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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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뉴스에도 가슴 아프고 화나는 소식이 들렸다. 여전히다단계 사기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이 몇 천명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화장품 방문판매 업체였는데 사장이 60억원 가량을 챙겨 이미 해외로 도주했다는 소식이었다. 주로 노인들이나 가정 주부들이 피해자들이라고 하던데, 절망적인 심정이 오죽할까?! 아무래도 남아도는 여유돈을 굴리려고 투자한 사람보다 한 푼, 두 푼 아끼고 아껴서 모아뒀던 쌈지돈을 맡겨버린 사람이 더 많을텐데. 하루 아침에 그 돈이 다 사기꾼의 뱃속으로 꿀꺽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게다가 순진하게 좋은 것을 소개시켜 준다는 생각으로 가까운 지인들을 끌여들인 분들도 많을터.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버리고 오랜 세월 지인들과 쌓아온 정만큼, 혹은 그 이상의 원망과 증오로 바뀔 것이다. 정말이지 안타까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다단계 수법은 다양한 방송 매체를 통해 익히 알려져 있지만 끊임없이 이런 류의 사건은 계속 된다. 당한 사람이 바보라고 단정 짓기에는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뉴스로 막상 접할 때는 저게 뻔히 다단계인데 왜 속을까 싶지만 몇 다리 건너지 않아도 주변에 피해자들이 존재한다. 언제, 어떻게 내가 혹은 나의 가까운 지인이 빠져들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대체 무엇이 이렇게 사람을 현혹시킬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은 '악은 과연 전염되는가?' 라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범인들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악한 그리고 빠른 -두뇌 회전과 악의를 가진 사람부터 순박하고 착한 보통의 소시민들까지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어떻게 다단계 시스템을 구축하고 사람들을 속여 나가는지, 혹은 어떻게 이러한 그물에 걸려드는 것인지 그 과정을 상세히 보여준다.

이와 같은 범죄의 심각성과 폐해를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좀 더 본질적인 질문 마저 던진다. 과연 피해자와 가해자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의 문제다. 피라미드 아랫쪽에 위치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두 입장에 모두 놓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피해자의 입장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실질적으로 법의 심판을 받는 우두머리와 간부 밑에는 피해자이지만 가해자에 더 가까운 층이 분명 존재한다. 피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바닥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착취를 하고 개인적인 이득을 챙긴, 그럼에도 처벌에서 교모하게 피해간 괘씸한 사람들 말이다. 어느 범주까지 죄를 물을 것인지, 보상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의 문제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아무래도 초반엔 책의 전개가 느린감이 없지 않지만 확실히 미미여사답게 뒷심을 발휘한다. 형사도 탐정도 아닌 스기무라가 사건에 조금씩 접근해 가는 방법도 흥미롭다. 그것이 더디고 답답하게 느껴지기 보단 되려 현실감을 주는 요소인 것 같다. 엄청난 관찰력과 통찰력도 없고, 기가 막힌 우연의 도움없이 정말 개미 근성으로 하나씩 하나씩 정보를 모은다. 마구잡이로 모아진 정보들이 조금씩 얼킨 실타래를 풀듯이 정리되어 하나의 목표점을 팍 찍어낼 때의 쾌감이란! 사실 나의 경우 이번 편은 사건 자체의 반전보다 스기무라 삶의 개인적인 반전이 더 놀라웠다. 전편까지 지나치게 안정되고 행복한 스기무라가 좀 삐딱하게 보여질 때도 있었는데, 전혀 이번 편에서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 일어나자 괜히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꼭 행복에 겨운 사람의 불행을 바란 것처럼. 그래도 이번 편의 사건을 계기로 그가 진정한 탐정의 길을 걷게 된다니 기대가 되고 설렌다. 다음 작품에선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 얼른 만나고 싶다.


악은 전염된다. 아니, 모든 인간이 마음속에 깊이 숨겨 가지고 있는 악, 말하자면 잠복하고 있는 악을 표면화시키고 악행으로 나타낙 하는 `마이너스의 힘` 은 전염된다고 할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절대 반지` 를 갖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 대체물이라면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잘못된 신념이고, 욕망이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말이다. -p. 454

어떤 베드로에게나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는 예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거짓말을 견디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에겐 예수 따위 없다, 예수 따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무서운 것이 전혀 없으리라. (......) 진실은 결코 아름답지는 않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진실이 아니다. 끝나지 않는 거짓 쪽이다. -p. 513


둘 중 하나일 고라고 생각하오, 라고 했다.
"중간이 없는 거요. 텅 비었거나, 꽉 찼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사람을 속일 수는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바꾸어 말한다면 그것은 `내가 없다`거나 `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닐까. -p. 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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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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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돌아온 주인공 남자에게 "결코 저를 모르는 당신께" 라는 호칭의 제목으로 쓰여진 낯선 여인의 편지가 도착한다. 불안함이 느껴지는 여인의 필체로 쓰여진 편지는 무려 24장. 그녀는 놀라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이가 죽었기때문에 자신도 곧 따라 죽을 것이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비밀을 밝히노라고. 갑작스런 아이 이야기에 이 남성이 아이의 아버지일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가슴 먹먹한 사연일 줄은 미처 몰랐다. 그저 흔하디 흔한 하룻밤 사랑이야기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여자의 사랑은 너무나 깊고 위대했다. 비록 그는 그녀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 할지라도.

삼일 간의 사랑으로 그의 아이를 갖게 된 것이지만 그녀는 훨씬 오래 전부터 그를 사랑해왔다. 그녀 나이 13살 때 그를 처음 만났고 그의 눈빛과 목소리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사랑이란 감정이라는 것도 채 모를 나이였지만 그녀는 매일 그를 관찰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했다. 편지 속 그녀의 이야기처럼 어쩌면 그녀는 그에 대해서 자신만큼이나 잘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이중적인 면을 꿰뚫어 보고 있었고, 그가 삶을 대하는 방식인 -유희적이고 경쾌한 것을 쫓고 자유분방한 태도- 를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침묵 속에서 존재했다. 마침내 18살에 그와 사랑을 나누고 아이가 생겼음에도 그녀는 그를 속박하지 않기 위해 떠났다. 약 십여년이 흐르고 클럽에서 만나 여전히 그녀임을 모르는 그와 사랑을 나누고, 그가 몰래 그녀의 외투에 고액지폐를 넣는 것을 보았을 때도 여전히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단 한순간도 그녀를 그녀로 대하지 않았더라도, 낯선 여인으로 혹은 창녀로 느꼈더라도 결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물론.. 완전 바보같은 여자다. 지고지순함을 넘어 지나친 순종과 집착이 답답하게 만든다. 이 뻔뻔한 바람둥이 남자도 그렇고. 어쩐지 전통적인, 그리고 남자들이 이상적으로 느끼는 여성상을 들이밀며 여자를 비하하는 것 같은 느낌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을 떠나 그에 대한 그녀의 변함없는 사랑만큼은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아이, 사춘기 소녀, 성숙한 여인이 되어감에 따라 사랑에 대해, 그에 대해 변해가는 감정과 깊이를 너무나 세밀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덧 그 여인에게 동화되어 -옳고 그름을 떠나- 같이 가슴이 저려오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은 채 한 사람을 이렇게 무안한 포용력으로 감싸안을 수 있다는 점이 존경스럽기도 하다. 지금의 우리들은 사랑 앞에서 조차 너무 많은 잣대를 들이밀고 재보지 않나. 사랑할 것인가, 말 것인가. 또 상처받지 않기 위해 먼저 상처를 주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 적어도 그녀가 품은 그 순수하고 숭고한 마음은 정말 부럽다. 그녀의 무한한 사랑을 받으면서도 모른 채 살아온 그의 무지와 무감각함이 불쌍하기도 하고. 

남성인 작가가 사랑에 빠진 여자의 심리를 완벽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점이 굉장히 놀랍다. 여자인 나보다 더 잘 아는 느낌이다. 특히 나이와 함께 변해가는 사랑의 형태를 어쩜 그리 섬세하게 잡아낼 수 있는지. 너무 뻔한 사랑 이야기를 편지글로 이토록 흥미진진하게 끌어내는 그의 상상력과 필력에 감탄하게 된다. 옮긴이의 글을 보면 체스이야기와 낯선 여인의 편지가 시대적 배경, 인물과 연관지을 수 있다고 한다. 그가 쓴 '어제의 세계' 라는 책인데, 번역이 되어 있다면 꼭 읽어보고 싶다. 등장 인물들을 시대사적 맥락으로 이해해보는 것도 몹시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 같다.


저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미사에는 가지 않을 겁니다. 전 오직 당신만을 믿고 당신만을 사랑하며 당신 안에서만 계속 살아가려 합니다...... -p.148


그는 감정에 스치는 기억을 느끼긴 했지만 기억하진 못했다. (...) 그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여인을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을 생각하듯 육체 없이도 정열적으로 생각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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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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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강렬한 이야기이다. 두 개의 스토리 라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세계 챔피언과 무명씨의 체스 경기고, 다른 하나는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군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면서 고문과 심문을 당하게 된 B박사의 옥살이에 대한 과거 회상이다. 

나는 그의 옥살이 과정이 굉장히 흥미로웠고 놀라웠다.  그의 옥살이는 여느 유대인들과는 달랐다. 나치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고 어느 호텔 방 안에 감금되었다. 여느 수용자들과 달리 안락한 잠자리와 규칙적인 식사 등 육체적인 편안함은 보장 받았지만 문제는 온전히 혼자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구와도 말을 섞을 수 없고, 어떠한 활동 자체를 할 수 없어 심문 때까지 멍하니 방 안에 고립되어 있는 것 외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무의 상태에 감금된 것. 고된 노역과 실험에 동원된 사람들에 비하면 굉장히 좋은 환경이지만 사람이 혼자서 잉여스럽게 보내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그 뒤에 찾아오는 막막함과 공허는 그야말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다. 정신줄을 놓게 만들어 일단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 미친 무의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때문에 무엇이든 불게 만든다. 사람을 완전히 황폐하게 만드는 고난이도의 정신 공격이다. 

그런 그에게 우연히 손에 넣은 체스 교본집은 신의 선물과도 같았다. 블라인드 체스를 통해 활력과 집중력을 얻어 본인의 정신을 바로 잡을 수 있었지만 맛있는 음식도 반복해서 먹으면 질리는 법. 체스 교본은 더 이상 그에게 어떠한 감흥을 주지 못 하고 그는 다시 공허와 무력감에 휩싸인다. 이러한 극닥적인 상황은 그를 인위적인 정신분열의 상태까지 몰고 간다. 자신을 완전히 둘로 나누어 검은 말과 흰 말이 되는 것이다. 얼핏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지만 완벽한 적막감과 고립감, 그 무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 견딜 수 없는 무료함만큼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없으니까. 

남보다 나를 이기는 것이 더 어렵다 했는가. 그는 끝없는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완벽하게 나눠진 흑백의 말들은 끊임없이 전략을 세우고 상대의 수를 앞서가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게 만들고 머리 속의 체스 경기는 온 몸을, 뇌를 뜨겁게 달군다. 집착과 광기의 끝을 경험하는 것, 극한의 공포감을 느끼게 될 것 같다. 언제 또 광기에 물들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평생을 따라 다닌다면 얼마나 그 삶이 불행할지. 나는 체스 게임에 대해 문외한이나 다름 없지만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뭔가 심장이 쫄깃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체스를 온전히 이해하고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손에 땀을 쥐면서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미드 중에 정신분열인 주인공이 각종 사건을 해결하는 드라마 Perception 이 있다. B박사는 이 미드의 주인공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남들보다 월등한 두뇌 능력을 갖추고 있는 셈이고, 무의식과 소통함으로써 여느 사람보다 직감적으로 뛰어날 것이다. 하지만 현실과 상상 간의 구분 능력이 떨어지게 되고 자신의 무의식의 세계에 빠져 버리면 완전히 현실로 부터 단절되게 된다. 문득 부럽기도 한 능력이지만 한 개인의 삶만 놓고 보면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이와 같은 내적 갈등과 개인의 문제를 짧은 단편 안에 압축적으로 담아 놓았다는 점, B박사 외에 매코너나 첸토비치 등 주변 인물의 성격적 묘사가 매우 세밀하다는 점에서 작가의 내공이 느껴지는 책이다. 그 와중에 박진감 넘치는 체스 경기 또한 직접 눈 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이 책은 체스 이야기와 낯선 여인의 편지라는 두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 진다!

우리를 그저 완벽한 무의 상황에 세워두었던 겁니다. 잘 아시겠지만, 지상의 어떠한 것도 그보다 더 강력하게 인간 영혼을 압박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 외부의 압력 대신 내부로부터의 압력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지요. 그 내부로부터의 압력이 결국 우리의 입술을 폭파하듯 열게 하는 것입니다. -p. 18

게임의 즐거움이 게임의 욕망이 되었고, 게임의 욕망이 다시 게임의 강박과 광기와 광적인 분노가 되어 깨어있는 시간뿐 아니라 점차 잠자는 시간까지 파고들었습니다. -p.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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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와 죽은 자 스토리콜렉터 3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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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지는 자들은 고통을 맛보아야 한다. 그들이 무관심, 욕심, 허영, 부주의를 통해 초래한 것과 똑같은 고통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넬레 노이하우스의 신작을 드디어 읽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박진감 넘치게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과 손에 잡힐 듯 말듯 한 범인의 정체, 그리고 그의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활약이 흥미진진하다. 물론 각자의 애인이 있고, 이번에 피아가 크리스토퍼와 결혼을 했지만 두 사람의 케미는 정말 끝내준다. 서로에게 부족한 면모를 채워주는 찰떡궁합인데다가 서로가 무한 신뢰를 보내는 모습이 내심 두 사람이 잘 되지 않을까 라는 망상을 품게 만든다. 특히 피아에게 심적으로 의지하는 보덴슈타인의 모습은 어쩐지 보호본능을 일으킨달까?!

일본 추리 소설과는 확연히 다르게 잔혹한 방법의 살인이나 수사에 혼선을 일으키기 위한 고도의 트릭 같은 것은 없다. 물론 사건을 뚝딱 해결하는 천재적인 명탐정도 없고. 보통의(?) 형사들이 법의학적 증거과 탐문 수사를 벌여 그 결과들을 취합하고 천천히 진실에 접근해 나간다. 여기에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육감이나 상상력이 더해져 사건 해결이 급 물살을 타고 진행된다. 의심가는 여러 용의자들 중에서 과연 범인이 누구일지 주인공들과 함떼 추리해 나가는 과정이 있어 책에 대한 몰입도가 더 높아지는 것 같다. 진짜 범인이라고 밝혀지기 전까지는 용의선상에 오른 모두가 의심스럽고, 범인으로 의심받으면서까지 지키려고 하는 그 이면의 비밀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해진다. 누구나 감추고 싶은 비밀 몇 가지는 간직한 채 살아가기 마련인데 살인 혐의를 뒤집어 쓸만큼 큰 비밀이란 무엇일까 절로 호기심이 인다. 사건들과 관련된 퍼즐 조각들이 나열되고 나면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퍼즐을 완성해 나간다. 그 적절한 속도의 전개가 책을 꼼꼼하게 읽음으로써 오랫동안 재미를 꼽씹을 수 있게 해주는 요소로 작용하는 것 같다. 오랜 시간에 걸쳐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사건과 단서들이 모여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그려낼 때 느껴지는 짜릿함이란!

게다가 여러 사건들의 관계자들의 심리 묘사가 탁월할 뿐 아니라 피아나 보덴슈타인의 개인으로서의 삶과 그들의 고민 등이 살인 사건과 균형을 이루며 전개 된다. 가끔 사건과 개인의 삶 모두를 보여 주다가 균형을 이루지 못 하고 허겁지겁 개인의 고민을 마무리 하는 책들을 보게 된다. 그럴 땐 아쉬움이 참 많이 느껴지고 추리 소설의 한계인가 하는 의문도 들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넬레 노이하우스의 책은 그러한 걱정이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통쾌하게 보여준다. 사회 생활을 하고 나이를 먹어 가면서 직업적, 개인적으로 맞딱드리게 되는 고민이나 심리 변화를 깊이 있게 다룬다. 사랑 받지 못한 여자에서 산 자와 죽은 자에 이르기까지 타우누스 시리즈가 한 권, 한 권 이어질 때마다 주인공들의 성장과 변화를 함께 지켜볼 수 있다.

매 권마다 살인 사건과 관련된 사회적 문제들을 부각시켜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는 점 역시 넬레 노이하우스의 장점이다. 이번 책의 경우 장기 기증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동안 장기 기증이라는 건 생명을 구하는 훌륭한 일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의사들의 윤리적 문제와 병원에서 환자 가족들에게 가하는 심리적&도덕적 압박, 그리고 뇌사 판정의 명확한 기준 등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이슈들을 억지로 끼어 넣었다는 느낌이 전혀 없을뿐만 아니라 그녀의 깊이 있는 통찰력과 방대한 지식 덕분에 놀라게 되었다. 그래서 매번 다음 권은 언제 나오려나 목이 빠지게 기다리게 된다. 이번 사건은 어떨지,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케미는 얼마나 더 좋아졌을지, 각각 애인은 생겼는지 등등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2016년을 목표로 타우누스 시리즈의 다음 책을 구상하고 있다는데 예정대로 최대한 빨리 출간되기를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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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주는 레시피
공지영 지음, 이장미 그림 / 한겨레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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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공지영 작가님의 소설책을 단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소설 자체를 거의 읽질 않았다. 작가의 의해 창조된 세계와 주인공 자체가 허구이기 때문에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주겠는가.. 하는 의문이 컸기 때문이다. 어차피 다 거짓말 혹은 상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소설을 읽지 않았다니 지금으로선 믿기질 않는다. 어떠한 이유로 자리잡게 된 고정관념인지 모르지만 참 편협하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공지영 작가님의 책은 에세이로만 접해봤다. 특히 지리산 학교 이야기와 딸에게 전하는 편지글이 인상적이었다. 풍파를 많이 겪은 그녀가 담담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와 행복해지기 위한 조언들을 전해주고 그와 관련된 책들을 소개해주는 것이 정말 멋지게 느껴졌다. 엄마와 딸이 책을 통해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여느 모녀 사이와는 달라 보였달까.

이번 책 역시 딸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들이 쓰여있는데 전작과 다른 점이라면 책 대신 그녀만의 간단한 요리법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이런 날에는 이런 음식을 해먹는 것이 어떨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더이상 어린 딸이 아닌 사회에 첫걸음을 내딛은 딸에게 해주는 조언이라 지금의 나에게는 더 와닿는 것 같다. 역시 여자는 먹으면서 위로를 받고, 기쁨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푼다는 점에서 공감이 가기도 하고. 단정하게 느껴지는 간결한 그녀의 문장들 속에서 딸에 대한 걱정과 사랑이 느껴져 마음이 참 따뜻해진다. 가끔은 단호하게 세상 살이에 대한 우리의 착각에 대해 쓴소리를 들려주지만 우리의 서투름 마저 하나의 과정임을 끊임없이 인지시켜 준다. 어쩜 이렇게 듣고 싶었던 말들만 쏙쏙쏙 골라서 위로를 해주시는지. 위녕이 궁금해하는 질문들도 결국 내가 성인이 되면서 끊임없이 상처받고 고민해 오면서도 답을 찾지 못 했던 -혹은 스스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정말 사려 깊고 인내심 강한 새엄마가 생긴 느낌이다!!! 작가님의 결혼 생활을 생각해 보면, 분명 자식들에게는 충격적이고 힘겨운 일이었겠지만...... 그래도 이런 엄마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위녕이 정말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나도 우리 엄마를 떠올려 본다. 20살 때부터 우리는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얼굴만 마주치면 싸우는 일이 다반사였던 것 같긴 하다. 나는 애교 많은 딸도 아니거니와 우리는 생각보다 닮은 구석이 너무 없어서 엄마가 별로 내 고민들에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하질 않았다. 설령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해도 엄마 역시 걱정이 앞선 나머지 늘 따스한 조언보다는 잔소리가 먼저였던 것 같다. 혹은 너무나 긍정적이고 소녀 감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하시거나. 어느 쪽이건 간에 결국 자연스럽게 싸움으로 이어지고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는 종료되기 일쑤였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내가 너무 잘못했었다. 사실 엄마가 해주는 말이나 공지영 작가님의 글이나 똑같은 내용인데, 왜 그렇게 무시하고 흘려 듣고 말았는지. 되려 소녀 감성을 유지하고 있는 엄마가 나보다 훨씬 강한 정신과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엄마가 좋은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는 일 자체를 막아 놓고 위녕을 부러워만 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본다.

그래도 확실히 말보다는 글이 나은 것 같다. 엄마가 그 순간을 참지 못 하고 화가 나서 감정적으로 쏘아대는 일 없이 좋은 내용을 추려서 차분히 들려줄 수 있을테니까. 요새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을 담아 편지를 보내볼까, 아니면 엄마의 소녀 감성을 충족시켜줄 좋은 곳에 가서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워볼까?! 책 속에 담긴 레시피를 가지고 요리를 해서 엄마를 대접해 봐도 좋을 것 같다. 평생을 살면서 필연적인 모녀지간의 싸움을 피할 순 없겠지만 서로를 더 많이 이해하고 의지하는 다정한 친구 사이가 될 것이다. 이렇게 내가 먼저 노력한다면! 당장 오늘부터, 엄마가 좋아하는 와인과 함께 우아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 어떤 삶의 지혜들을 들려주실지 귀를 기울여야지.

오늘부터는 나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겠다. 진정한 나 자신의 모습과 내가 희망하는 모습 사이의 괴리에 대해 성찰해 보는 것은 꼭 해내야만 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긴 인생동안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무의미한 삶, 무언가 결핍된 느낌 속에 빠져 고독한 삶을 살게 될테니까. 이런 상황에 기적이라던가, 행운같은 것은 기대조차 할 수 없겠지. 더불어 침묵하고 감사하는 법를 익히리라. 내면의 침묵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온갖 감정의 휘둘림을 막아주고 결국 우리를 자유로 이끌어 준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로 나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함으로써 얻어지는 자부심을 가져야만 가능하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바로 이 순간을, 내가 있는 이 곳을!" 소중히 여겨야 겠다. 나의 실패와 시련들 때문에 슬픔에 잠셔 삶을 비관하는 날은 이제 그만! 이 또한 다 지나갈 것이며 훗날의 성숙한 나를 위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해 보련다. 그래, 삶이 공평하지 않음을, 평화롭고 행복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다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가 미처 보지 못 했던 삶의 이면에 존재하는 신비를 맞아하게 될 것이라 믿자. 잊지 말자.

지금, 여기, 나 자신 그리고 사랑하며 감사하기

우리가 회피하고, 무시하고, 도망치고 싶어 하는 바로 그것이 실은 우리가 진정 풀어야 할 숙제이고 넘어야 할 언덕이며 결국은 우리를 진정으로 성장시켜주는 열쇠임을 말이야. -p. 18-19

산다는 것도 그래. 걷는 것과 같아. 그냥 걸으면 돼.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살면 돼. 그 순간을 가장 충실하게, 그 순간을 가장 의미 있게, 그 순간을 가장 어여쁘고 가장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만들면 돼. 평생을 의미 있고 어여쁘고 성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살 수는 없어. 그러나 10분은 의미 있고 어여쁘고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살 수 있다. 그래, 그 10분들이 바로 히말라야 산을 오르는 첫 번째 걸음이고 그것이 수억 개 모인 게 인생이야. 그러니 그냥 그렇게 지금을 살면 되는 것. -p. 27

어른이라는 것은 바로 어린 시절 그토록 부모에게 받고자 했던 그것을 스스로에게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것이 애정이든 배려든 혹은 음식이든. -p. 30


우리가 성장했다는 표시 중 하나가 바로 그거야. `그래서` 가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p. 47


신비하게도 늘 베풀어주던 모든 A는 늘 받기만 하던 모든 B에게 배신당한다. 심리학자들은 이걸 무엇이라고 하는지 모르나 나는 그것을 `굴욕으로부터의 비뚤어진 탈출` 이라고 불러. 늘 받던 B들은 늘 주는 A에게 그토록 원하는 것을 받으면서 마음 속의 분노를 더 키워간다는 거야. 왜냐하면 B가 A에게 그토록 필요한 것들을 받을 때마다 B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자신을 직시하게 되니까. 횟수가 거듭되면 감사보다 굴욕을 느끼기가 훨씬 쉬우니까. -p. 107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어떤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에 개한 우리의 표상이다. @안젤름 그륀 신부님 -p. 117

네가 어떤 것에 대해 가지는 느낌이 참이라면 그것은 일제히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해. 그러나 가난을, 그런 학벌을 그리 불행해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 -p. 117

역시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질리지 않는 것 같아. 엌저면 사람도, 어쩌면 관계도, 마지막으로 삶조차 단순한 것이 가장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좋다든가, 그냥 아껴주고 싶다든가 하는 그런....... -p. 121


남자는 변하지 않으며 변할 생각도 없다. 더더군다나 여자에 의해 변하고 싶은 마음을 먹느니 고릴라들과 동거하는 것을 배우러 정글로 들어갈 거라는 거다. 만일 여자에 의해 변할 생각이 있었다면 이미 자신의 엄마에게 잘 변해 네게로 왔겠지. -p. 128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사실과 사실 아닌 것, 사실과 망상, 사실과 집착, 사실과 환영 사이를 구분하게 되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 모든 현상 속에서 사실을 골라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p. 180

"나빠 보이기도 하는 일이 일어나는데요, 그건 좋은 일로 가는 모퉁이일 뿐이니까요." -p. 186

사람은 절대 가지고 있을 때, 편안할 때 새로운 것을 시작하지 않아. 그래서 고통은 우리에게 늘 새로운 길의 모퉁이를 돌게 해주는지도 모르겠다. -p. 203


"밤새 생각해보았는데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열쇠가 있었다면 그건 감사였어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내게 남은 것, 내게 아직도 주어지고 있는 것, 내가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을 자각한 순간 고통은 힘을 잃었어요. 왜냐하면 남은 것이 잃어버린 것보다 훨씬, 아주 훨씬 더 많았거든요." -p. 207


덜어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채워내지 못한다. (......) 삶은 우리에게 온갖 좋은 것을 주려고 손을 내미는데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손이 없는지도 몰라. -p. 231

네가 우울해하는 데는 수만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딱 한 가지야. 우선 몸을 움직이고 맛있는 것을 먹고(네 몸에 좋은 것, 살도 안 찌는 것 말야) 따뜻하게 너를 감싸는 것. 그리고 좋은 말씀을 읽거나 듣고 밝은 생각을 하는 것. -p. 239-240


우리는 모두 외롭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늘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렵고 복잡하고 어리석은 길을 돌아 돌아 원래 있어야할 그 쉬운 지점으로 온다. 그리고 어떤 유혹이 있어도 우리가 올바르고 선하게 살면 끝이 좋을 거라는 것을 마음속 깊이 알고 있단다. 이게 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운명의 전부이다, 위녕. -p.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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