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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친구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10월
평점 :
"나보다 조금만 더 불행해줘."
여자들의 우정과 악의가 만들어내는 끈적끈적한 교향곡
이 책의 띠지에 쓰여져 있는 문구이다. 나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우정이라는 허울 아래 얼마나 많은 여성들 사이에 복잡미묘한 심리전이 벌어지는지. 슬프지만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사실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역시 여자들일 것이다. 어쩌면 남자들보다 더 잔혹하고 끔찍한 여자들 사이의 은밀한 공격성에 대해 폭로해줄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여자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우정과 악의에 대한 내용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반전인 서술트릭과 후반부 피해자에 대한 신변조사가 이뤄졌을 때 정도에서만 그려진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네 이웃의 악의를 조심하라', '불쌍하구나' 혹은 '딸은 딸이다' 와 같은 소설들이 여자들 사이의 시기와 질투 등을 더 잘 표현한 작품 같다.
실제로 이 작품은 피해자들의 사생활을 폭로함으로써 여성들에 대한 사회비판적인 면모가 더 두드러진다. 부동산 경제나 가정주부의 사회 활동에 대한 제도적 측면은 일본의 특징적인 사안인만큼 제쳐두고, 두 여성 피해자들의 이중생활은 가히 충격적이다. 바로 여성들의 성상품화 문제이다. 낮에는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밤에는 유흥 업소에 출근하거나 성매매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여성들이 극심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기때문에 투잡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통 자신의 허영과 과소비때문이고 과도한 지출을 메우기 위해 부적절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여성들의 사회적 평등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여성성을 경제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이중적인 모습은 같은 여성으로서 수치스러울 따름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 근본적 원인을 여성 특유의 시기와 질투심에서 찾는다. 가장 가까운 여자친구로부터 느끼는 시샘과 박탈감때문에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좋은 집에 살며, 더 좋은 남자친구를 만나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경쟁하듯 과시하며 행동하는 친구는 어렵지 않게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더 이 소설 속 사건이 찝찝하게 느껴진다.
이 책은 실제 1997년에 벌어진 '도쿄전력 OL 살인 사건' 을 보티브로 쓰여진 것이라고 하는데, 긴장감과 몰입도가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건을 파헤치는 르포 작가의 시선으로 소설이 전개 되는만큼 각 챕터는 월간 잡지의 기사로 이루어져 있다. 의문인 것은 실제로 이런 기사가 잘 팔리고, 독자들로부터 읽힐까 라는 점이다. 살인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가를 놓고 검찰과 다른 주장을 하는 상황에서 적확한 증거와 냉철한 분석 대신 피해자들에 대한 주변인들의 인터뷰 내용에 근거하여 글쓴이의 감과 상상에 의지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게다가 꽤나 감상적이고 독백조라 정말 이게 잡지 원고가 되나 싶달까. 그래서 긴장감이나 스릴과는 먼 추리 소설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마지막 서술 트릭으로 한 방을 노리기엔 약간 늘어졌던 소설이라 그 점이 안타깝다.
진실을 쓰고자 해도 주관이 들어간다. 주관이 들어간 시점에서 이미 진실이라는 핵심에 다다르는 궤도를 이탈한 셈이다. 좀도 기탄없이 말하자면 진실은 단 하나가 아니라 주관의 수만큼 존재한다. -p. 126
세상에는 갖가지 함정이 있어요. 충실감을 맛보고 싶다, 진정한 자신을 찾고 싶다, 몰두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하다, 생활에 활력이 필요하다, 감동이 필요하다. 이렇듯 의존증 기질이 있는 사람을 노리고 온갖 함정이 산재해 있으니까 거기 빠지면 안 돼요. -p. 141
무리한 까닭에 마키코의 운명에 작은 균열이 생긴다. 처음에는 점만한 작은 균열이었지만 점차 커져서 궤도를 이탈하는 원인이 된다. -p. 162
가상 세계에서 사람들은 SF에서난 경험할 수 있었던 평행 세계를 손에 넣어 또 하나의 자신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깨달았다. 이미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사라졌다. 사람들은 현실과 가상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동시에 복수의 인생을 살고 있다. 좋든 싫군 이 사실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리 시간이 디나고 목적지에 당도할 수 없다. 인간은 더이상 현실 세계에만 살고 있지 않다. -p. 180
이야기가 맞물리지 않고 엇나가는 여자 친구. 그래도 대화가 성립된 덧은 한쪽이 무조건 꺾여주었기 때문이다. 꺾여주는 쪽은 상대가 수긍하는 답을,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 답을 자전거 페달을 밟듯이 끊임없이 찾는다. 페달 밟기를 멈추는 순간 자전거는 넘어진다. 넘어지는 게 뭐 어때서, 라고 생각하면서도 넘어뜨릴 기회를 좀처럼 찾지 못 한다. 인연을 끊을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움받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이렇듯 어떤 어른이든심악한 청소년이나 품을 듯한 공포를 마음 속에 숨겨놓고 있다. p.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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