권 보다는 3권이 기대됩니다.
곧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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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하구나?
와타야 리사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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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마음때문에 머리 아픈 책은 읽기 싫더라고요.
그래서 고른 책이랍니다.
보통 제가 읽은 일본 소설들은 내용도 복잡하지 않고 문체도 간결해서 금방금방 읽기 좋았었거든요.
이 책 또한 여자들의 눈길을 끄는 감각적인 표지와 제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불쌍하구나', 그리고 '아미는 미인' 두 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책의 2/3 가량은 '불쌍하구나' 인데요, 저는 '아미는 미인' 이 더 인상적이었어요.
분량은 짧지만 여성의 숨기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잘 표현한 단편이 있을까 싶더라고요.

누구나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미인 아미와 그녀 옆의 평범한 단짝친구 사카키의 이야기 입니다.
사카키 역시 매력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너무나 빛나는 아미 옆에선 범인이 되고 말지요.
심지어 사카키가 가진 개성적인 매력은 전부 결점이 되어 버립니다.
고등학교 시절은 아름다운 아미 덕분에 그녀의 단짝인 사카키 또한 예외가 되어 나름 순탄한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대학에 들어오자 외면하고 있던 문제들에 봉착하게 됩니다.
아미가 진짜고 자신은 아미를 흉내낸 조악한 가짜로 보인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지요.
새롭게 만나게 된 남자들은 아미와 사카키를 만나는 순간 그녀들을 공주와 하인, 스타와 매니저로 구분지어 버립니다. 아미와 끊임없이 비교 당하고 당연한 여성성마저 거부 당하면서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게 되지요. 아미와 거리를 두고 싶어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그녀때문에 괴로움과 곤란함 속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반전의 순간이 찾아오게 됩니다.
아미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 나가노 선배의 고백을 받고 사귀게 되면서 말입니다.

스스로가 충족되면 아미에 대한 질투도 사라지는구나.

​그 날 이후 아미와 일상적인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게 되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됩니다.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되는 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카키가 느끼게 되는 절망감과 모멸감, ​그리고 자긍심을 되찾는 과정이 모두 섬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질투심에 사로잡혀 힘겨워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어느 새 사카키가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 있지요.
그녀의 감정적 변화를 따라가는 과정은 내가 가지고 있는 과거의 기억들과 묻어두었던 감정들을 되살리고 상처받았던 내 자신을 어루만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 짧은 이야기가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훈훈한 결말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미가 대학 졸업 후 갑자기 누구나 반대하는 날라리 같은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주변 지인들의 걱정과 불만은 극에 달하게 되지요.
그 남자와의 만남을 막아야 한다는 지인들과 달리 진정 행복해 하는 아미의 얼굴을 보고 난 사카키는 그러한 의견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사카키에 대한 비난을 늘어 놓습니다.
원래 사카키가 아미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서, 질투심때문에 힘들어했던 사카키이므로 아미의 불행은 복수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기지 않느냐며 그녀를 몰아 부칩니다.
하지만 질투에 눈이 멀어 우정이 산산조각 난 비극적인 결맏도 아니고, 사랑을 통해 질투심을 극복하고 행복이라는 복수를 날리는 여자의 통쾌한 결말도 아닙니다. ​
바로 이 부분이 아미와 달리 현실적인 감각과 냉철한 판단력을 가진 그녀의 매력과 진면모가 빛나는 대목입니다. 사카키 본인은 잘 몰랐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했던 바로 그 이유 말입니다. ​
사카키가 아미를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미는 사카키를 좋아하고 단짝이 되려고 애를 썼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보이지 않는 감옥에 살고 있던 아미의 절대적인 고독과 힘겨움, 갑갑함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녀는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녀가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겁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다는 궁극의 고독을 메우기 위해 무의식 중에 자신에게 매정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던거죠.
그래서 사카키는 그녀의 결혼을 말리는 대신 응원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줍니다.
비록 그녀의 앞날이 힘들어진다 하더라도, 그녀의 곁을 끝까지 지킬 것을 맹세하면서 말이죠.
드디어 아미가 찾아 낸 그녀의 행복과 자유를 존중하면서.. 사카키와 아미는 진정한 친구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이 말합니다.

여자의 질투란 무서운 감정이죠. 스스로 의식하지 않아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을 좀먹습니다.

물론 질투에 눈이 멀어 누군가의 불행을 간절히 바라는 여자들의 모습에서 저 역시 자유로울 순 없습니다. 오죽하면 여자는 질투의 화신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내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질투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된다면 극복이 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결국 나 자신이 스스로 알고는 있지만 인정하지 못 했던 결핍의 요소가 타자를 통해 부각될 때 그 감정이 질투로 발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가 자긍심을 느끼게 되고 자신의 결점마저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면 이러한 감정은 사그라들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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