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가지 인간 행복 사용 설명서
김현경 지음 / M&K(엠앤케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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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제발 누구든 "원하면 다 가질 수 있다" 는 지니의 주문같은 소리만 반복하는 자기계발서에만큼은 돈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p. 40


세상에 공짜도 없고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아둥바둥 사는게 인간이다. 그런데 많은 자기계발서들이 허황된 꿈을 심어주는 경우가 많다. 간절히 바라고 원하면 이루어지는 것 같은 희망고문 말이다. 저자도 이런 계발서들을 극혐하며 현실적인 자기계발서를 썼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본인의 경험이나 지인들의 이야기 외에도 다른 서적이나 전문 자료를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주제를 풀어나가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감성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근거를 들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은 가독성을 높여 주고 글에 대한 신뢰를 높여 주었다. 내 꿈, 내 돈, 내 마음, 내 의지, 내 몸, 내 인간관계, 내 입 사용 설명서 등 총 7 챕터로 구성되어 있어 제일 궁금한 항목부터 읽어 나가면 부담없이 완독하게 된다.

참 독특한 점은 각 챕터의 말미에 핵심 정리와 실천 지침이 담겨 있다. 주요한 내용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고 그와 관련한 질문을 던진다. 친절하게도 질문 밑에 공란이 있어 스스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적어 나가다 보면 자신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가장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질문의 벽에 부딪히면 자신의 본질과 성향에 대해서 무지한 것 같아 속상할 때가 많은데 직접 적어보는 과정을 통해 나도 몰랐던 면들을 발견하게 된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만 가면, 대학교 때는 취업만 하면 다시는 입시 지옥을 경험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살다 보니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실수 투성이고, 여전히 삶 자체에 대한 질문은 가득하다. 그래서 일까? 진지하게 답을 적다 보면, 옛날 문제집이나 전과 등으로 밑줄 긋고 오답 풀이하면서 공부하던 시절 생각이 나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나 자신이나 인생에 대해서도 이렇게 핵심 요약지를 만들고 문제 풀이를 통해 제대로 습득했는지 확인 받는 과정에서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나 역시 주입식 교육의 산물인지라 밑줄 그어주고 요약 정리를 해준 파트가 쏙쏙 머리에 들어오는 것 같이 느껴지는 점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모든 챕터가 흥미롭게 다가왔지만 역시 가장 유용한 것은 내 입 설명서! 살면서 어르신들이 해주신 말씀 중에 가장 와닿는 게 "말을 해야 할지 말지 고민이 될 때는 하디 말아라" 였다. 나이를 먹고 다양한 사람들과 환경에 노출되면서 더더욱 뼈져리게 실감하는 말이다. 왜 침묵이 중요한지, 침묵의 어마무시한 효과를 알려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침묵과 말하기의 완급 조절 연습을 충분히 하고 나면 상담, 설득, 거절, 싸움, 유머, 배려 등 각 상황에서의 말하기 노하우를 하사받을 수 있다. 그 중에서 말 안 통하는 사람 상대하기 3단계 전술은 어찌나 유용하게 다가오는지! 정말 이런 사람과 시비가 붙으면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은 상황에서 좀처럼 끝을 보지 못 하고 제자리 도는 이야기만 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조금만 더 침착한을 유지하고 3단계 전술을 편다면 점점 미쳐가는 상대와 평정을 찾아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 같다!!

꽤 단호하고 깔끔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조언을 듣다 보면 복잡했던 머리가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다. 삶을 좀 더 쉽게 살아가는 요령을 익혀서가 아니다. 사는 것 자체가 원래 복잡하고 불편하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자꾸만 잊기 때문에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든다. 삶이 더욱 버겁게 느껴지고 마치 남과 달리 나에게만 결여된 부분이 있어 문제를 안고 사는 것 같이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다. 세상사 내 마음 먹기에 달렸고 노력 하나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달콤한 힐링의 말들이 듣기에는 좋다. 정말 책을 읽고 나면 달라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러면 사는 게 훨씬 즐겁고 편해질 것 같으니까. 하지만 그 위로가 오래 가진 못 한다. 이내 내 생각과 마음이 글러먹고 삐뚤어져서 삶이 이 모양인거냐며 또 다른 자책과 절망으로 이어지기 쉽상이다. 차라리 삶은 힘든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일상을 바꾸어 나갈 수 있는 실질적인 조언들을 해주는 것이 장기적으로 유익하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달콤 씁쓸한 그 경계에서 우리에게 유용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의 경험이나 과학적인 수치들을 끼워 넣어 더욱 현실적이고 신뢰감 있게 느껴진달까?! 적어도 그녀가 처음에 이야기 했던 자기계발서들에 대한 불만들- 한두 권 읽어보면 결국 다 뻔한 얘기다, 읽을 때는 좋은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 자기 자랑이 심하고 가르치는 투라 기분 나쁘다, 너무 거창한 얘기라 공감이 안 간다, 처음부터 똑같은 얘기로 책 한 권을 대강 채운 느낌이다.- 은 다 피해간 것 같다. 따뜻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날카로운 조언을 해주는 언니를 만난 기분이다. 마음이 참 편안해지고, 무기력감을 떨쳐낼 수 있는 원동력을 주는 책.. 참 오랜만에 유쾌한 자기계발서를 만난 것 같다 ^_^

사실 이 세상 모든 문제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다 나 같지는 않다." 와 "모든 일의 종류와 단계에 명확한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란 이 두 가지 사실을 모르거나 잊기 때문에 일어난다. -p. 87

다른 사람이나 상황 변화가 문제를 해결해 줄 거란 생각은 버려라. 그럴 수고 있지만, 어차피 다른 사람이나 상황은 내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풀 수 있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나 상황의 문제는 내 우울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수도 있다. -p. 89

우울증의 신체적(유전적) 유발 요인이 30~50%라면 나머지는 상황적, 감정적 요인이다. 우울증을 유발하기 쉬운 감정 상태는 크게 2가지가 있다. 첫째는 고독감, 둘째는 무력감이다. 고독감은 타인들과 충분한 유대감을 느끼지 못할 때 느끼는 감정이고, 무력감은 자기 일에 스스로가 충분한 영향력를 발휘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생기는 감정이다. 즉 양쪽 다 개인과 공동체 간의 적절한 거리 유지가 안 되는 데서 일어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 p. 97


인간관계에 별 문제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만큼 인간관계를 능숙하게 잘하는 사람이라기보단, 인간관계를 많이 하지 않거나 중요성을 덜 느끼는 사람이라고 보는 게 더 맞다. 인간관계를 잘하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 한 이유이다. 인간관계는 아무리 진심이 있어도, 기술이 있어도, 관계하는 만큼 문제가 알어날 가능성이 높다. -p. 197


살다 보면 사람이 분명 달라졌다고 생각되는 경우도 있긴 하다. 이 경우에는 성격 자체가 달라진 것보다는 정신적 건강 상태가 달라졌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 누군가의 정신적 건강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꾸준한 사랑과 관심뿐이다. -p. 198


감정적으로 큰 상처를 받은 사람들, 특히 스스로의 힘으로 권리를 찾기 힘든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감정적 지불 없이는 문제 해결에 참여할 의지를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p. 201


한 심리 결과에 의하면 사람들은 외모가 뛰어난 사람을 첫눈에는 좋게 평가하지만, 이후 그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 하는 행동을 했을 때 보이는 실망감과 적대감의 크기는 외모가 매력적이었던 정도에 비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p.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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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나쓰키 시즈코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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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유명한 두 작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와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 의 오마주라고 한다. 두 권 다 책으로는 접해보지 못 했지만 오리엔탈특급살인사건의 경우 영화로 보았기 때문에 내용은 익히 알고 있었다.고립된 섬이 아닌 바다 위의 호화 요트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이라는 점, 그리고 치정 살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이는 것 같다.

특히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닌 '하루카=나' 라는 인물의 시점에서 그려진 점이 독특하다. 비록 다른 이들의 마음까지는 알 수 없지만 하루카의 감정 변화와 내면 세계가 디테일하게 그려지기 때문에 더 생생하고 사실적인 느낌이 든다. 망망대해 위 요트 속에 고립된 상황 자체도 하나의 거대한 밀실이 되어 폐쇄적이고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여기에 살인 또는 자살과 관련된 탑승객들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재판관의 등장은 강압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처럼 느껴져 두려움을 배가 시킨다. 모두가 서로를 의심하며 짝을 이뤄 움직이지만 사람들은 하나, 둘 차례로 죽어 나간다. 다음은 나일지도 모른다는 막막함, 어쩌면 누군가 신분을 숨긴 채, 혹은 탑승객과는 다른 경로로 비밀스럽게 탑승한 제 3의 인물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하루카의 고립감과 공포감이 극한에 달하는 순간 그녀의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뻔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결말과 어느 정도는 예상 해봄직한 트릭에 실망감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근래의 작품들처럼 고도의 트릭이나 암호가 숨겨져 있지는 않기 때문에 나름 하나씩 죽어나가는 일이 지루하고 평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 작품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명작들에 대한 향수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작가와의 두뇌싸움도 좋지만 지나치게 얽히고 복잡해져서 진을 빼놓은 근래의 소설들과는 차원이 다른 재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본능과 심층 심리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탄탄하게 쓰여진 소.설.을 읽는 본래의 재미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이 전혀 실망스럽지 않다. 오히려 잘 알려진 작품을 자신만의 색깔로 믹스해 낸 작가의 필력과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능력이 감탄스럽다. 게다가 그간 추리소설들을 읽으며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은 느낌이다. 실질적 사형제도의 폐지로 인하여 우리의 불완전한 형법체계는 피해자 가족들의 권리나 보상보다 범죄자의 인간적 존엄성을 보호하는 데 더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과연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직접 가해자에게 복수를 할 경우 그 정당성이 성립하는가?!

"성경에는 이렇게 씌어 있어요. 악으로 악을 갚지
마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우리는 정말로 복수할 자격을 부여받은 걸까요?"

생각이 많아지면서 할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씀, 선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다고 하신 이야기가 떠오른다. 오늘도 나는 의도치 않게 얼마나 많은 죄를 지은걸까 반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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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용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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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베르 베르나르는 참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과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독특한 소재들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풀어낸다. 쫄깃쫄깃한 박진감 넘치는 전개에 베르나르식 유머가 곁들여져 긴장과 이완이 반복된다. 그래서 어렵게만 느껴질 수 있는 과학 지식들이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지고 책에 쉽게 몰입할 수 있게 만든다.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파피용은 더욱 흥미롭게 다가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너무나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마지막 인류의 선택이 결국 지구를 떠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에 격하게 공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개봉했던 인터스텔라에서 지구를 대체할 다른 행성을 찾아 새로운 인류를 정착시키려고 했던 것처럼. 책 속의 주인공 이브도 지구를 떠나기 위한 "마지막 희망"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파피용호를 만들어 우주로의 탈출을 시도한다. 과연 그들은 새로운 태양계에서 생명의 잉태가 가능한 행성을 찾을 수 있을까?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지구가 병들어 가는 모습과 국가, 종교, 인종 간 대립과 테러, 개인의 활동과 사고를 제한하려눈 수뇌부들 등 책 속에 그려진 인류의 모습은 출판 당시인 2007년의 모습과 현재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이러한 상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애쓸 수 있겠다 라는 생각도 든다. 이 지구를 탈출해서 새로운 행성을 찾아 신인류를 정착시키는 일! 단, 과거 인간이 저질러온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정말 인.간.이라 칭할 수 있는 사람만을 데리고 가서 새로운 역사를 쓰는 일을 꿈꾸는 과학자가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드러난다면 각국의 정치인들과 종교계에서 반발할 것이란 것은 역시 불보듯 뻔한 일이다. 그 기술을 국유화 하기 위해 힘쓸 것이고, 소수가 떠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역차별을 운운하며 이기주의자, 낙오자로 몰아갈 것이다. 예상 가능한 썩은 사회의 반응들이 글 속에 잘 담겨 있다.

"...... 모든 세대마다 예전보다는 나아졌고 다음 세대에는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어. 어쩌면 결국 상황은 언제나 똑같을지도 몰라. 단지 우리 시대는 더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끔찍하게 생각되는 거지."
"어쩌면 떠나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몰라."
"당신이 이 모든 일을 다 계획해 놓고 이제 와서 떠나지 말았어야 한다니, 말이 돼?"
"확신이 없어서 그래. 탈출이라...... 비겁한 짓은 아니었을까?"
"그럼 도대체 당신이 생각하는 용기라는 건 뭐지?"
"남아서 투쟁하는 것."
"이길 가능성이 있을 때 투쟁하는 거야. 지구에 남아 있었더라면 우리는 시련을 겪으며 자멸하는 인류의 모습을 두 손 놓고 지켜볼 수 밖에 없었을거야."
"끝까지 노력해 보지 않은 건지도 몰라." -p. 202


언론은 끊임없이 이들을 헐뜯고 이들의 실패를 바란다. 그들을 이기주의자로, 비겁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로 몰아가면서. 심지어 그들이 지구에 잔존하게될 무수한 인류를 버려가며 새로운 터전을 향해 떠난다고 비난을 한다. 그들처럼 모험을 할 용기도 없고, 혁명을 일으킬 자신도 없는 이들이 비논리적인 비판만 일삼을 뿐이다. 그러나 역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다수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이브는 탈출이 비겁한 짓은 아니었는지, 남아서 투쟁하는 것이 용기 있는 선택이 아니었는지 회의감을 느끼며 자문하게 된다. '끝까지 노력해보지도 않은 것은 아닐까?' 라고. 이러한 부분에서 와닿는 것이 많았다. 버틴다는 것과 다른 길을 선택한다는 것.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과 선택의 문제이다. 똑같은 상황에 쳐해 있는 것처럼 보여도 개개인의 사정은 저마다 다 다르다. 타인이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꼭 이럴 때 오지라퍼들이 등장해 초를 친다. 그저 비슷한 환경에 놓여있는 것 뿐인데 자신과 똑같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자신보다 유리한 상황에 놓였다고 생각하면서 상대를 헐뜯는다. 버티면 버티는 대로 독종이라거나 우둔한 사람으로 몰고 다른 길을 선택하면 요령이 좋은 기회주의자로 몬다. 그래서 선택의 기로에서 서면 고민은 더 가중될 수 밖에 없다. 독종이 될 것인가 비겁한 자가 될 것인가. 애시당초 맥 나마라나 엘리자베트처럼 타인의 평가나 조언에 무심해지면 가장 편할 일이지만 실제론 이브같이 팔랑귀를 가진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그래서 이 이야기의 결말이 더 궁금해졌다. 이브를 응원하며 지구 탈출은 마지막, 그리고 유일한 희망이었음을 증명하길 바라며 책장을 넘겼다. 별들의 세대인 '호모 스텔라리스' 가 새로운 행성에서 천국의 도시를 건설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물론 현실적으로는 거르고 거른 인간이지만, 결국 인간이기에 지구에 존재하던 문제들이 다시 떠오르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흐르겠지만.

사회적인 동물들의 자연스러운 진화 경향을 보여 주는 두 가지 대표적인 예죠. 개미들의 연대와 쥐들의 이기주의. 인간들은 딱 중간이예요. 협력의 법칙이냐, 약육강식의 법칙이냐. 개미들의 법칙이냐 쥐들의 법칙이냐. -p. 229

애시당초 이들은 거대하지만 밀폐된 생태계를 고안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개인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기구들이 사라지고 모두가 평등한 조건에 놓였을 때 인간은 모두가 협동하며 평화롭게 살아갈 것이라는 가정 하에 이루어진 전대미문의 실험이었다. 따라서 파피용호에 탑승할 사람들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자들로 엄선해야 했다. 자율성, 사회성, 동기부여, 건강, 젊음, 싱글, 한 가지 전문분야에서 재주를 가질 것 등등의 엄격한 기준과 수십번의 테스트와 각종 위기를 거쳐 14만명의 탑승객들이 선발된다. 하지만 역시 이기심과 폭력성은 인간의 본능 속에 깊게 내재되어 있는 것인지 그들의 평화도 잠시였다. 이상적이고 평화로웠던 나비인들의 세계를 뒤흔드는 첫 사건은 치정에 의한 것이었고 이로 인해 헌법과 정부, 경찰이 들어설 수 밖에 없었다. 개인을 억압하는 어떠한 기구도 없는 세계를 만들고 싶었던 이브의 낙담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여기에 첫 폭동을 선동한 이의 이면에는 치정에 의한 복수가 자리잡고 있었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사랑이고,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끄는 것 역시 사랑이다.

"그런데 왜 항상 거짓말쟁이들과 못난 놈들이 승리를 하게 되지? 왜 항상 최악의 인간들이 법을 만들게 되는 거야?"
"사람들에게는 노예 기질이 있으니까. 사람들은 자유를 요구하면서도 정말로 자유가 주어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어. 반대로 권위와 폭력 앞에서는 안도감을 느끼지."
"바보같은 짓이야!"
"그게 바로 인간이 지닌 역설이야. 더군다나 사람을 세뇌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공포라고!" -p. 216


그리고 이내 인류의 역사를 답습하고 만다. 평화로운 공동체 사회를 흔들기 시작한 것은 술, 도박, 화폐, 범죄 등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내재된 자기 파괴 욕구 때문이었다. 강력한 시장 조슬린에 의해 간신히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프로젝트 발기인들이 전부 죽고난 뒤 파피용 호 원기둥 안의 사회는 혼란스러워진다.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못 하고 전쟁, 중앙 집권화와 분권화, 의회와 독재 체제, 안정과 광란, 무정부 상태와 전체주의, 학살과 출생 등 양극단의 역사적 순환을 반복한다. 평화로운 공동체는 기대할 수도 없을 뿐더러 반복된 전쟁으로 인하여 원기둥 내의 생태계 마저 균형을 이루지 못 하고 황폐해진다. 이전 지구에 존재하던 원자폭탄, 종교적 광신주의, 환경오염, 인구 과잉, 사방에 존재하는 스트레스와 두려움 등의 문제들이 다른 모습으로 발현되었을 뿐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시금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어떤 동물들 보다 현명하고 이성적이지만 가장 파괴적이고 감정적인 것 또한 인간이 아닐런지. 인간에게 내재된 자기 파괴의 욕구, 지구가 정해놓은 생태계의 근본 원리 등을 생각해 보면 현 인류의 미래도 그닥 밝지만은 않은 것 같다. 처절한 나비인들의 모습에 괜스레 우울해지고 앞날이 두려워졌지만 그래도 결말만큼은 정말 잘 쓰여진 것 같다. 또 다른 가능성을 꿈꾸고 상상해 보게끔 만든달까. 우리도 먼 옛날 다른 태양계의 지구에서 떠나온 호모 스텔라리스의 후손일지도, 혹은 우주 저 먼 곳에 새로운 지구를 찾아 여행을 떠난 나비인들이 이미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뛴다. 오늘밤은 하늘을 오랫동안 들여다 보고 있을 것 같다.


"우리 모두 태어날 때는 다 주먹을 꽉, 단단히 쥐고 있지."
"그렇지만 나중에는 손을 활짝, 맥없이 펴고 죽죠."
"왜일까요?"
"우리를 태어나게 했고, 우리가 90년 동안 매달려 왔던 싸움에서 해방되기 때문이지." -p.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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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커레이드 호텔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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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 쓰인 매스커레이드는 '가면, 가면무도회' 라는 뜻이라고 한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답게 연쇄 살인의 해결이 스토리의 골자를 이루지만 그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자기 본연의 모습과는 다른 가면을 쓴 채 호텔을 드나드는 고객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갖가지 트러블들을 처리하면서  그들의 생각이나 감정, 인생 등을 마주하게 된다. 주로 씁쓸한 감정들을 느끼게 되는데 아마도 항상 가면을 쓴 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네의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역시 각자가 맡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 내기 위해 그에 걸맞은 가면을 쓰고, 본심과는 상관없는 말과 행동으로 누군가의 심을 사야 할 때가 많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타인들의 가면 뒤 모습을 보게 되는 날에는 상처를 받기도 하고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면서- 물론 의외의 좋은 면을 찾아내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불쾌한 면을 맞닥뜨리는 경우에 비해 현저히 적다.- 말이다. 그런 면에서 호텔은 가면무도회를 즐기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최적의 장소일 수 밖에 없다. 거짓 숙박 명부를 작성할 수도 있고,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호사를 누리며 호텔리어들의 대접을 온몸으로 받을 수 있으니까. 책 속에서 탈 많고 사연 많은 '진상 손님' 들을 만나다 보면 혹시 나도 언젠가 '손님은 왕이다' 라는 명목으로 어떤 점원을 피곤하게 만든 적은 없는지 곰곰히 되돌아 보게 된다. 다만 너무 이런 손님들이 자꾸 등장하다보니 연쇄 살인의 큰 줄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건지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이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연쇄 살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발상의 전환점을 찾게 된다는 점은 신선하다기 보다는 약간 개연성이 떨어지게 만드는 것 같다. 책으로 읽는 것보다 10개 정도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것이 더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책을 다 읽고 나면 가장 강렬하게 기억되는 것은 인간의 집념과 복수심이다. 막상 가해자는 기억도 하지 못하는 말이나 행동이 원인이 되어 누군가를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할 수 있다는 점이 몹시나 섬뜩하다. 실제로 자연재해나 사건, 사고 등으로 생성된 큰 트라우마보다 우리가 일상 생활을 영위하면서 사람들 간에 주고 받는 작은 트라우마가 더 무섭고 치료가 어렵다고 하니 아주 황당무개한 설정은 아니다. 나에게는 아주 사소하게 느껴졌던 사건이 타인에게 평생의 상처로 남아 그 사람의 일생을 망칠 수도 있고, 그로 인해 복수를 꿈꾸거나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매사 신중하게 생각한 뒤에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가 보다. 아무리 사려 깊게 행동해도 내가 미처 알지 못 하는 그 사람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누군가를 만나는 게 살짝 두려워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요새 같은 험악한 시대에는- 직업적으로 올바른 프로토콜대로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그것에 불만을 품고- 이 정도의 연쇄 살인을 계획할 또라이도 충분히 존재할 것만 같다. 그저 내 주변 가까이에 나타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매사를 신중하게 사는 수 밖에!!

 

 히가시노 게이고님은 그의 작가 생활 25주년을 기념하며 우리에게 참 소중한 교훈을 남겨 주셨다. 항상 주변을 조심할 것, 특히 극단적인 또라이가 존재하지 않도록 매의 눈으로 주변을 살필 것, 그리고 매 순간 말과 행동에 신중을 기할 것!

 

덧.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만 가지고 판단 한다면 그의 글에서 기발한 트릭이나 신선함을 느낄 수 없다는 분들이 많다. 확실히 그의 최근작들의 경우 추리소설계의 거장답다라는 느낌은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오히려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고 소설 속에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사회적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담아내는 점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상상력과 생각을 더 오랫동안, 많은 작품을 통해 만나보고 싶다!         

 

호텔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손님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면무도회를 즐기기 위해 호텔에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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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주식회사
사이먼 리치 지음, 이윤진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지구의 운명이 대책없는 연애 고자들, 샘과 로라에게 달렸다! 심각하게 내성적이고 폐쇄적인 삶을 영위해 오던 그들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키스 해야만 지구 종말을 막을 수 있다. 이들의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줄 구원 투수는기적부 소속 천사 샘과 일라이자이다. 우리 천사들은 무수한 우연과 기적을 만들어내 제한시간 이내에 그 둘의 만남과 키스를 성사시킬 수 있을까?

만화같은 설정과 책표지가 눈을 끄는 책이다. 신이 정말 존재하는 걸까 불신스럽기만한 현대에 천사와 종말 이야기라니 유치하진 않을까 반신반의 하며 첫장을 넘겼다. 그런데 염려와는 달리 가독성도 좋고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전반적으로 유머러스하고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이어져 통통 튀는 맛이 있고, 그 안에 현재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고민, 양면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기도와 기적의 의미, 매너리즘에 빠진 천사들 등 나름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요소들- 그 분에 대한 믿음이 신실한 분도 아닌 분도, 모두- 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그래도 절대 내용이 무거워지지 않고 시종일관 상큼발랄함을 유지한다. 등장 인물들 마저도 평균 이하(?) 의 삶을 영위하고 있음에도 찌들고 우울한 구석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타고난 성격이 만사태평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재미없는 인생을 살면서 나름의 소소한 재미 -객관적으로는 전혀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 를 찾아가며 살기 힘들 것이다. 모자란 듯 하면서도 용케용케 살아가는 주인공들을 보면 묘하게 위로도 되고 힘이 난달까. 정말 한 편의 유쾌한 단막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다만 읽다 보면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하는데 다름 아닌 두 주인공 때문이다!! 지구에 종말을 던지기로 결심한 하나님도 황당하지만 그 실행 여부를 건 내기가 샘과 로라의 사랑이라니... 정말 이런 일이 천국과 지구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당장 뉴욕으로 날아가 이 둘 입술 박치기부터 시킬 것 같다. 이들의 연애 과정을 보고 있자니 정말 답답하고 지지부진하고, 나중엔 헛웃음까지 터진다. 요새도 이런 인물들이 있을까 싶지만 잘 생각해 보면 주변에 적어도 한 둘은 있다. 번번히 타이밍 놓치고 고심고심한 멘트는 허술하기 짝이 없고, 자신감 제로인 사람들. 이런 사람 하나만 보고 있어도 속이 터지는데 그 짝사랑 상대까지 이러한 상태라면?! 으으으으으으 정말 환상의 짝궁이다. 그래서 지구 종말의 카운트 다운 따위는 잊고 이 두 사람의 연애 거는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읽다 보면 지구야 어찌 됐든 니네 둘은 좀 되라 되! 라고 외치게 된달까. 그만큼 어리숙하고 사랑스런(?) 한 쌍이다. 한 마음 한 뜻으로 샘과 로라를 욕하며 답답해 하는 천사들, 크레이그와 일라이자도 도찐개찐인 것 같다만. 이 대책없는 커플의 연애 코치마저 이 모양이라니 상황 참 웃기다.


누가 지구 종말을 이토록 심각하지 않고 유쾌하게 그릴 수 있을까. snl 작가였던 그의 이력이 돋보이는, 즐거운 책인 것 같다! 해학과 풍자를 품은 아니러니한 상황들을 소재로 사용한 점도 그렇고 특징이 없는 듯 하면서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들을 봐도 그렇다. snl의 짧은 꽁트 안에 온전히 녹아들면서도 무언가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는 특징적인 배우들처럼! 친근감있게 그려진 천사들과 하나님을 보는 재미로 시종일관 웃으며 읽기 좋다. 더불어 늘 불평만 하고 사는 인간들과 지구를 돌보느라 지쳐있을 천국주식회사 직원들과 CEO들을 생각해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너무 불평불만만 하면서 살아가는 건 아닌지, 실제로 작은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눈치채지 못한 채 무심하게 지나치는 건 아닌지. 하루하루를 좀 더 즐겁고 따뜻한 마음으로 보내길 기도해 본다.

인간들한테 계시를 보내는 건 어려운 일이예요. 인간들은 100번 중 99번은 계시를 놓치죠. 아무리 대놓고 알려줘도 마찬가지예요 -p.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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