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친구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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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조금만 더 불행해줘."

여자들의 우정과 악의가 만들어내는 끈적끈적한 교향곡

이 책의 띠지에 쓰여져 있는 문구이다. 나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우정이라는 허울 아래 얼마나 많은 여성들 사이에 복잡미묘한 심리전이 벌어지는지. 슬프지만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사실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역시 여자들일 것이다. 어쩌면 남자들보다 더 잔혹하고 끔찍한 여자들 사이의 은밀한 공격성에 대해 폭로해줄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여자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우정과 악의에 대한 내용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반전인 서술트릭과 후반부 피해자에 대한 신변조사가 이뤄졌을 때 정도에서만 그려진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네 이웃의 악의를 조심하라', '불쌍하구나' 혹은 '딸은 딸이다' 와 같은 소설들이 여자들 사이의 시기와 질투 등을 더 잘 표현한 작품 같다. 

실제로 이 작품은 피해자들의 사생활을 폭로함으로써 여성들에 대한 사회비판적인 면모가 더 두드러진다. 부동산 경제나 가정주부의 사회 활동에 대한 제도적 측면은 일본의 특징적인 사안인만큼 제쳐두고, 두 여성 피해자들의 이중생활은 가히 충격적이다. 바로 여성들의 성상품화 문제이다. 낮에는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밤에는 유흥 업소에 출근하거나 성매매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여성들이 극심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기때문에 투잡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통 자신의 허영과 과소비때문이고 과도한 지출을 메우기 위해 부적절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여성들의 사회적 평등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여성성을 경제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이중적인 모습은 같은 여성으로서 수치스러울 따름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 근본적 원인을 여성 특유의 시기와 질투심에서 찾는다. 가장 가까운 여자친구로부터 느끼는 시샘과 박탈감때문에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좋은 집에 살며, 더 좋은 남자친구를 만나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경쟁하듯 과시하며 행동하는 친구는 어렵지 않게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더 이 소설 속 사건이 찝찝하게 느껴진다. 

이 책은 실제 1997년에 벌어진 '도쿄전력 OL 살인 사건' 을 보티브로 쓰여진 것이라고 하는데, 긴장감과 몰입도가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건을 파헤치는 르포 작가의 시선으로 소설이 전개 되는만큼 각 챕터는 월간 잡지의 기사로 이루어져 있다. 의문인 것은 실제로 이런 기사가 잘 팔리고, 독자들로부터 읽힐까 라는 점이다. 살인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가를 놓고 검찰과 다른 주장을 하는 상황에서 적확한 증거와 냉철한 분석 대신 피해자들에 대한 주변인들의 인터뷰 내용에 근거하여 글쓴이의 감과 상상에 의지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게다가 꽤나 감상적이고 독백조라 정말 이게 잡지 원고가 되나 싶달까. 그래서 긴장감이나 스릴과는 먼 추리 소설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마지막 서술 트릭으로 한 방을 노리기엔 약간 늘어졌던 소설이라 그 점이 안타깝다. 

진실을 쓰고자 해도 주관이 들어간다. 주관이 들어간 시점에서 이미 진실이라는 핵심에 다다르는 궤도를 이탈한 셈이다. 좀도 기탄없이 말하자면 진실은 단 하나가 아니라 주관의 수만큼 존재한다. -p. 126

세상에는 갖가지 함정이 있어요. 충실감을 맛보고 싶다, 진정한 자신을 찾고 싶다, 몰두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하다, 생활에 활력이 필요하다, 감동이 필요하다. 이렇듯 의존증 기질이 있는 사람을 노리고 온갖 함정이 산재해 있으니까 거기 빠지면 안 돼요. -p. 141

무리한 까닭에 마키코의 운명에 작은 균열이 생긴다. 처음에는 점만한 작은 균열이었지만 점차 커져서 궤도를 이탈하는 원인이 된다. -p. 162

가상 세계에서 사람들은 SF에서난 경험할 수 있었던 평행 세계를 손에 넣어 또 하나의 자신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깨달았다. 이미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사라졌다. 사람들은 현실과 가상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동시에 복수의 인생을 살고 있다. 좋든 싫군 이 사실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리 시간이 디나고 목적지에 당도할 수 없다. 인간은 더이상 현실 세계에만 살고 있지 않다. -p. 180

이야기가 맞물리지 않고 엇나가는 여자 친구. 그래도 대화가 성립된 덧은 한쪽이 무조건 꺾여주었기 때문이다. 꺾여주는 쪽은 상대가 수긍하는 답을,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 답을 자전거 페달을 밟듯이 끊임없이 찾는다. 페달 밟기를 멈추는 순간 자전거는 넘어진다. 넘어지는 게 뭐 어때서, 라고 생각하면서도 넘어뜨릴 기회를 좀처럼 찾지 못 한다. 인연을 끊을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움받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이렇듯 어떤 어른이든심악한 청소년이나 품을 듯한 공포를 마음 속에 숨겨놓고 있다. p.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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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위로다 - 명화에서 찾은 삶의 가치, 그리고 살아갈 용기
이소영 지음 / 홍익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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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에 다니던 무렵, 학교가 끝나면 바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도통 여유라는 것이 없었다. 학교 수업 듣고, 과제하고, 시험 공부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면 남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가끔 같은 과 친구들이 무슨 전시회를 보고 왔다거나 뮤지컬, 연극 공연을 보고 왔다고 말하는 날이면 어쩐지 서글프기도 하고, 나만 겉도는 것 같아 속상하기도 했다. 일단은 예술이라는 분야 자체에문외한인데다가 당시에는 그 비용이 엄청나게 큰 금액으로 느껴졌었다. 지금도 물론 유명한 뮤지컬 공연 같은 것은 엄두도 못 내지만. 그러다 친구의 손에 이끌려 모네 전을 갔었다. 어떠한 사전 지식도 없었고, 유명한 그의 그림도 아는 것이 없었다. 묘한 이질감을 느끼며 미술관을 배회하던 그 때 발길을 사로잡는 그림이 있었다. 풍차가 그려진 그림이었는데, 붉게 물든 꽃밭과 파란 하늘이 시선을 끌었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평범한 풍경화였겠지만 나는 어쩐지 가슴 속에서 울컥하는 느낌을 받았다. 꾸역꾸역 전시관을 다 둘러보고도 그 그림이 다시 보고 싶어 여러 번 그 앞을 서성거렸다. 결국 그 그림이 프린트 된 엽서 한 장을 사서 돌아오는데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그 날의 만족감과 행복감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고, 바쁨에 찌들어가고 있을 때 인스타그램에서 소영님을 만나게 되었다. 정말 꾸준하게 매일밤 그림을 보여주시고, 작가나 작품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미소를 짓게 만드는 그림도 있었고 가슴 한 켠을 뭉클하게 만드는 그림도 있었다. 그림을 보면서 단조롭게 하루를 보낸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다채로운 감정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소영님의 글과 그림을 책으로 만나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다. 일단은 인스타그램 창보다 훨씬 크고 선명하게 그림들을 만날 수 있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맨질맨질한 종이 위에 알록달록 선명하게 드러난 색깔들을 보고 있노라면 도록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좋다. 역시 책은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기는 맛이 있달까. 책 속에는 그림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작품이나 작가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이 담겨 있다. 마치 엄마가 들려주던 옛날 이야기처럼 느껴져서 생소한 작가나 그림이 등장해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번엔 어떤 작품과 작가를 만나게 될지 궁금하고 설레인다. 그리고 명화 에세이답게 그녀의 삶과 생각, 감정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미대생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부유하고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가 전해주는 미대생의 현실 또한 녹록치 않다. 어쩌면 평범하다면 평범할 우리들의 삶보다 더 고단할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예술가나 큐레이터처럼 마냥 우아하고 고상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느 대학생들처럼 치열하게 과제와 시험을 준비하고, 취업을 고민한다. 오히려 미대생이기에 지원할 수 있는 자리 자체가 현저히 적다고 한다. 특히 그녀는 젊은 나이에 미술 교육과 관련된 사업을 시작했기때문에 남몰래 눈물 흘려야 했던 날도 몹시 많았던 것 같다. 그녀는 담담하게 사랑과 이별의 기쁨과 아픔, 그리고 삶의 고단함과 소소한 행복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렇듯 그녀가 그림과 함께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몹시나 평범하고 우리의 일상과 닮아있다. 그녀의 친절한 안내 덕분에 그림들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다채로운 감정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물론 그녀나 예술 작품들이-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만나게 되는,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삶과 관련한 무수한 질문들에 대해 해답을 들려주는 것은 아니다. 대신에 그림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해답을 찾아갈 것인지 생각할 시간과 여유를 준다. 그리고 그 그림을 보며 같이 울고, 웃는 과정에서 오래전부터 나와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존재해 왔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마음 속 깊이 응어리져있던, 이름모를 감정들이 마침내 제 이름을 찾고 흘러 나가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녀는 인생을 살아온 선배로써 그림을 보여주고, 그 그림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떻게 마음을 추스렸는지 이야기해준다. 누구나 해왔던 고민이자 경험해야하는 과정이었음을 알려준다. 멋진 백마디 말보다 그림 한장이 주는 공감과 위로란 얼마나 뭉클하고 잔잔하게 전해져 오는지. 

역시 그림의 힘, 그림이 건네는 위로란 대단하다. 매일밤 그녀의 이야기를 읽고, 관련된 작품들을 보고 나면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내일에 대한 자그마한 희망과 함께. 매일 지옥같이 느껴지고 별 것 없는 나의 일상이 누군가의 눈과 손을 통해 이렇게 멋진 그림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되었기 때문이다. 눈부신 순간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누리는 이 일 분, 일 초를 어떻게 바라보고 느끼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러한 심미안과 날것 그대로의 감정들을 찾게 된다. 내가 대충 흘려버린 하루가 누구에겐 너무나 간절했던 하루일 수 있고, 예술가의 눈을 통하면 그것 역시 작품이 되니까. 행복하고 빛나는 순간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열심히 보고 듣고 느껴야겠다. 그리고 나의 하루를 좀 더 아름답게 만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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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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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작가님의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을 무척 좋아했다. 어쩜 이렇게 내 마음을 콕콕 집어내 멋지게 풀어내주는 것처럼 주옥같은 문장들이 많은지. 그럼에도 이 분의 소설책은 잘 읽히지가 않았다. 선물 받은 원더보이도 도무지 진도가 나가질 않아 십분의 일도 읽지 못한 채 책꽂이로 직행해야 했다. 지나치게 섣부른 판단인지도 모르겠지만 한 두어권 읽다가 포기하게 되는 작가님들의 소설은 절대 들춰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을 짚어들게 된 이유는 다음의 한 문장 때문이다.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 -p. 327

이 문장이 궁금증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일종의 경쟁심을 불러일으켰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샘솟았다. 마치 추리소설을 읽으며 트릭를 깨기 위해 집중할 때처럼 꼼꼼하게 책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도입 부분은 카밀라의 엄마 앤의 죽음으로 인한 감정 상태와 과거 회상이 주를 이룬다. 미국에 입양되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의문을 품고 있던 한국인 소녀의 사춘기 시절, 두 번째 엄마 앤을 떠나 보내야했던 것, 아빠의 재혼,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삶을 더욱 슬프게, 공허하게 만들었다. 책을 다 읽고난 지금은 우울하고 두서없이 느껴지는 도입부가 그녀의 내면 세계를 오롯이 반영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지만 처음에는 이야기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고독과 허무, 회한과 그리움의 감정들이 모호하게 뒤엉켜 있었으며 그녀의 일상은 난해한 장면들의 연속처럼 느껴졌다. 책이 어렵다라는 생각에 포기하고 싶을 때쯤 카밀라가 유이치를 만나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효과를 불러와 결국 카밀라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 한국의 진남으로 떠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바로 이 때부터 이야기는 흥미로워지기 시작한다. 그녀의 삶에 뚜렷한 목표가 생기게 되면서 뿌옇기만 했던 그녀의 감정과 생각들이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을만큼- 뚜렷해진다. 그리고 무언가 그녀의 출생에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엄마 정지은에 대한 실마리를 쥐고 있는 진남여고의 교장 신혜숙의 태도는 무언가 석연치 않다. 그것을 밝히려는 자와 숨기려는 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과 진실을 파헤치고 싶은 욕구가 솟구친다.   

 
두 번째 장인 지은에서는 이미 고인이 된 정지은의 시점에서 카밀라의 상황을 말해주고, 과거 어떠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 자신을 찾으러온, 이미 바다의 차가운 물거품이 되버린 17살의 정지은이 카밀라를 바라보는 따스하고 안쓰러운 시선이 가슴을 저민다. 특히 자신보다 훌쩍 나이를 먹어버린 딸을 바라보는 어린 엄마의 심정은 얼마나 기묘할지. 그렇게 딸을 아꼈던 17살 정지은은 왜 아이를 멀리 입양 보내고 자살을 했던 것인지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세 번째 장인 우리에서는 지은의 여고 시절 친구들이 등장한다. 똑같은 사건을 각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았고,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네 번째 장 특별전에서는 이희재가 어떻게 지은을 만났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매 장마다 갑자기 화자가 바뀌는 것은 신선하게 느껴지지만 한 편으로는 굉장한 집중력을 요한다. 그 사건에 실재했던 여러 가지 사실들을 각자의 입장에서 단편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은의 임신과 자살에 대해서 누구 하나 답을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을 시간순으로 배열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 된다.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과거의 점들이 모두 드러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 한다. 앞으로 어떤 점들을 밟고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인생은 지금보다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너 같은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과거의 점들이 모두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네 인생은 몇 번이고 달라지더라. 인생의 행로가 달라진다는 말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 자체가 갈라진다는 것이다. -p. 202

 


 

카밀라가 미국에 보내지기 이전, 그 때의 과거의 점들은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숨어있던 여러 점들을 찾아내 선의 인생으로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우후죽순 찾아낸 점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으며 일방적으로 그녀의 정체성을 뒤바꿔놓았다. 자신의 어머니가 어떠한 소녀였는지, 그의 아버지가 정재성, 최성식, 이희재 중 누구였는지에 따라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카밀라, 즉 정희재라는 사람의 뿌리, 그것과 관련된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단순히 나를 낳아준 부모님을 만나고, 나를 버려야만 했던 그 이유를 듣고 당신들을 이해하고 용서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자신의 본질과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인간에게 삶이라는 것은 그저 두렵고 애매하며 겉도는 궤도같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 나름 행복한 입양 가정에서 자란 카밀라마저 젊은 날의 언젠가 약물 중독에 빠져 현실로 부터 도피를 한 것이라. 결국 아무리 카밀라가 잊으려 해도 본인이 정희재가 된 그 순간부터 그것이 기존의 자신을 바꿔도 좋을만큼 중요하고 생에 꼭 해내야 하는 일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멍한 눈동자로 타임라인을 읽어가다가 윤경은 트위터에다 '그런데 난 잘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지은이는 왜 자살한거지? 외로워서 그런건가? 누구 아는 사람?'이라고 썼다. (......) 대신에 트위터에는 열 시간 전에 유진이 보낸 멘션이 있었다. '우리가 걔를 죽인 거잖아.' -p. 249

우리가 정지은에 대한 진실에 근접할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씁쓸함이다. 똑같은 사물이라 할지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그것은 달리 보인다. 하물며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떠한 사건을 바라보는 입장과 생각은 개개인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 막는 거대한 심연이 존재한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어떠한 사람과도 그 심연을 넘을 수도, 없앨 수도 없다. 그래서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그 사람의 깊숙한 내면에 존재하는 본심에는 닿을 수가 없다. 그 심연을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아 헤매지만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너와 나사이의 넘을 수 없는 투명한 장벽일 뿐이다. 그 장벽은 서로를 밀어내어 일정한 거리 이내로, 즉 한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는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섣불리 누군가를 판단해서도, 내가 바라보고 듣고 느끼고 기억하는 모든 것들을 절대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라는 사람을 통과해 가는 순간 진실은 이미 나의 생각들로 가득 채워진 그럴싸한 거짓으로 변해 버린다. 사람들의 말, 말, 말. 그것들이 진실을 가리고,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며, 누군가를 자살로 몰아넣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 꿈과 같은 일이라 네 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지만, 결국에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날개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 그 이유를 잘 알아야만 합니다. 날개는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었다면, 하늘을 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테니까요.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생각도 못했을 테지요. -p.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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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들어도 좋은 말 - 이석원 이야기 산문집
이석원 지음 / 그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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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존재는 정말 나에게 바이블과도 같은 책이었다. 사실 그 때는 책을 읽기 시작한 초창기였기때문에 그런 점도 한 몫 했을 것이지만, 이렇게 내 생각을 콕콕 찝어내 대변해주는 에세이는 처음이었다. 더구나 패배감과 염세적인 성향이 하늘을 찌르던 때라 상실이나 실패, 상처와 고독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는 그의 이야기에 미친듯이 끌렸었다. 꼭꼭 숨기고 싶을 비밀들을 이렇게 쿨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니. 아주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으면서도 일면 솔직담백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의 후속작을 몹시도 기다렸다. 물론 '언제 들어도 좋은 말' 이전에 '실내인간' 이라는 장편 소설이 출간되었지만 어쩐지 읽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가 너무 좋아서 책을 사긴 했지만 어쩐지 보통의 존재에서 느낀 환상과 기대를 깨기 싫어서 책장의 좋은 자리에 꽂아두었다.


마침내 내가 원하는 그의 에세이가 출간되었을 때의 기쁨이란! 예약구매를 하고도 매일매일을 기다렸다. 책 표지도, 제목도, 심지어 띠지도 마음에 쏙 들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 처음엔 도무지 이 사람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건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맺고 끊음이 분명한 단편글들이 아니라 뭔가 글들이 우후죽순 배치가 되어있는듯 했고 계속 연결되는 글을 단락대신 챕터로 나누어 놓은 느낌이었다. 뭔가 있겠지 라는 마음으로 읽어나가는데 하.. 사랑 이야기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 이야기, 그것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어장 관리하는 간보는 여자 이야기라니! 정말 싫어! 게다가 여자는 엔조이인데 남자는 진심이라니 최악이다.

 
나는 그냥 막장 연애 이야기 말고 삶과 사람을 바라보는 당신의 솔직하고 독특한 시각이 보고 싶다고. 정말 아파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전혀 충고스럽지 않은 당신의 말이 듣고 싶다고. 이런 걸 기대한 것이 아니었는데, 입이 뾰루퉁 해져서 삐딱하게 책을 읽어 나갔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매정한 상대 여자를 욕하면서, 균형 추가 한 쪽으로 기울어진 관계에서 절대적 을에 위치한 사람의 마음 고생을 처절하게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사랑은 받을 때보다 줄 때가 행복한거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대개의 경우 와닿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을 넘어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일이다. 분명 더 많이 마음을 쓰는 사람, 더 많이 챙기는 사람, 더 많이 양보하는 사람, 더 많이 연락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나중에 '더 잘해줄껄' 이라는 후회는 덜 할지 몰라도 보통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은 절대적으로 손해를 보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괜히 마음주고 배려했어. 나도 내것만 악착같이 챙길껄.' 이라고 한탄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연애담 속에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오고가는 감정들, 고민들을 녹여내고 있었다. 첫 에세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같이 호흡할 수 있는 그런 책이었다. 처음부터 나만의 환상을 가지고 흔한 연애담이라고 오판을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책장을 넘길수록 더욱 그가 하는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그와 그녀의 이야기가 어떻게 갈무리될지, 그의 고민들은 어떻게 해결될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다. 실제로 잠자는 것도 잊은 채 책을 읽어 나갔었다. 그의 외사랑이 안쓰러웠고, 소설을 쓰는 동안 겪었을 그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거짓(?)으로 시작된 소설 쓰기는 삼사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잡아 먹었고, 그에게 빚만을 안겨준채 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게 만들어 버렸다. 어쩌면 잘 할 수 없는 일, 혹은 좋아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고 나면 따라오는 참담한 결과들은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작가인지, 음악인인지 조차 흐릿해지고 무엇 하나 내가 자신있게 나의 일이라고 내밀 수 없게 되어버린 그 상황. 거기에 더해진 생활고와 극도의 스트레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것들의 뒤엔 반드시 따라오는 본질적인 질문들이 있다.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나는 이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앞으로 어떤 음악도, 글도 쓸 수 없게 되면 어쩌지?'
'나 지금 잘 하고 있는건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나는 그가 포기하지 않기를, 반드시 답을 찾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그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면, 나에게도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나 희망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미안하게도, 현재의 내 상황은 그에 비하면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편이니까, 상대적인 안도감을 가지고 끝을 따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 역시 간절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살아가고 싶은 모습을 찾고 있었으니까. 정말 끝이 임박해서야 그는 제 3자의 입장이 되어 간략하게나마 그가 살아온 모습을 영화처럼 보여주었다. 어떻게 작가가 되었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그는 좋아서 해본 일이 없었고, 그저 밥벌이를 위해 일했으며, 자기가 원하는 만큼 일하면 -굉장한 재능이 있는 사람임은 분명하다- 어느 정도 결과물이 나오는 것뿐이었다. 잘하려는 욕심도, 유명해지겠다는 욕심도 없이. 그냥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돈이 되니까 해온 일들일 뿐이었다. 

나는 이제 그토록 찾아 해매던 내 일을 찾은 걸까. -p. 344

그는 밥벌이가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마침내 찾았다. 그냥 무언가를 읽고, 끊임없이 끄적이는 일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말한다.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이 있다거나, 잘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다만 본인이 원하는대로 살면 된다고. 참 그다운 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렇지 못할 때보다 정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건 아니라는 그의 말에 공감한다. 우리는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는 순간 엄청난 변화나 행복을 기대하지만 그 행복감은 아주 잠시뿐, 사실 일상은 거의 변한게 없다. 다만 끈질기게 괴롭히던 어떤 갈증 하나가 조금 희미해지는 것일뿐, 막상 놓아버린다고 생각하면 아찔해지는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담담한 어조에서 진정성을 느꼈다. 오랜 시간 방황했고, 상실의 아픔과 가난과 싸워야 했으며,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온 남자의 솔직한 이야기니까. 더 오랫동안 작가로써 일상과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글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다행이다.

 

예쁜말은 예쁜 마음에서 나오고
예쁜 마음은 유순한 생활에서 비롯된다. -P. 43

네가 그렇게 불평이 많고
타인과 세상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이유는
가진 게 없어서 그래.
니 안목이 남달라서도 아니고
니가 잘나서도 아니야.
단지 가난해서 그래.
니 내면과 환경이. 경험이. 처지가. -P. 118

글쎼.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따로 있을까?
내 경험에 의하면 가치란 건 사랑을 함으로써 만들어지더라.
하기 전에 고려된다면 그것은 조건이 될 뿐. -P. 124

남은 생이 보인다고 할까. 허나 아무리 어른의 삶이 그런 것이라고는 해도 모든 것이 예상 가능한 채로 몇십 년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가혹하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노력하기로 했다. 너무 빨리 결정지어진 채로 살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남은 생에서도 한두 번쯤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생기길 바라며 살고 싶다. 자고 일어나서 막 눈을 떴을 때 또다시 맞을 하루가 버겁지 않았으면 좋겠다. -P. 149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뎌야 하는 이유는
이 모든게 한 번 뿐이기 때문.
사랑도 고통도
하늘도 꿈도 바람도. -P.192

평생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을 때
끔찍하단 기분이 드는 게 아니라
마음이 편안하고 당연한 듯 여겨진다면
그게 바로 진짜 평생 해도 되는 일이 아닐까.
그런 일을 찾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지만. -P.197

나의 결핍은 친구나 가조그 연인이 메워줄 수 없다.
그들은 나의 결핍을 채워주기 위한 존재가 아니며
그들 자체로 각자의 결핍을 스스로 메워가야 하는
독립적인 존재들일 뿐이다. -P. 316

작은 것이 풀리면 큰 것도 풀리나니. 하나가 풀리면 두 개도 풀리나니. -P.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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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가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p. 5


제목부터가 인상적인 활자 잔혹극은 첫 페이지의 첫 번째 문장부터 이토록 강렬하게 시작된다. 순식간에 이 책 속에 사로잡히는 느낌이 들고, 책을 읽어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궁금증이 몰려온다. 어째서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한 일가를 처참히 죽일 수가 있는가? 당연히 여러 명을 몰살시킨 유니스 파치먼이 싸이코패스이거나 혹은 일가족이 그녀로 하여금 극한의 분노와 악의를 느끼게 만든 게 아닐까? 단지 문맹이라는 것이 살인의 동기로써 충분한 것인가? 

책을 다 읽고난 지금 답을 하자면 그렇다. 문맹은 충분히 살인의 원인이 될 수 있으며 반대로 활자에 깊이 중독된 사람들 역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 그것은 문맹이라는 것이 단순히 읽고 쓸 수 없는 불편함만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세상, 특히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됨을 의미한다.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본능적으로 방어 기제가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 자체가 어렵다. 또한 우리가 다양한 책을 접함으로써 지식뿐만이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폭을 넓히게 된다. 그러나 문맹의 경우 이러한 학습의 과정이 동반될 수 없기에 극단적으로 그들의 감정은 뭉뚱그러져 대략 몇몇 가지로 구분되어 있기 마련이고,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기 위한 역지사지 마저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심하면 도덕심이나 죄책감과 같은 인성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그들에게 문맹은 일생에 걸쳐 가장 숨기고 싶은 치욕스런 비밀이며,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자신의 존재 가치가 없어진다고까지 생각한다. 따라서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른다. 활자가 없는 곳, 글을 읽을 필요가 없는 곳에서 그들은 최고의 일꾼이 된다. 눈을 쓸 수 없는 대신 다른 기관들이 예민해지고 문맹이라는 사실이 들키지 않기 위해 조그만 실수도 하지 않는다. 기억력과 관찰력이 상당히 비상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지런한 완벽주의자처럼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커버데일 식구들 역시 유니스의 끝내주는 집안일 솜씨에 매료되어 그녀의 몇 가지 흠쯤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지 않았는가. 그러한 점을 꿰뚫어 보았다면, 그리고 그녀가 문맹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이전에 그만두게 했더라면 -움침한 성격같은 것을 빌미로- 몰살 당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을텐데.

반대로 책 속에 빠져 사는 자일즈 역시 유니스와 닮은 점이 있다. 지적 수준도 높고 애서가임에도 분명하지만 그에게도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소통 능력의 부재. 커버데일 가족들과 대화도 나누는 법이 없으며 가족들의 일상에 무관심하다. 하루 종일 책만 읽으며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있다. 그가 책을 통해 얻는 지식은 오로지 글자 그 자체가 나타내는 내용만을 흡수하는 것이다. 글 이면에 놓인 작가의 의도나 책 속 등장인물들의 세세한 감정 변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결국 자일즈 역시 그의 인성에서 결여를 찾을 수 있으며 공감 능력이 부족함을 알 수 있다. 그에게도 공격적인 면이 내재되어 있었다면 그야말로 지적인 소시오패스가 되지 않았을까. 
다만 책에 지나치게 빠져들어 타인과 세상에 무관심해지는 잘못된 애서가의 경지에 이르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이 작가의 책을 찾아보니 우리 나라에 8-9권 정도 출간된 것 같다. 훨씬 많은 작품이 쓰여진 걸로 아는데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가 되었으면 한다. 첫 문장의 강렬함을 책의 끝부분까지 일관되고 긴장감있게 끌고 갈 수 있는 작가의 역량이 대단할뿐만 아니라 당대의 시대 상황이나 사회적 인식이 잘 담겨 있어 단순한 추리 소설 이상의 훌륭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도리안 레싱의 '다섯째 아이'를 떠올리게 할만큼 건조하고 짧막하게 끊어지는 문체가 소설의 분위기를 더 섬뜩하면서도 어딘가 우울하게 만드는 것 같다. 마치 그 소설을 다 읽기 전에는 우울한 로필드 홀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처럼 사람을 끌어당긴다. 그럼에도 빠른 전개 덕분에 지루하거나 늘어지게 만들진 않는다. 다만 긴장의 끈을 놓지 못 한채 유니스와 커버데일 가족을 위태롭게 바라볼 뿐. 


문득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능력 그 자체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무작정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매 권마다 그 안에 담겨진 주제와 의미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혹은 누군가와 토론을 하면서 정리하는 습관이 필요할 것 같다. 책이 지식습득의 창이자 인간에 대한 이해와 소통의 창이 될 수 있도록 제대로 독서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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