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 잔혹극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가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p. 5


제목부터가 인상적인 활자 잔혹극은 첫 페이지의 첫 번째 문장부터 이토록 강렬하게 시작된다. 순식간에 이 책 속에 사로잡히는 느낌이 들고, 책을 읽어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궁금증이 몰려온다. 어째서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한 일가를 처참히 죽일 수가 있는가? 당연히 여러 명을 몰살시킨 유니스 파치먼이 싸이코패스이거나 혹은 일가족이 그녀로 하여금 극한의 분노와 악의를 느끼게 만든 게 아닐까? 단지 문맹이라는 것이 살인의 동기로써 충분한 것인가? 

책을 다 읽고난 지금 답을 하자면 그렇다. 문맹은 충분히 살인의 원인이 될 수 있으며 반대로 활자에 깊이 중독된 사람들 역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 그것은 문맹이라는 것이 단순히 읽고 쓸 수 없는 불편함만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세상, 특히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됨을 의미한다.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본능적으로 방어 기제가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 자체가 어렵다. 또한 우리가 다양한 책을 접함으로써 지식뿐만이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폭을 넓히게 된다. 그러나 문맹의 경우 이러한 학습의 과정이 동반될 수 없기에 극단적으로 그들의 감정은 뭉뚱그러져 대략 몇몇 가지로 구분되어 있기 마련이고,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기 위한 역지사지 마저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심하면 도덕심이나 죄책감과 같은 인성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그들에게 문맹은 일생에 걸쳐 가장 숨기고 싶은 치욕스런 비밀이며,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자신의 존재 가치가 없어진다고까지 생각한다. 따라서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른다. 활자가 없는 곳, 글을 읽을 필요가 없는 곳에서 그들은 최고의 일꾼이 된다. 눈을 쓸 수 없는 대신 다른 기관들이 예민해지고 문맹이라는 사실이 들키지 않기 위해 조그만 실수도 하지 않는다. 기억력과 관찰력이 상당히 비상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지런한 완벽주의자처럼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커버데일 식구들 역시 유니스의 끝내주는 집안일 솜씨에 매료되어 그녀의 몇 가지 흠쯤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지 않았는가. 그러한 점을 꿰뚫어 보았다면, 그리고 그녀가 문맹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이전에 그만두게 했더라면 -움침한 성격같은 것을 빌미로- 몰살 당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을텐데.

반대로 책 속에 빠져 사는 자일즈 역시 유니스와 닮은 점이 있다. 지적 수준도 높고 애서가임에도 분명하지만 그에게도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소통 능력의 부재. 커버데일 가족들과 대화도 나누는 법이 없으며 가족들의 일상에 무관심하다. 하루 종일 책만 읽으며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있다. 그가 책을 통해 얻는 지식은 오로지 글자 그 자체가 나타내는 내용만을 흡수하는 것이다. 글 이면에 놓인 작가의 의도나 책 속 등장인물들의 세세한 감정 변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결국 자일즈 역시 그의 인성에서 결여를 찾을 수 있으며 공감 능력이 부족함을 알 수 있다. 그에게도 공격적인 면이 내재되어 있었다면 그야말로 지적인 소시오패스가 되지 않았을까. 
다만 책에 지나치게 빠져들어 타인과 세상에 무관심해지는 잘못된 애서가의 경지에 이르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이 작가의 책을 찾아보니 우리 나라에 8-9권 정도 출간된 것 같다. 훨씬 많은 작품이 쓰여진 걸로 아는데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가 되었으면 한다. 첫 문장의 강렬함을 책의 끝부분까지 일관되고 긴장감있게 끌고 갈 수 있는 작가의 역량이 대단할뿐만 아니라 당대의 시대 상황이나 사회적 인식이 잘 담겨 있어 단순한 추리 소설 이상의 훌륭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도리안 레싱의 '다섯째 아이'를 떠올리게 할만큼 건조하고 짧막하게 끊어지는 문체가 소설의 분위기를 더 섬뜩하면서도 어딘가 우울하게 만드는 것 같다. 마치 그 소설을 다 읽기 전에는 우울한 로필드 홀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처럼 사람을 끌어당긴다. 그럼에도 빠른 전개 덕분에 지루하거나 늘어지게 만들진 않는다. 다만 긴장의 끈을 놓지 못 한채 유니스와 커버데일 가족을 위태롭게 바라볼 뿐. 


문득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능력 그 자체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무작정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매 권마다 그 안에 담겨진 주제와 의미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혹은 누군가와 토론을 하면서 정리하는 습관이 필요할 것 같다. 책이 지식습득의 창이자 인간에 대한 이해와 소통의 창이 될 수 있도록 제대로 독서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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