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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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작가님의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을 무척 좋아했다. 어쩜 이렇게 내 마음을 콕콕 집어내 멋지게 풀어내주는 것처럼 주옥같은 문장들이 많은지. 그럼에도 이 분의 소설책은 잘 읽히지가 않았다. 선물 받은 원더보이도 도무지 진도가 나가질 않아 십분의 일도 읽지 못한 채 책꽂이로 직행해야 했다. 지나치게 섣부른 판단인지도 모르겠지만 한 두어권 읽다가 포기하게 되는 작가님들의 소설은 절대 들춰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을 짚어들게 된 이유는 다음의 한 문장 때문이다.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 -p. 327

이 문장이 궁금증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일종의 경쟁심을 불러일으켰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샘솟았다. 마치 추리소설을 읽으며 트릭를 깨기 위해 집중할 때처럼 꼼꼼하게 책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도입 부분은 카밀라의 엄마 앤의 죽음으로 인한 감정 상태와 과거 회상이 주를 이룬다. 미국에 입양되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의문을 품고 있던 한국인 소녀의 사춘기 시절, 두 번째 엄마 앤을 떠나 보내야했던 것, 아빠의 재혼,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삶을 더욱 슬프게, 공허하게 만들었다. 책을 다 읽고난 지금은 우울하고 두서없이 느껴지는 도입부가 그녀의 내면 세계를 오롯이 반영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지만 처음에는 이야기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고독과 허무, 회한과 그리움의 감정들이 모호하게 뒤엉켜 있었으며 그녀의 일상은 난해한 장면들의 연속처럼 느껴졌다. 책이 어렵다라는 생각에 포기하고 싶을 때쯤 카밀라가 유이치를 만나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효과를 불러와 결국 카밀라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 한국의 진남으로 떠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바로 이 때부터 이야기는 흥미로워지기 시작한다. 그녀의 삶에 뚜렷한 목표가 생기게 되면서 뿌옇기만 했던 그녀의 감정과 생각들이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을만큼- 뚜렷해진다. 그리고 무언가 그녀의 출생에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엄마 정지은에 대한 실마리를 쥐고 있는 진남여고의 교장 신혜숙의 태도는 무언가 석연치 않다. 그것을 밝히려는 자와 숨기려는 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과 진실을 파헤치고 싶은 욕구가 솟구친다.   

 
두 번째 장인 지은에서는 이미 고인이 된 정지은의 시점에서 카밀라의 상황을 말해주고, 과거 어떠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 자신을 찾으러온, 이미 바다의 차가운 물거품이 되버린 17살의 정지은이 카밀라를 바라보는 따스하고 안쓰러운 시선이 가슴을 저민다. 특히 자신보다 훌쩍 나이를 먹어버린 딸을 바라보는 어린 엄마의 심정은 얼마나 기묘할지. 그렇게 딸을 아꼈던 17살 정지은은 왜 아이를 멀리 입양 보내고 자살을 했던 것인지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세 번째 장인 우리에서는 지은의 여고 시절 친구들이 등장한다. 똑같은 사건을 각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았고,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네 번째 장 특별전에서는 이희재가 어떻게 지은을 만났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매 장마다 갑자기 화자가 바뀌는 것은 신선하게 느껴지지만 한 편으로는 굉장한 집중력을 요한다. 그 사건에 실재했던 여러 가지 사실들을 각자의 입장에서 단편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은의 임신과 자살에 대해서 누구 하나 답을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을 시간순으로 배열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 된다.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과거의 점들이 모두 드러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 한다. 앞으로 어떤 점들을 밟고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인생은 지금보다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너 같은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과거의 점들이 모두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네 인생은 몇 번이고 달라지더라. 인생의 행로가 달라진다는 말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 자체가 갈라진다는 것이다. -p. 202

 


 

카밀라가 미국에 보내지기 이전, 그 때의 과거의 점들은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숨어있던 여러 점들을 찾아내 선의 인생으로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우후죽순 찾아낸 점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으며 일방적으로 그녀의 정체성을 뒤바꿔놓았다. 자신의 어머니가 어떠한 소녀였는지, 그의 아버지가 정재성, 최성식, 이희재 중 누구였는지에 따라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카밀라, 즉 정희재라는 사람의 뿌리, 그것과 관련된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단순히 나를 낳아준 부모님을 만나고, 나를 버려야만 했던 그 이유를 듣고 당신들을 이해하고 용서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자신의 본질과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인간에게 삶이라는 것은 그저 두렵고 애매하며 겉도는 궤도같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 나름 행복한 입양 가정에서 자란 카밀라마저 젊은 날의 언젠가 약물 중독에 빠져 현실로 부터 도피를 한 것이라. 결국 아무리 카밀라가 잊으려 해도 본인이 정희재가 된 그 순간부터 그것이 기존의 자신을 바꿔도 좋을만큼 중요하고 생에 꼭 해내야 하는 일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멍한 눈동자로 타임라인을 읽어가다가 윤경은 트위터에다 '그런데 난 잘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지은이는 왜 자살한거지? 외로워서 그런건가? 누구 아는 사람?'이라고 썼다. (......) 대신에 트위터에는 열 시간 전에 유진이 보낸 멘션이 있었다. '우리가 걔를 죽인 거잖아.' -p. 249

우리가 정지은에 대한 진실에 근접할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씁쓸함이다. 똑같은 사물이라 할지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그것은 달리 보인다. 하물며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떠한 사건을 바라보는 입장과 생각은 개개인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 막는 거대한 심연이 존재한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어떠한 사람과도 그 심연을 넘을 수도, 없앨 수도 없다. 그래서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그 사람의 깊숙한 내면에 존재하는 본심에는 닿을 수가 없다. 그 심연을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아 헤매지만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너와 나사이의 넘을 수 없는 투명한 장벽일 뿐이다. 그 장벽은 서로를 밀어내어 일정한 거리 이내로, 즉 한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는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섣불리 누군가를 판단해서도, 내가 바라보고 듣고 느끼고 기억하는 모든 것들을 절대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라는 사람을 통과해 가는 순간 진실은 이미 나의 생각들로 가득 채워진 그럴싸한 거짓으로 변해 버린다. 사람들의 말, 말, 말. 그것들이 진실을 가리고,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며, 누군가를 자살로 몰아넣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 꿈과 같은 일이라 네 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지만, 결국에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날개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 그 이유를 잘 알아야만 합니다. 날개는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었다면, 하늘을 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테니까요.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생각도 못했을 테지요. -p.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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