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유명한 두 작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와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 의 오마주라고 한다. 두 권 다 책으로는 접해보지 못 했지만 오리엔탈특급살인사건의 경우 영화로 보았기 때문에 내용은 익히 알고 있었다.고립된 섬이 아닌 바다 위의 호화 요트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이라는 점, 그리고 치정 살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이는 것 같다. 특히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닌 '하루카=나' 라는 인물의 시점에서 그려진 점이 독특하다. 비록 다른 이들의 마음까지는 알 수 없지만 하루카의 감정 변화와 내면 세계가 디테일하게 그려지기 때문에 더 생생하고 사실적인 느낌이 든다. 망망대해 위 요트 속에 고립된 상황 자체도 하나의 거대한 밀실이 되어 폐쇄적이고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여기에 살인 또는 자살과 관련된 탑승객들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재판관의 등장은 강압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처럼 느껴져 두려움을 배가 시킨다. 모두가 서로를 의심하며 짝을 이뤄 움직이지만 사람들은 하나, 둘 차례로 죽어 나간다. 다음은 나일지도 모른다는 막막함, 어쩌면 누군가 신분을 숨긴 채, 혹은 탑승객과는 다른 경로로 비밀스럽게 탑승한 제 3의 인물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하루카의 고립감과 공포감이 극한에 달하는 순간 그녀의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뻔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결말과 어느 정도는 예상 해봄직한 트릭에 실망감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근래의 작품들처럼 고도의 트릭이나 암호가 숨겨져 있지는 않기 때문에 나름 하나씩 죽어나가는 일이 지루하고 평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 작품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명작들에 대한 향수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작가와의 두뇌싸움도 좋지만 지나치게 얽히고 복잡해져서 진을 빼놓은 근래의 소설들과는 차원이 다른 재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본능과 심층 심리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탄탄하게 쓰여진 소.설.을 읽는 본래의 재미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이 전혀 실망스럽지 않다. 오히려 잘 알려진 작품을 자신만의 색깔로 믹스해 낸 작가의 필력과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능력이 감탄스럽다. 게다가 그간 추리소설들을 읽으며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은 느낌이다. 실질적 사형제도의 폐지로 인하여 우리의 불완전한 형법체계는 피해자 가족들의 권리나 보상보다 범죄자의 인간적 존엄성을 보호하는 데 더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과연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직접 가해자에게 복수를 할 경우 그 정당성이 성립하는가?! "성경에는 이렇게 씌어 있어요. 악으로 악을 갚지마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우리는 정말로 복수할 자격을 부여받은 걸까요?" 생각이 많아지면서 할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씀, 선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다고 하신 이야기가 떠오른다. 오늘도 나는 의도치 않게 얼마나 많은 죄를 지은걸까 반성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