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여행에서 돌아온 주인공 남자에게 "결코 저를 모르는 당신께" 라는 호칭의 제목으로 쓰여진 낯선 여인의 편지가 도착한다. 불안함이 느껴지는 여인의 필체로 쓰여진 편지는 무려 24장. 그녀는 놀라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이가 죽었기때문에 자신도 곧 따라 죽을 것이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비밀을 밝히노라고. 갑작스런 아이 이야기에 이 남성이 아이의 아버지일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가슴 먹먹한 사연일 줄은 미처 몰랐다. 그저 흔하디 흔한 하룻밤 사랑이야기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여자의 사랑은 너무나 깊고 위대했다. 비록 그는 그녀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 할지라도.

삼일 간의 사랑으로 그의 아이를 갖게 된 것이지만 그녀는 훨씬 오래 전부터 그를 사랑해왔다. 그녀 나이 13살 때 그를 처음 만났고 그의 눈빛과 목소리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사랑이란 감정이라는 것도 채 모를 나이였지만 그녀는 매일 그를 관찰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했다. 편지 속 그녀의 이야기처럼 어쩌면 그녀는 그에 대해서 자신만큼이나 잘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이중적인 면을 꿰뚫어 보고 있었고, 그가 삶을 대하는 방식인 -유희적이고 경쾌한 것을 쫓고 자유분방한 태도- 를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침묵 속에서 존재했다. 마침내 18살에 그와 사랑을 나누고 아이가 생겼음에도 그녀는 그를 속박하지 않기 위해 떠났다. 약 십여년이 흐르고 클럽에서 만나 여전히 그녀임을 모르는 그와 사랑을 나누고, 그가 몰래 그녀의 외투에 고액지폐를 넣는 것을 보았을 때도 여전히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단 한순간도 그녀를 그녀로 대하지 않았더라도, 낯선 여인으로 혹은 창녀로 느꼈더라도 결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물론.. 완전 바보같은 여자다. 지고지순함을 넘어 지나친 순종과 집착이 답답하게 만든다. 이 뻔뻔한 바람둥이 남자도 그렇고. 어쩐지 전통적인, 그리고 남자들이 이상적으로 느끼는 여성상을 들이밀며 여자를 비하하는 것 같은 느낌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을 떠나 그에 대한 그녀의 변함없는 사랑만큼은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아이, 사춘기 소녀, 성숙한 여인이 되어감에 따라 사랑에 대해, 그에 대해 변해가는 감정과 깊이를 너무나 세밀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덧 그 여인에게 동화되어 -옳고 그름을 떠나- 같이 가슴이 저려오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은 채 한 사람을 이렇게 무안한 포용력으로 감싸안을 수 있다는 점이 존경스럽기도 하다. 지금의 우리들은 사랑 앞에서 조차 너무 많은 잣대를 들이밀고 재보지 않나. 사랑할 것인가, 말 것인가. 또 상처받지 않기 위해 먼저 상처를 주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 적어도 그녀가 품은 그 순수하고 숭고한 마음은 정말 부럽다. 그녀의 무한한 사랑을 받으면서도 모른 채 살아온 그의 무지와 무감각함이 불쌍하기도 하고. 

남성인 작가가 사랑에 빠진 여자의 심리를 완벽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점이 굉장히 놀랍다. 여자인 나보다 더 잘 아는 느낌이다. 특히 나이와 함께 변해가는 사랑의 형태를 어쩜 그리 섬세하게 잡아낼 수 있는지. 너무 뻔한 사랑 이야기를 편지글로 이토록 흥미진진하게 끌어내는 그의 상상력과 필력에 감탄하게 된다. 옮긴이의 글을 보면 체스이야기와 낯선 여인의 편지가 시대적 배경, 인물과 연관지을 수 있다고 한다. 그가 쓴 '어제의 세계' 라는 책인데, 번역이 되어 있다면 꼭 읽어보고 싶다. 등장 인물들을 시대사적 맥락으로 이해해보는 것도 몹시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 같다.


저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미사에는 가지 않을 겁니다. 전 오직 당신만을 믿고 당신만을 사랑하며 당신 안에서만 계속 살아가려 합니다...... -p.148


그는 감정에 스치는 기억을 느끼긴 했지만 기억하진 못했다. (...) 그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여인을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을 생각하듯 육체 없이도 정열적으로 생각했다. -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