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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용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베르베르 베르나르는 참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과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독특한 소재들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풀어낸다. 쫄깃쫄깃한 박진감 넘치는 전개에 베르나르식 유머가 곁들여져 긴장과 이완이 반복된다. 그래서 어렵게만 느껴질 수 있는 과학 지식들이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지고 책에 쉽게 몰입할 수 있게 만든다.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파피용은 더욱 흥미롭게 다가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너무나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마지막 인류의 선택이 결국 지구를 떠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에 격하게 공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개봉했던 인터스텔라에서 지구를 대체할 다른 행성을 찾아 새로운 인류를 정착시키려고 했던 것처럼. 책 속의 주인공 이브도 지구를 떠나기 위한 "마지막 희망"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파피용호를 만들어 우주로의 탈출을 시도한다. 과연 그들은 새로운 태양계에서 생명의 잉태가 가능한 행성을 찾을 수 있을까?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지구가 병들어 가는 모습과 국가, 종교, 인종 간 대립과 테러, 개인의 활동과 사고를 제한하려눈 수뇌부들 등 책 속에 그려진 인류의 모습은 출판 당시인 2007년의 모습과 현재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이러한 상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애쓸 수 있겠다 라는 생각도 든다. 이 지구를 탈출해서 새로운 행성을 찾아 신인류를 정착시키는 일! 단, 과거 인간이 저질러온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정말 인.간.이라 칭할 수 있는 사람만을 데리고 가서 새로운 역사를 쓰는 일을 꿈꾸는 과학자가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드러난다면 각국의 정치인들과 종교계에서 반발할 것이란 것은 역시 불보듯 뻔한 일이다. 그 기술을 국유화 하기 위해 힘쓸 것이고, 소수가 떠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역차별을 운운하며 이기주의자, 낙오자로 몰아갈 것이다. 예상 가능한 썩은 사회의 반응들이 글 속에 잘 담겨 있다.
"...... 모든 세대마다 예전보다는 나아졌고 다음 세대에는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어. 어쩌면 결국 상황은 언제나 똑같을지도 몰라. 단지 우리 시대는 더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끔찍하게 생각되는 거지."
"어쩌면 떠나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몰라."
"당신이 이 모든 일을 다 계획해 놓고 이제 와서 떠나지 말았어야 한다니, 말이 돼?"
"확신이 없어서 그래. 탈출이라...... 비겁한 짓은 아니었을까?"
"그럼 도대체 당신이 생각하는 용기라는 건 뭐지?"
"남아서 투쟁하는 것."
"이길 가능성이 있을 때 투쟁하는 거야. 지구에 남아 있었더라면 우리는 시련을 겪으며 자멸하는 인류의 모습을 두 손 놓고 지켜볼 수 밖에 없었을거야."
"끝까지 노력해 보지 않은 건지도 몰라." -p. 202
언론은 끊임없이 이들을 헐뜯고 이들의 실패를 바란다. 그들을 이기주의자로, 비겁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로 몰아가면서. 심지어 그들이 지구에 잔존하게될 무수한 인류를 버려가며 새로운 터전을 향해 떠난다고 비난을 한다. 그들처럼 모험을 할 용기도 없고, 혁명을 일으킬 자신도 없는 이들이 비논리적인 비판만 일삼을 뿐이다. 그러나 역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다수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이브는 탈출이 비겁한 짓은 아니었는지, 남아서 투쟁하는 것이 용기 있는 선택이 아니었는지 회의감을 느끼며 자문하게 된다. '끝까지 노력해보지도 않은 것은 아닐까?' 라고. 이러한 부분에서 와닿는 것이 많았다. 버틴다는 것과 다른 길을 선택한다는 것.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과 선택의 문제이다. 똑같은 상황에 쳐해 있는 것처럼 보여도 개개인의 사정은 저마다 다 다르다. 타인이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꼭 이럴 때 오지라퍼들이 등장해 초를 친다. 그저 비슷한 환경에 놓여있는 것 뿐인데 자신과 똑같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자신보다 유리한 상황에 놓였다고 생각하면서 상대를 헐뜯는다. 버티면 버티는 대로 독종이라거나 우둔한 사람으로 몰고 다른 길을 선택하면 요령이 좋은 기회주의자로 몬다. 그래서 선택의 기로에서 서면 고민은 더 가중될 수 밖에 없다. 독종이 될 것인가 비겁한 자가 될 것인가. 애시당초 맥 나마라나 엘리자베트처럼 타인의 평가나 조언에 무심해지면 가장 편할 일이지만 실제론 이브같이 팔랑귀를 가진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그래서 이 이야기의 결말이 더 궁금해졌다. 이브를 응원하며 지구 탈출은 마지막, 그리고 유일한 희망이었음을 증명하길 바라며 책장을 넘겼다. 별들의 세대인 '호모 스텔라리스' 가 새로운 행성에서 천국의 도시를 건설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물론 현실적으로는 거르고 거른 인간이지만, 결국 인간이기에 지구에 존재하던 문제들이 다시 떠오르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흐르겠지만.
사회적인 동물들의 자연스러운 진화 경향을 보여 주는 두 가지 대표적인 예죠. 개미들의 연대와 쥐들의 이기주의. 인간들은 딱 중간이예요. 협력의 법칙이냐, 약육강식의 법칙이냐. 개미들의 법칙이냐 쥐들의 법칙이냐. -p. 229
애시당초 이들은 거대하지만 밀폐된 생태계를 고안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개인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기구들이 사라지고 모두가 평등한 조건에 놓였을 때 인간은 모두가 협동하며 평화롭게 살아갈 것이라는 가정 하에 이루어진 전대미문의 실험이었다. 따라서 파피용호에 탑승할 사람들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자들로 엄선해야 했다. 자율성, 사회성, 동기부여, 건강, 젊음, 싱글, 한 가지 전문분야에서 재주를 가질 것 등등의 엄격한 기준과 수십번의 테스트와 각종 위기를 거쳐 14만명의 탑승객들이 선발된다. 하지만 역시 이기심과 폭력성은 인간의 본능 속에 깊게 내재되어 있는 것인지 그들의 평화도 잠시였다. 이상적이고 평화로웠던 나비인들의 세계를 뒤흔드는 첫 사건은 치정에 의한 것이었고 이로 인해 헌법과 정부, 경찰이 들어설 수 밖에 없었다. 개인을 억압하는 어떠한 기구도 없는 세계를 만들고 싶었던 이브의 낙담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여기에 첫 폭동을 선동한 이의 이면에는 치정에 의한 복수가 자리잡고 있었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사랑이고,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끄는 것 역시 사랑이다.
"그런데 왜 항상 거짓말쟁이들과 못난 놈들이 승리를 하게 되지? 왜 항상 최악의 인간들이 법을 만들게 되는 거야?"
"사람들에게는 노예 기질이 있으니까. 사람들은 자유를 요구하면서도 정말로 자유가 주어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어. 반대로 권위와 폭력 앞에서는 안도감을 느끼지."
"바보같은 짓이야!"
"그게 바로 인간이 지닌 역설이야. 더군다나 사람을 세뇌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공포라고!" -p. 216
그리고 이내 인류의 역사를 답습하고 만다. 평화로운 공동체 사회를 흔들기 시작한 것은 술, 도박, 화폐, 범죄 등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내재된 자기 파괴 욕구 때문이었다. 강력한 시장 조슬린에 의해 간신히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프로젝트 발기인들이 전부 죽고난 뒤 파피용 호 원기둥 안의 사회는 혼란스러워진다.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못 하고 전쟁, 중앙 집권화와 분권화, 의회와 독재 체제, 안정과 광란, 무정부 상태와 전체주의, 학살과 출생 등 양극단의 역사적 순환을 반복한다. 평화로운 공동체는 기대할 수도 없을 뿐더러 반복된 전쟁으로 인하여 원기둥 내의 생태계 마저 균형을 이루지 못 하고 황폐해진다. 이전 지구에 존재하던 원자폭탄, 종교적 광신주의, 환경오염, 인구 과잉, 사방에 존재하는 스트레스와 두려움 등의 문제들이 다른 모습으로 발현되었을 뿐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시금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어떤 동물들 보다 현명하고 이성적이지만 가장 파괴적이고 감정적인 것 또한 인간이 아닐런지. 인간에게 내재된 자기 파괴의 욕구, 지구가 정해놓은 생태계의 근본 원리 등을 생각해 보면 현 인류의 미래도 그닥 밝지만은 않은 것 같다. 처절한 나비인들의 모습에 괜스레 우울해지고 앞날이 두려워졌지만 그래도 결말만큼은 정말 잘 쓰여진 것 같다. 또 다른 가능성을 꿈꾸고 상상해 보게끔 만든달까. 우리도 먼 옛날 다른 태양계의 지구에서 떠나온 호모 스텔라리스의 후손일지도, 혹은 우주 저 먼 곳에 새로운 지구를 찾아 여행을 떠난 나비인들이 이미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뛴다. 오늘밤은 하늘을 오랫동안 들여다 보고 있을 것 같다.
"우리 모두 태어날 때는 다 주먹을 꽉, 단단히 쥐고 있지." "그렇지만 나중에는 손을 활짝, 맥없이 펴고 죽죠." "왜일까요?" "우리를 태어나게 했고, 우리가 90년 동안 매달려 왔던 싸움에서 해방되기 때문이지." -p.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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