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옳다
길리언 플린 지음, 김희숙 옮김 / 푸른숲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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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 7519자, 193매, 96페이지 

가장 짧고 가장 섬뜩하고 가장 강렬하다.

이 책의 뒷면에 쓰여져 있는 문구이다. 보통 띠지나 책 뒷면을 차지하고 있는 문장들은 강렬하고 흥미로울 수 밖에 없다. 짧은 시간 내에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 잡아 그 책을 구매로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사람을 혹하게 만드는 말일수록 그 말에 이끌려 고른 책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 실망스러운 경우가 부지기수다. 하지만 이 책은 가장 짧으면서 가장 섬뜩하고 강렬하다는 이 문장의 기대치를 충분히 충족시키고 남는다! 


96페이지의 단편 소설 속에 여러 번의 반전과 섬세한 심리 묘사, 뚜렷한 캐릭터들의 입체적 특성과 인물 간의 갈등 관계가 모두 녹아있다. 사실 전혀 길지 않은 분량이기에 지루하게 느껴질 양이 아니지만 상상 이상의 흡입력과 가독성을 자랑한다. 뒷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기다 보면 결정적인 반전 앞에서 맥이 탁 풀리고 만다. 허무함때문이 아니라 작가와 극 속의 인물들- 수전과 마일즈- 에게 놀아났다는 아찔함때문이다. 결말은 있지만 무엇이 진실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거짓같은 진실, 진실같은 거짓이 혼재된 상황에서 과연 책 속의 '나' 그리고 책을 읽고 있는 '나'는 어떤 것을 진실로 받아들일 것인가. 책을 읽는데 소요된 시간은 짧지만 사건의 진실과 책 속의 인물들 자체에 대해 고심해보는데 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만큼 오랜 여운이 남는 작품이다. 

결국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 보다는 수전, 마일즈, 그리고 나의 자기중심적인 면모와 악한 본성에 대해 집중하게 된다. '나' 에게 복수를 하려던 것이든, 혹은 이용하려고 한 것이든 수전과 마일즈 모두 옳지 않은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것이다. 결국 수전이든 마일즈든 100%의 진실도, 거짓도 말하지 않았다. '나' 를 속이기 위해서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말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진짜 거짓말쟁이들의 비법이니까. 그렇다고 '나' 가 절대적인 희생양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녀가 자신의- 짧은 순간 내에 어떤 사람의 살아온 배경이나 성격, 고민 등을 판단하는- 능력을 과신했기 때문에 두 사람에 대해 어떠한 의구심도 품지 않았가 때문이다. 그저 자신이 보고 들은대로 판단했을 뿐이다. 여기에 엉뚱한 인터넷 기사 덕분에 수전이나 마일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부유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심리적르로 이용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던 그녀 역시 수전으로부터 한 몫을 단단히 챙기려 했었다. 두 사람에게 약점으로 잡힐만한 사기 행각(?) 을 벌인 것은 그녀 자신이다. 무엇이 진실이든 간에 세 사람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했고, 끝까지 자기 합리화를 통해 불온한 생각과 행동을 정당화하려 했던 것뿐이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과 끝끝내 자기중심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성에 대해 고민해보게 된다. 인간의 탐욕, 질투, 복수와 같은 악한 면과 '나는 불행하니까 이렇게 해도 되.' 라는 더러운 자기 위로와 남을 향한 공격성. 인간 존재에 대한 씁쓸함과 혐오감, 그리고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렇게 자기 중심적일수 밖에 없기에 영원히 고독한 우울증을 달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숙명에 연민이 자라난다. 짧은 작품 속에 이 많은 요소들을 잘 버무려 놓은 '길리언 플린' 의 능력에 다시금 감탄하게 된다. 그녀의 놀라운 능력은 언제까지, 어디까지 계속될 수 있을지. 장편소설로 얼른 찾아와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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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이용덕 지음, 양윤옥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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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가을께 애써 억눌러 오던 7년간의 설움과 핍박이 최고조에 달하고 결국 터지고 말았다. 인분교수 못지 않은, 지도 교수님과 선배들의 폭언과 부조리함, 그리고 이어지는 따돌림은 사람을 수동적이고 무가치하게 만들었다. 나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고 그들이 주는 갖은 수치심과 모멸감 속에서도 언젠가는 이 또한 다 지나갈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부여잡고 버텨왔었다. 하지만 해가 바뀌어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고, 도리어 심해지기만 했다. 심각한 것은 그러한 폭력 앞에 나 역시 굴복하고 어느새 길들여졌다는 것이다.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없지만 깊은 우울감과 조절할 수 없는 분노로 인하여 내 발로 학교 상담 센터를 찾아 갔었다. 그 때, 가장 바라는 일이 무엇이냐고 상담 선생님이 물으셨을 때 나는 대답했다.
 
"지구 종말이요. 인간은 존재 자체가 악입니다."

인간의 선한 본성의 이면에는 굉장히 악하고 폭력적이고 잔인한 악, 그 자체가 자리하고 있다. 어쩌면 성선설은 인간의 이상이자 자기 만족일 뿐 성악설이 더 적확한 시선인 것 같다. 그것은 오랜 인간의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증명되어 왔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딘가에선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폭력과 억압이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럴싸하게 포장하고자 해도 지구상의 그 어떤 동물보다 악랄하고 파괴적이며 교활한 것이 인간이다. 가장 탐욕스럽고 이성이라는 편리한 도구를 앞세워 자신들의 추악한 본성을 그럴싸하게 가리운 채 가식적으로 살아가는, 가장 혐오스러운 동물. 어쩌면 이 동물이라는 말조차도 아까운 것이 인간인지도 모른다. 

이 책 속의 하쓰미는 인간의 이러한 측면에 집중한다.  아주 병적으로 집착해서 그녀의 서가는 그러한 책들로 빼곡하다. 그것을 낭독하며 남자친구인 도쿠야마와 잠자리를 가질 정도로 변태적인 여자다. 인간의 삶 자체를 혐오하며 언젠가는 죽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찰나의 순간과 같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제대로 존재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는 묘한 카리스마가 있어서 주변 사람들을 장악하고 자신의 뜻대로 이끌어 나가는데 능숙하다. 실제로 책을 읽는 동안 하쓰미의 말에 공감하고 그녀에게 깊이 사로잡히는 느낌을 여러 차례 느꼈다.

그래서였을까? 지극히 평범하고 조용한 성격의 도쿠야마는 그녀에게 완전히 사로잡힌다. 말 그대로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택한다. 수더분한 청년이었던 그는 완전히 돌변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비수같은 말들을 쏟아내 상처주고 마구 헤집어 놓는다. 그리고 단호하게 그들과의 관계를 단절해 나간다. 이 세상에 자신의 편은 오직 하쓰미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작은 맨션 안으로 그의 세계를 좁혀간다. 나름 목표가 있는 삼수생이었던 도쿠야마는 원하던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도 그 기쁨을 뒤로한 채 삶을 놓아버린다. 그저 자신의 삶과 존재 자체에 대해 비관하고, 애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비웃는다. 하루 종일 하쓰미와 침대에 누워 잠들고 잠시 일어나는 한심한 생활을 반복하면서.

더욱 우스운 것은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삶을 상대의 선택에 맡겼다는 점이다. 그렇게 자살을 옹호하면서도 혼자 죽지 못했던 하쓰미는 동반자살을 원했고 마지막까지 '당신 탓이야.'라고 도쿠야마에게 말했다. 도쿠야마 역시 모든 것을 하쓰미의 뜻대로 하고자 했다.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살고자 하는 의지를 상대에게서 찾고자 했던게 아닌가 싶다. 정말로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서로가 절망이라는 파도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꼭 붙잡아주는 닻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의 어처구니 없는 동반자살 앞에서 어쩐지 숙연해지는 기분이 든다. 누군가에게는 간절했을 내일이라는 시간이 이들에게는 왜 그리 무가치 했던 것인지 안쓰럽고 화가 난다. 이들이 보여주는 절망과 파멸의 끝자락에서 되려 나는 삶에의 애착과 의지와 희망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세상과 인간을 부정하며 냉소적으로 바라봤던 어린 날의 미숙한 나를 반성하면서.

아무리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해도 삶은 냉혹하고, 인간은 여전히 악행을 저지른다. 선을 행하려는 사람들은 너무나 적고 그들의 힘은 미약하다. 마냥 인과응보나 권선징악 같은 것을 믿고 살기에 세상살이가 절대 녹록치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착취적이고 탐욕스러운 인간일수록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사는 것 같은 이상한 세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의 어두운 측면보다 따스한 측면에 집중해야 한다. 시작은 미미할지라도 그런 시선과 생각들이 모여 조금씩 세상을 바꿔나갈 힘을 비축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하루 아침에 세상이 바뀌지는 않았고 또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을 위해 투쟁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뜻대로 아주 조금씩 변화해 왔다. 그러한 변화들이 켜켜히 쌓여 지금의 민주주의와 복지 국가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몇 백년 전만해도 평등, 자유와 같은 가치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전히 우리의 세계는 고쳐나가야할 부분들이 산재해 있지만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살이가 고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사람들, 사람들에게 치여 상처받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깊은 회의감을 갖게 된 분들 모두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하쓰미의 시원시원한 냉소와 비판에 대한 격한 공감의 끝에는 아주 자그마한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기묘한 안도감과 함께 아주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죽읍시다. 동반자살, 그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 방법이예요. 유일한 방법, 제대로 존재할 수 있는 삶의 방식. 의지와 목적과 결과가 일치하고 게다가 성공의 순간이 그대로 영원히 되는 유일한 아이디어. 동반자살하자고요. 응? 응? -p. 164

본심 따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이제 더 이상, 어떻게 일이 펼쳐지건 흑에 흑을 덧칠할 뿐이다. -p. 226



하쓰미는 원래부터 예의 바른 여자가 아니다. 악의가 철철 넘치는, 벌을 주고 싶어서 배겨낼 도리가 없는 나쁜 여자다. -p. 244






마음이 정해지지 않는 것을, 정해버렸다. 믿음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배신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 때문이라능 것을 말이 아니라 머리로 이해해 버려서, 온갖 것들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p.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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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감 Paper
강원상 지음 / 지식공감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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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상 작가님을 처음 만난 것은 인스타그램이었어요. 용기있는 선팔이 친구를 얻을 수 있다는 프로필 멘트가 마음을 끌었고요, 처음엔 재미있는 사람인가보다 해서 팔로우를 눌러봤어요. 신기하게도 꾸준하게 저와 소통해 주셨어요. 그리고나서 케빈님의 피드를 주의 깊게 살펴보니 전혀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더군요. 오히려 세상과 사람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품고 깊이 사색하는 분이었어요. 좋은 친구가 되어준다는 말을 지킬 줄 아는 그의 강직함만큼 글들도 진솔하고 담백했어요. 애써 꾸미려하지 않은 문장들이 좋았고, 다치고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그의 감성이 좋았어요. 무엇보다 사랑과 이별만이 아니라 평범하다 못해 지루하기까지한, 우리의 일상과 삶 전반에 대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이야기해주어서 더욱 공감할 수 있었어요.


사실 저는 무작정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문장들은 좋아하지 않아요. 내 삶을 힘들고 고통스럽게 느끼는게 유난떠는 것처럼 느껴지고, 괜스레 칙칙하고 어렵게 사는 것 같은 자책이 들기 때문이예요. 그런 면에서 이 책 속의 문장들은 고마워요. 섣부르고 어설픈 긍정의 말들을 무작정 위로라는 포장으로 내밀지 않거든요. '그런 날이 있지, 괜찮아.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라고 조심스럽게 건내는 그의 위로가 참 사려깊게 느껴집니다. 저는 머리맡에 두고 매일 밤 잠자기 전 한 편씩 읽고 자요. 하루의 마무리가 편안해지고, 또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강원상 작가님의 감성적인 글들을 오랫동안 만나볼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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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옷의 세계 - 조금 다른 시선, 조금 다른 생활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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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제목이 마음에 든다. 내 이름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옷' 의 세계. 얼핏 시옷이 들어간 말들에 관한 에세이는 어떤 것일까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시인의 시선인 만큼 독특하고 곱지 않을까 기대를 하며 책을 펼쳤다. 사랑, 소망, 선물 같은 짧은 단어들을 생각했던 나의 상상력이 조금은 부끄럽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시옷' 의 세계는 심오하고 아름답다. 


사라짐, 새기다, 서슴거림, 선물이 되는 사람, 선물이 되는 시간, 숭배하다, 스무살에게, 시인으로 산다는 것, 씨앗를 심던 날, 씩씩하게......

실패. 
실패에 대해서 사람들은 어떤 정의를 내릴까? 혹은 어떤 생각들을 끄적이게 될까? 대개는 아마도 실패에 관련된 어떤 기억을 끄집어 내고, 그 순간의 감정을 떠올리고, 긍정적으로 환기시키며 마무리 할 것 같다. 그런데,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실패가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목격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를 읽는다. 

우리가 힘겹고 고독할 때 자연스레 시에 이끌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구나, 명쾌한 설명에 무릎을 탁 치게 된다. 비록 시의 형식이 어쩌고, 비유가 어쩌고, 시인이 시 속에 전하려 했던 생각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어렵더라도 우리가 시를 읽고 어떤 강렬한 느낌에 휘감길 수 밖에 없는 이유. 실패마저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즉 우리들 삶의 고단함을 어루만져주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여정임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매 챕터의 말미에 그녀가 좋아하는 시의 일부분을 고운 파란색 글씨로 적어 놓았다. 멀게만 느껴지던 시가 사뭇 가까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우리의 일상 곳곳에 시인의 눈길과 손길이 닿아 있음을 실감하게 되고, 결국 시라는 게 우리의 인생 그 자체임을 마주하게 된다. 결국 시인이 쓴 에세이 자체가 궁금했던 나는 그녀의 책을 읽으면서 시인의 삶과 사유의 세계에 매료되고, 시와 시옷의 세계에 깊이 빠져든다. 그녀의 눈을 통해 엿본 일상은 무언가 아름답고 몽환적이란 생각이 든다. 더럽고 추악하며 끔찍하고 각박하고 살기 싫은 세상을등진 채 곱고 순수한 것들만 바라보고 산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해 누구보다 더 적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눈과 손을 거쳐 들여다본 세상은 여전히 따뜻하고 아직은 살만한, 의미있는 곳이란 생각이 든다.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버린 소외된 사람들과 삶을 응원하며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그녀의 문장들 덕분이다.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것이 부끄러운 패배자의 삶이 아니라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아름다운 윤리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삶임을 확신케 해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밀고가 높고 습도가 낮은 건조한 문장을 신뢰하고, 온도가 지나치게 높거나 낮은 문장에서 풍기는 과잉이 부럽다고 했다. 나에게는 그녀의 문장들이 그렇게 느껴졌다. 한 문장 속에 최소한의 단어들로 그녀의 생각들을 오롯이 담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며 썼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눈에 보이는대로 글자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머리와 가슴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 집중력을 놓치는 순간, 그녀의 문장들은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단어들의 나열처럼 느껴져 난해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만큼 신중하게, 느릿느릿 읽어나가야 그녀가 보여주는 심오한 세계에 가닿을 수 있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탐미적이지도, 감상적이지도 않은 문장들이 좋다. 담백하게 다소 건조한 듯 무심하게 써내려간 글이 되려 진솔하게 다가온다. 세상살이의 민낯을 보여주면서, 노골적으로 희망과 사랑과 긍정을 노래하진 않지만 어딘가 살아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살아볼까, 제대로 변두리인으로 살아볼까-오히려 그것이 내 삶에 대한 자긍심과 자존감을 높여주는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묘한 의지가 자라난다. 

한 번 읽고 던져버리기엔 너무나 심오하고, 아름다운 책이다. 곁에 두고 오래오래 씹고 음미하고 삼켜야할 문장들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책에 잔뜩 그어진 밑줄들을 보며 손수 한 자, 한 자 정성껏 고운 노트에 적어 사랑하는 이에게 선물하고 싶다. 책장을 덮은 지금, 마치 곁에 두고도 몰랐던 은밀한 다른 차원의 세계로 여행을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든다. 일상이 친근하면서도 아득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문득 누군가와 함께 이 세계를 나누고 싶은 열망이 강렬해진다. 
 

 

속내. 사람의 속내가 빤히 보일 때는 내가 좀 움직여보자. 너무 한 자리에 앉아 있었단 증거일지도 모르니까. 사람이 너무 안 보일 땐 그 땐 좀 진득하게 앉아 있자. 너무 움직였단 증거일지도 모르니까. -p. 24



사물 하나의 변화를 통해 공간에 대한 체감 능력이 무한히 확장되는 것, 그것이 상상력이다. -p. 42



자연이 우리에게 건네준 증표들을 통해서 우리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엄청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용기를 얻는다. 시간을 서슬러서 연결 불가능한 것을 연결하는 용기를 얻는 것이 곧 상상력잉 셈이다. -p. 43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에 숨겨진 공간들, 그 경계의 영역들, 그 이상한 미지의 세계에 대해 느끼는 우리의 모호함을 시인은 상상력의 힘으로 정확하게 호명해낸다. -p. 46



발터 벤야민은 A도 아니고 B도 아닌 이 경계를 문지방 영역이라고 표현했다. (...) 한 세계와 또 한 세계의 문지방 위에서, 기대에 의한 희망과 절망의 교차점을 통과하면서,우리큰 가장 농밀하게 흔들리는 시간을 산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화학적으로 성숙한다. 성숙에 대해 한 시인이 이렇게 말해놓았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함민복, [꽃] 에서 -p.48



찬찬함과 천천함 덕분에 내가 사람다워지는 느낌이 난다. (...) 그 단순한 작업을, 그리도 천천히 해야 하기에, 나는 저절로 멍청해지고 저절로 홀가분해진다. 그런 시간은 너무도 더디고 너무도 촘촘하기 때문에 일상의 잡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냥 나는 내가 되어있다. -p. 83



친구는 살아오면서 잃은 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나는 잃은 것에 대해 말할 게 없는 사람이다. 친구는 잃었다는 상실감이 충격이 될 만큼 무언가를 가진 적이 있던 사람이고,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손에 쥔 적이 없어서 잃을 것도 없지만 온통 잃어버린 것투성인 것 같은 사람이다. -p. 91

소유. 조금 더 아름답기 위해서 우리는 조금씩 위선을 소유해야 하고, 조금 더 강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조금씩 위악을 소유해야 한다. -p. 92

율을 모르는 사람이, 언어에 대한 감식안이 없는 사람이 시인인 건 시에겐 너무 불행한 일이예요. 시는 노래잖잖아요. 둘러보세요, 지금 노래하는 시인이 누가 있어요. 전부 이미지, 이미지. 그게 아니면 인생은 이런 거야 가르치는 시. 시가 노래라는 사실을 모두가 잊어버렸나봐. -p. 98



절망과 두려움은 이겨내는 게 아니라 밥처럼 마주 앉아 나누는 것이다. 나누는 사이로 희망이 끼어들어 이유를 완성한다. -p. 115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손가락질하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반듯하게 걸으며 살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예요. 우리의 허우적거림은, 우리가 사람으로서 아직은 가능성이 있다는 뜻일 테죠. (......) 허우적거림은 나의 자세를 헝클고 공기를 헝클지만, 나를 넘어지지 않게 하고 공기를 고여 있지 않게 합니다.. 이렇게 허우적하우적하는 표현들을 가장 따뜻하게 받아주는 우리의 마지막 장소는 어쩌면 시의 장소일 겅예요. -p. 120-121



주워 온 사소한 사물들을 내가 간직하는 것은 추억이 소중해서가 아니라, 사소함이 이토록 커져간다는 것을 잊지 않고 싶어서다. -p. 144



심심함.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는 꿈이 아니라 심심함의 세계이다. 심심함을 견디기 위한 기술이 많아질수록 잃어가는 것이 많아진다. 심심하른 물리치거나 견디는 게 아니다. 환대하거나 누려야 하는 것이다. -p. 146



작전이 난관을 이겨내기 위한 수단이라면, 장난이란 모름지기, 그 난관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놀이다. (...) 장난은 어지러움 속에서 세상에게 속지 않고 비껴가는 재주를 주린다. -p. 150-151



사랑 앞에서 사랑을 믿는 행위은 거짓말을 숭배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노련한 거짓말이라서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숭배에 관하여 노련하기 때문에 가능한 작당이다. 거짓말이 사랑을 부르는 것은, 사랑이 거짓말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작당이다. -p. 160




이 세상에 미안하다는 말이 생겨난 것은 사랑이 거짓말을 간절히 사랑했기 때문이다. 당신과 내가 서로 난사한 요망한 거짓말들이, 그러나 간절하기만 한 거짓말들이, 부러진 날개처럼 애처로워져 있을 때에, 미안하다는 말은 가장 완벽한 붕대가 되곤 한다. -p. 162



힐난의 말은 현재진행형일 때 더욱더 고통이고, 사랑 가득한 말은 과거완료형일 때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이다. -p. 163




인간이 고통을 잊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고통을 망각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의 숙주가 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잊기보다는 익숙해지기. -p. 164



쉽게 읽히는 글처럼 쉬운 얼굴이 되었으면 한다. 바라보는 것에도, 듣는 것에도, 입술을 떼는 것에도, 헤아림도 없고 헷갈림도 없고 헤맴도 없었으면 한다. 쉽게 불러내어 만날 수 있는 벗처럼, 쉽게 드는 잠처럼. -p. 171

struggle. 부조리한 상황에 대하여 지치지 않고 안간힘을 쓰는, 고귀한 삶에의 의지. 여기엔 포기하지 않는다는 억척스러움이, 꼿꼿하고 굳세디만은 않다는 인간다움이, 낑낑대는 듯한 근근함이 포함돼 있었다. 피 냄새는 조금 덜했지만, 살 냄새가 났고, 땀 냄새가 났다. -p. 188

누구에게나 자기 한계는 주어져 있다. 이것에 주목하여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을 `시선` 이라고 한다면, 자기 한계를 기회로 받아들여 입장을 갖추기 시작하는 지점을 `시점`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야` 라는 것은 시선과 시점이 새로운 작용을 낳는 능력이다. 시선은 관심으로, 시점은 입장으로, 시야는 실천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시선을 통해서는 나를 다시 보고, 새로운 시점을 통해서는 당신을 다시 보고, 새로운 시야를 통해서는 세상을 다시 본다. -p. 194-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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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이 부서진 남자 스토리콜렉터 36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현 옮김 / 북로드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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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사람의 마음을 여는 법을 안다. 마음을 구부릴 수도 있고, 부술 수도 있으며, 겨울동안 폐쇄조치를 내릴 수도 있다. 그 밖에도 오만가지 방식으로 마음을 조져버릴 수도 있다. -p. 29


배에 립스틱으로 걸레라는 단어가 쓰여진 채 알몸으로 다리 밑으로 투신 자살한 여자. 그런 여자를 멀리서 바라보며 혼자 되뇌는 남자의 독백. 어떤 사람이든 자신의 뜻대로 조종할 수 있음을 자신감있는 어조로 이야기 한다. 단순한 조종을 뛰어넘어 한 사람을 자살로까지 몰고갈 수 있는 그의 능력과 기술은 대체 무엇일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강렬한 인트로다. 

 

여느 추리 소설에 비해 이 책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심리 스릴러물이라는 점이다.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불온한 세력들을 잡아들여 고문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캐내는 일을 했던 영국 정보부 소속 군인 기디온, 그리고 그와 심리 두뇌게임을 하는 저명한 심리학자 조 올로클린 박사. 소설을 이뜰어 가는 메인 캐릭터들의 직업 자체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일과 관련 이 있다. 전자는 마음을 읽고 틈을 만들어 부수는데 목적이 있다면, 후자는 마음을 열게하여 그 상처를 치유하는데 목적이 있다. 게다가 기디온은 딸과 부인을 잃은 사람이고, 조눈 딸과 부인을 지키려는 자이다. 직업부터 자신들이 처한 상황까지 극과 극에 놓여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 있다. 특히나 가족을 잃고 마음이 부서져버린 기디언과 파킨슨병에 걸려 움직일 수 없는 몸에 정신이 갇혀 버린 조 역시 마음이 부서져 간다. 그러한 과정들이 세심하게 잘 그려져 있고, 그들의 심리 변화가 생생하게 전달된다. 

 

책 뒷면에 쓰여진 문구들처럼 한 번 붙잡으면 쉬이 멈출 수 없는 강렬한 흡입력을 가진 추리 소설이다. 살인의 이유, 살인의 방법, 그리고 그 과정 전체가 긴장감있고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자체도 그러하지만 서서히 내 목을 조여오는 것만 같은 생생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손에 땀을 쥐게 만들 뿐만 아니라 마치 나의 은밀한 세계 역시 누군가에 의해 파헤쳐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포가 나를 사로잡는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는 법이고, 누구도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비밀이 가장 숨기고 싶었던 상대에게 까발려 진다면, 특히나 지키고 싶은 누군가와 나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면, 어떠한 짓이든 주저없이 행할 수 있을것만 같다. 그러한 설정 자체가 너무나 두렵고, 또한 특정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는 그런 기술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이 새삼 무섭게 다가온다. 

 

과연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기디온과 조가 들었던 그 소리가 쉬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사실은 듣고 싶지 않은 걸테지만. 

나는 사람의 마음을 여는 법을 안다. 마음을 구부릴 수도 있고, 부술 수도 있으며, 겨울동안 폐쇄조치를 내릴 수도 있다. 그 밖에도 오만가지 방식으로 마음을 조져버릴 수도 있다. -p.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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