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이다. 두 개의 스토리 라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세계 챔피언과 무명씨의 체스 경기고, 다른 하나는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군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면서 고문과 심문을 당하게 된 B박사의 옥살이에 대한 과거 회상이다. 

나는 그의 옥살이 과정이 굉장히 흥미로웠고 놀라웠다.  그의 옥살이는 여느 유대인들과는 달랐다. 나치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고 어느 호텔 방 안에 감금되었다. 여느 수용자들과 달리 안락한 잠자리와 규칙적인 식사 등 육체적인 편안함은 보장 받았지만 문제는 온전히 혼자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구와도 말을 섞을 수 없고, 어떠한 활동 자체를 할 수 없어 심문 때까지 멍하니 방 안에 고립되어 있는 것 외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무의 상태에 감금된 것. 고된 노역과 실험에 동원된 사람들에 비하면 굉장히 좋은 환경이지만 사람이 혼자서 잉여스럽게 보내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그 뒤에 찾아오는 막막함과 공허는 그야말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다. 정신줄을 놓게 만들어 일단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 미친 무의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때문에 무엇이든 불게 만든다. 사람을 완전히 황폐하게 만드는 고난이도의 정신 공격이다. 

그런 그에게 우연히 손에 넣은 체스 교본집은 신의 선물과도 같았다. 블라인드 체스를 통해 활력과 집중력을 얻어 본인의 정신을 바로 잡을 수 있었지만 맛있는 음식도 반복해서 먹으면 질리는 법. 체스 교본은 더 이상 그에게 어떠한 감흥을 주지 못 하고 그는 다시 공허와 무력감에 휩싸인다. 이러한 극닥적인 상황은 그를 인위적인 정신분열의 상태까지 몰고 간다. 자신을 완전히 둘로 나누어 검은 말과 흰 말이 되는 것이다. 얼핏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지만 완벽한 적막감과 고립감, 그 무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 견딜 수 없는 무료함만큼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없으니까. 

남보다 나를 이기는 것이 더 어렵다 했는가. 그는 끝없는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완벽하게 나눠진 흑백의 말들은 끊임없이 전략을 세우고 상대의 수를 앞서가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게 만들고 머리 속의 체스 경기는 온 몸을, 뇌를 뜨겁게 달군다. 집착과 광기의 끝을 경험하는 것, 극한의 공포감을 느끼게 될 것 같다. 언제 또 광기에 물들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평생을 따라 다닌다면 얼마나 그 삶이 불행할지. 나는 체스 게임에 대해 문외한이나 다름 없지만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뭔가 심장이 쫄깃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체스를 온전히 이해하고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손에 땀을 쥐면서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미드 중에 정신분열인 주인공이 각종 사건을 해결하는 드라마 Perception 이 있다. B박사는 이 미드의 주인공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남들보다 월등한 두뇌 능력을 갖추고 있는 셈이고, 무의식과 소통함으로써 여느 사람보다 직감적으로 뛰어날 것이다. 하지만 현실과 상상 간의 구분 능력이 떨어지게 되고 자신의 무의식의 세계에 빠져 버리면 완전히 현실로 부터 단절되게 된다. 문득 부럽기도 한 능력이지만 한 개인의 삶만 놓고 보면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이와 같은 내적 갈등과 개인의 문제를 짧은 단편 안에 압축적으로 담아 놓았다는 점, B박사 외에 매코너나 첸토비치 등 주변 인물의 성격적 묘사가 매우 세밀하다는 점에서 작가의 내공이 느껴지는 책이다. 그 와중에 박진감 넘치는 체스 경기 또한 직접 눈 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이 책은 체스 이야기와 낯선 여인의 편지라는 두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 진다!

우리를 그저 완벽한 무의 상황에 세워두었던 겁니다. 잘 아시겠지만, 지상의 어떠한 것도 그보다 더 강력하게 인간 영혼을 압박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 외부의 압력 대신 내부로부터의 압력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지요. 그 내부로부터의 압력이 결국 우리의 입술을 폭파하듯 열게 하는 것입니다. -p. 18

게임의 즐거움이 게임의 욕망이 되었고, 게임의 욕망이 다시 게임의 강박과 광기와 광적인 분노가 되어 깨어있는 시간뿐 아니라 점차 잠자는 시간까지 파고들었습니다. -p.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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