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옷의 세계 - 조금 다른 시선, 조금 다른 생활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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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제목이 마음에 든다. 내 이름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옷' 의 세계. 얼핏 시옷이 들어간 말들에 관한 에세이는 어떤 것일까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시인의 시선인 만큼 독특하고 곱지 않을까 기대를 하며 책을 펼쳤다. 사랑, 소망, 선물 같은 짧은 단어들을 생각했던 나의 상상력이 조금은 부끄럽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시옷' 의 세계는 심오하고 아름답다. 


사라짐, 새기다, 서슴거림, 선물이 되는 사람, 선물이 되는 시간, 숭배하다, 스무살에게, 시인으로 산다는 것, 씨앗를 심던 날, 씩씩하게......

실패. 
실패에 대해서 사람들은 어떤 정의를 내릴까? 혹은 어떤 생각들을 끄적이게 될까? 대개는 아마도 실패에 관련된 어떤 기억을 끄집어 내고, 그 순간의 감정을 떠올리고, 긍정적으로 환기시키며 마무리 할 것 같다. 그런데,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실패가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목격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를 읽는다. 

우리가 힘겹고 고독할 때 자연스레 시에 이끌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구나, 명쾌한 설명에 무릎을 탁 치게 된다. 비록 시의 형식이 어쩌고, 비유가 어쩌고, 시인이 시 속에 전하려 했던 생각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어렵더라도 우리가 시를 읽고 어떤 강렬한 느낌에 휘감길 수 밖에 없는 이유. 실패마저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즉 우리들 삶의 고단함을 어루만져주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여정임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매 챕터의 말미에 그녀가 좋아하는 시의 일부분을 고운 파란색 글씨로 적어 놓았다. 멀게만 느껴지던 시가 사뭇 가까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우리의 일상 곳곳에 시인의 눈길과 손길이 닿아 있음을 실감하게 되고, 결국 시라는 게 우리의 인생 그 자체임을 마주하게 된다. 결국 시인이 쓴 에세이 자체가 궁금했던 나는 그녀의 책을 읽으면서 시인의 삶과 사유의 세계에 매료되고, 시와 시옷의 세계에 깊이 빠져든다. 그녀의 눈을 통해 엿본 일상은 무언가 아름답고 몽환적이란 생각이 든다. 더럽고 추악하며 끔찍하고 각박하고 살기 싫은 세상을등진 채 곱고 순수한 것들만 바라보고 산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해 누구보다 더 적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눈과 손을 거쳐 들여다본 세상은 여전히 따뜻하고 아직은 살만한, 의미있는 곳이란 생각이 든다.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버린 소외된 사람들과 삶을 응원하며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그녀의 문장들 덕분이다.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것이 부끄러운 패배자의 삶이 아니라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아름다운 윤리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삶임을 확신케 해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밀고가 높고 습도가 낮은 건조한 문장을 신뢰하고, 온도가 지나치게 높거나 낮은 문장에서 풍기는 과잉이 부럽다고 했다. 나에게는 그녀의 문장들이 그렇게 느껴졌다. 한 문장 속에 최소한의 단어들로 그녀의 생각들을 오롯이 담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며 썼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눈에 보이는대로 글자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머리와 가슴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 집중력을 놓치는 순간, 그녀의 문장들은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단어들의 나열처럼 느껴져 난해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만큼 신중하게, 느릿느릿 읽어나가야 그녀가 보여주는 심오한 세계에 가닿을 수 있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탐미적이지도, 감상적이지도 않은 문장들이 좋다. 담백하게 다소 건조한 듯 무심하게 써내려간 글이 되려 진솔하게 다가온다. 세상살이의 민낯을 보여주면서, 노골적으로 희망과 사랑과 긍정을 노래하진 않지만 어딘가 살아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살아볼까, 제대로 변두리인으로 살아볼까-오히려 그것이 내 삶에 대한 자긍심과 자존감을 높여주는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묘한 의지가 자라난다. 

한 번 읽고 던져버리기엔 너무나 심오하고, 아름다운 책이다. 곁에 두고 오래오래 씹고 음미하고 삼켜야할 문장들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책에 잔뜩 그어진 밑줄들을 보며 손수 한 자, 한 자 정성껏 고운 노트에 적어 사랑하는 이에게 선물하고 싶다. 책장을 덮은 지금, 마치 곁에 두고도 몰랐던 은밀한 다른 차원의 세계로 여행을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든다. 일상이 친근하면서도 아득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문득 누군가와 함께 이 세계를 나누고 싶은 열망이 강렬해진다. 
 

 

속내. 사람의 속내가 빤히 보일 때는 내가 좀 움직여보자. 너무 한 자리에 앉아 있었단 증거일지도 모르니까. 사람이 너무 안 보일 땐 그 땐 좀 진득하게 앉아 있자. 너무 움직였단 증거일지도 모르니까. -p. 24



사물 하나의 변화를 통해 공간에 대한 체감 능력이 무한히 확장되는 것, 그것이 상상력이다. -p. 42



자연이 우리에게 건네준 증표들을 통해서 우리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엄청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용기를 얻는다. 시간을 서슬러서 연결 불가능한 것을 연결하는 용기를 얻는 것이 곧 상상력잉 셈이다. -p. 43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에 숨겨진 공간들, 그 경계의 영역들, 그 이상한 미지의 세계에 대해 느끼는 우리의 모호함을 시인은 상상력의 힘으로 정확하게 호명해낸다. -p. 46



발터 벤야민은 A도 아니고 B도 아닌 이 경계를 문지방 영역이라고 표현했다. (...) 한 세계와 또 한 세계의 문지방 위에서, 기대에 의한 희망과 절망의 교차점을 통과하면서,우리큰 가장 농밀하게 흔들리는 시간을 산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화학적으로 성숙한다. 성숙에 대해 한 시인이 이렇게 말해놓았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함민복, [꽃] 에서 -p.48



찬찬함과 천천함 덕분에 내가 사람다워지는 느낌이 난다. (...) 그 단순한 작업을, 그리도 천천히 해야 하기에, 나는 저절로 멍청해지고 저절로 홀가분해진다. 그런 시간은 너무도 더디고 너무도 촘촘하기 때문에 일상의 잡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냥 나는 내가 되어있다. -p. 83



친구는 살아오면서 잃은 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나는 잃은 것에 대해 말할 게 없는 사람이다. 친구는 잃었다는 상실감이 충격이 될 만큼 무언가를 가진 적이 있던 사람이고,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손에 쥔 적이 없어서 잃을 것도 없지만 온통 잃어버린 것투성인 것 같은 사람이다. -p. 91

소유. 조금 더 아름답기 위해서 우리는 조금씩 위선을 소유해야 하고, 조금 더 강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조금씩 위악을 소유해야 한다. -p. 92

율을 모르는 사람이, 언어에 대한 감식안이 없는 사람이 시인인 건 시에겐 너무 불행한 일이예요. 시는 노래잖잖아요. 둘러보세요, 지금 노래하는 시인이 누가 있어요. 전부 이미지, 이미지. 그게 아니면 인생은 이런 거야 가르치는 시. 시가 노래라는 사실을 모두가 잊어버렸나봐. -p. 98



절망과 두려움은 이겨내는 게 아니라 밥처럼 마주 앉아 나누는 것이다. 나누는 사이로 희망이 끼어들어 이유를 완성한다. -p. 115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손가락질하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반듯하게 걸으며 살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예요. 우리의 허우적거림은, 우리가 사람으로서 아직은 가능성이 있다는 뜻일 테죠. (......) 허우적거림은 나의 자세를 헝클고 공기를 헝클지만, 나를 넘어지지 않게 하고 공기를 고여 있지 않게 합니다.. 이렇게 허우적하우적하는 표현들을 가장 따뜻하게 받아주는 우리의 마지막 장소는 어쩌면 시의 장소일 겅예요. -p. 120-121



주워 온 사소한 사물들을 내가 간직하는 것은 추억이 소중해서가 아니라, 사소함이 이토록 커져간다는 것을 잊지 않고 싶어서다. -p. 144



심심함.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는 꿈이 아니라 심심함의 세계이다. 심심함을 견디기 위한 기술이 많아질수록 잃어가는 것이 많아진다. 심심하른 물리치거나 견디는 게 아니다. 환대하거나 누려야 하는 것이다. -p. 146



작전이 난관을 이겨내기 위한 수단이라면, 장난이란 모름지기, 그 난관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놀이다. (...) 장난은 어지러움 속에서 세상에게 속지 않고 비껴가는 재주를 주린다. -p. 150-151



사랑 앞에서 사랑을 믿는 행위은 거짓말을 숭배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노련한 거짓말이라서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숭배에 관하여 노련하기 때문에 가능한 작당이다. 거짓말이 사랑을 부르는 것은, 사랑이 거짓말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작당이다. -p. 160




이 세상에 미안하다는 말이 생겨난 것은 사랑이 거짓말을 간절히 사랑했기 때문이다. 당신과 내가 서로 난사한 요망한 거짓말들이, 그러나 간절하기만 한 거짓말들이, 부러진 날개처럼 애처로워져 있을 때에, 미안하다는 말은 가장 완벽한 붕대가 되곤 한다. -p. 162



힐난의 말은 현재진행형일 때 더욱더 고통이고, 사랑 가득한 말은 과거완료형일 때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이다. -p. 163




인간이 고통을 잊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고통을 망각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의 숙주가 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잊기보다는 익숙해지기. -p. 164



쉽게 읽히는 글처럼 쉬운 얼굴이 되었으면 한다. 바라보는 것에도, 듣는 것에도, 입술을 떼는 것에도, 헤아림도 없고 헷갈림도 없고 헤맴도 없었으면 한다. 쉽게 불러내어 만날 수 있는 벗처럼, 쉽게 드는 잠처럼. -p. 171

struggle. 부조리한 상황에 대하여 지치지 않고 안간힘을 쓰는, 고귀한 삶에의 의지. 여기엔 포기하지 않는다는 억척스러움이, 꼿꼿하고 굳세디만은 않다는 인간다움이, 낑낑대는 듯한 근근함이 포함돼 있었다. 피 냄새는 조금 덜했지만, 살 냄새가 났고, 땀 냄새가 났다. -p. 188

누구에게나 자기 한계는 주어져 있다. 이것에 주목하여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을 `시선` 이라고 한다면, 자기 한계를 기회로 받아들여 입장을 갖추기 시작하는 지점을 `시점`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야` 라는 것은 시선과 시점이 새로운 작용을 낳는 능력이다. 시선은 관심으로, 시점은 입장으로, 시야는 실천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시선을 통해서는 나를 다시 보고, 새로운 시점을 통해서는 당신을 다시 보고, 새로운 시야를 통해서는 세상을 다시 본다. -p. 194-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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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이 부서진 남자 스토리콜렉터 36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현 옮김 / 북로드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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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사람의 마음을 여는 법을 안다. 마음을 구부릴 수도 있고, 부술 수도 있으며, 겨울동안 폐쇄조치를 내릴 수도 있다. 그 밖에도 오만가지 방식으로 마음을 조져버릴 수도 있다. -p. 29


배에 립스틱으로 걸레라는 단어가 쓰여진 채 알몸으로 다리 밑으로 투신 자살한 여자. 그런 여자를 멀리서 바라보며 혼자 되뇌는 남자의 독백. 어떤 사람이든 자신의 뜻대로 조종할 수 있음을 자신감있는 어조로 이야기 한다. 단순한 조종을 뛰어넘어 한 사람을 자살로까지 몰고갈 수 있는 그의 능력과 기술은 대체 무엇일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강렬한 인트로다. 

 

여느 추리 소설에 비해 이 책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심리 스릴러물이라는 점이다.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불온한 세력들을 잡아들여 고문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캐내는 일을 했던 영국 정보부 소속 군인 기디온, 그리고 그와 심리 두뇌게임을 하는 저명한 심리학자 조 올로클린 박사. 소설을 이뜰어 가는 메인 캐릭터들의 직업 자체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일과 관련 이 있다. 전자는 마음을 읽고 틈을 만들어 부수는데 목적이 있다면, 후자는 마음을 열게하여 그 상처를 치유하는데 목적이 있다. 게다가 기디온은 딸과 부인을 잃은 사람이고, 조눈 딸과 부인을 지키려는 자이다. 직업부터 자신들이 처한 상황까지 극과 극에 놓여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 있다. 특히나 가족을 잃고 마음이 부서져버린 기디언과 파킨슨병에 걸려 움직일 수 없는 몸에 정신이 갇혀 버린 조 역시 마음이 부서져 간다. 그러한 과정들이 세심하게 잘 그려져 있고, 그들의 심리 변화가 생생하게 전달된다. 

 

책 뒷면에 쓰여진 문구들처럼 한 번 붙잡으면 쉬이 멈출 수 없는 강렬한 흡입력을 가진 추리 소설이다. 살인의 이유, 살인의 방법, 그리고 그 과정 전체가 긴장감있고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자체도 그러하지만 서서히 내 목을 조여오는 것만 같은 생생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손에 땀을 쥐게 만들 뿐만 아니라 마치 나의 은밀한 세계 역시 누군가에 의해 파헤쳐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포가 나를 사로잡는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는 법이고, 누구도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비밀이 가장 숨기고 싶었던 상대에게 까발려 진다면, 특히나 지키고 싶은 누군가와 나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면, 어떠한 짓이든 주저없이 행할 수 있을것만 같다. 그러한 설정 자체가 너무나 두렵고, 또한 특정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는 그런 기술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이 새삼 무섭게 다가온다. 

 

과연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기디온과 조가 들었던 그 소리가 쉬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사실은 듣고 싶지 않은 걸테지만. 

나는 사람의 마음을 여는 법을 안다. 마음을 구부릴 수도 있고, 부술 수도 있으며, 겨울동안 폐쇄조치를 내릴 수도 있다. 그 밖에도 오만가지 방식으로 마음을 조져버릴 수도 있다. -p.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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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친구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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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조금만 더 불행해줘."

여자들의 우정과 악의가 만들어내는 끈적끈적한 교향곡

이 책의 띠지에 쓰여져 있는 문구이다. 나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우정이라는 허울 아래 얼마나 많은 여성들 사이에 복잡미묘한 심리전이 벌어지는지. 슬프지만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사실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역시 여자들일 것이다. 어쩌면 남자들보다 더 잔혹하고 끔찍한 여자들 사이의 은밀한 공격성에 대해 폭로해줄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여자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우정과 악의에 대한 내용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반전인 서술트릭과 후반부 피해자에 대한 신변조사가 이뤄졌을 때 정도에서만 그려진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네 이웃의 악의를 조심하라', '불쌍하구나' 혹은 '딸은 딸이다' 와 같은 소설들이 여자들 사이의 시기와 질투 등을 더 잘 표현한 작품 같다. 

실제로 이 작품은 피해자들의 사생활을 폭로함으로써 여성들에 대한 사회비판적인 면모가 더 두드러진다. 부동산 경제나 가정주부의 사회 활동에 대한 제도적 측면은 일본의 특징적인 사안인만큼 제쳐두고, 두 여성 피해자들의 이중생활은 가히 충격적이다. 바로 여성들의 성상품화 문제이다. 낮에는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밤에는 유흥 업소에 출근하거나 성매매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여성들이 극심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기때문에 투잡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통 자신의 허영과 과소비때문이고 과도한 지출을 메우기 위해 부적절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여성들의 사회적 평등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여성성을 경제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이중적인 모습은 같은 여성으로서 수치스러울 따름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 근본적 원인을 여성 특유의 시기와 질투심에서 찾는다. 가장 가까운 여자친구로부터 느끼는 시샘과 박탈감때문에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좋은 집에 살며, 더 좋은 남자친구를 만나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경쟁하듯 과시하며 행동하는 친구는 어렵지 않게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더 이 소설 속 사건이 찝찝하게 느껴진다. 

이 책은 실제 1997년에 벌어진 '도쿄전력 OL 살인 사건' 을 보티브로 쓰여진 것이라고 하는데, 긴장감과 몰입도가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건을 파헤치는 르포 작가의 시선으로 소설이 전개 되는만큼 각 챕터는 월간 잡지의 기사로 이루어져 있다. 의문인 것은 실제로 이런 기사가 잘 팔리고, 독자들로부터 읽힐까 라는 점이다. 살인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가를 놓고 검찰과 다른 주장을 하는 상황에서 적확한 증거와 냉철한 분석 대신 피해자들에 대한 주변인들의 인터뷰 내용에 근거하여 글쓴이의 감과 상상에 의지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게다가 꽤나 감상적이고 독백조라 정말 이게 잡지 원고가 되나 싶달까. 그래서 긴장감이나 스릴과는 먼 추리 소설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마지막 서술 트릭으로 한 방을 노리기엔 약간 늘어졌던 소설이라 그 점이 안타깝다. 

진실을 쓰고자 해도 주관이 들어간다. 주관이 들어간 시점에서 이미 진실이라는 핵심에 다다르는 궤도를 이탈한 셈이다. 좀도 기탄없이 말하자면 진실은 단 하나가 아니라 주관의 수만큼 존재한다. -p. 126

세상에는 갖가지 함정이 있어요. 충실감을 맛보고 싶다, 진정한 자신을 찾고 싶다, 몰두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하다, 생활에 활력이 필요하다, 감동이 필요하다. 이렇듯 의존증 기질이 있는 사람을 노리고 온갖 함정이 산재해 있으니까 거기 빠지면 안 돼요. -p. 141

무리한 까닭에 마키코의 운명에 작은 균열이 생긴다. 처음에는 점만한 작은 균열이었지만 점차 커져서 궤도를 이탈하는 원인이 된다. -p. 162

가상 세계에서 사람들은 SF에서난 경험할 수 있었던 평행 세계를 손에 넣어 또 하나의 자신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깨달았다. 이미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사라졌다. 사람들은 현실과 가상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동시에 복수의 인생을 살고 있다. 좋든 싫군 이 사실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리 시간이 디나고 목적지에 당도할 수 없다. 인간은 더이상 현실 세계에만 살고 있지 않다. -p. 180

이야기가 맞물리지 않고 엇나가는 여자 친구. 그래도 대화가 성립된 덧은 한쪽이 무조건 꺾여주었기 때문이다. 꺾여주는 쪽은 상대가 수긍하는 답을,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 답을 자전거 페달을 밟듯이 끊임없이 찾는다. 페달 밟기를 멈추는 순간 자전거는 넘어진다. 넘어지는 게 뭐 어때서, 라고 생각하면서도 넘어뜨릴 기회를 좀처럼 찾지 못 한다. 인연을 끊을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움받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이렇듯 어떤 어른이든심악한 청소년이나 품을 듯한 공포를 마음 속에 숨겨놓고 있다. p.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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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위로다 - 명화에서 찾은 삶의 가치, 그리고 살아갈 용기
이소영 지음 / 홍익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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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에 다니던 무렵, 학교가 끝나면 바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도통 여유라는 것이 없었다. 학교 수업 듣고, 과제하고, 시험 공부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면 남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가끔 같은 과 친구들이 무슨 전시회를 보고 왔다거나 뮤지컬, 연극 공연을 보고 왔다고 말하는 날이면 어쩐지 서글프기도 하고, 나만 겉도는 것 같아 속상하기도 했다. 일단은 예술이라는 분야 자체에문외한인데다가 당시에는 그 비용이 엄청나게 큰 금액으로 느껴졌었다. 지금도 물론 유명한 뮤지컬 공연 같은 것은 엄두도 못 내지만. 그러다 친구의 손에 이끌려 모네 전을 갔었다. 어떠한 사전 지식도 없었고, 유명한 그의 그림도 아는 것이 없었다. 묘한 이질감을 느끼며 미술관을 배회하던 그 때 발길을 사로잡는 그림이 있었다. 풍차가 그려진 그림이었는데, 붉게 물든 꽃밭과 파란 하늘이 시선을 끌었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평범한 풍경화였겠지만 나는 어쩐지 가슴 속에서 울컥하는 느낌을 받았다. 꾸역꾸역 전시관을 다 둘러보고도 그 그림이 다시 보고 싶어 여러 번 그 앞을 서성거렸다. 결국 그 그림이 프린트 된 엽서 한 장을 사서 돌아오는데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그 날의 만족감과 행복감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고, 바쁨에 찌들어가고 있을 때 인스타그램에서 소영님을 만나게 되었다. 정말 꾸준하게 매일밤 그림을 보여주시고, 작가나 작품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미소를 짓게 만드는 그림도 있었고 가슴 한 켠을 뭉클하게 만드는 그림도 있었다. 그림을 보면서 단조롭게 하루를 보낸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다채로운 감정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소영님의 글과 그림을 책으로 만나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다. 일단은 인스타그램 창보다 훨씬 크고 선명하게 그림들을 만날 수 있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맨질맨질한 종이 위에 알록달록 선명하게 드러난 색깔들을 보고 있노라면 도록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좋다. 역시 책은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기는 맛이 있달까. 책 속에는 그림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작품이나 작가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이 담겨 있다. 마치 엄마가 들려주던 옛날 이야기처럼 느껴져서 생소한 작가나 그림이 등장해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번엔 어떤 작품과 작가를 만나게 될지 궁금하고 설레인다. 그리고 명화 에세이답게 그녀의 삶과 생각, 감정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미대생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부유하고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가 전해주는 미대생의 현실 또한 녹록치 않다. 어쩌면 평범하다면 평범할 우리들의 삶보다 더 고단할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예술가나 큐레이터처럼 마냥 우아하고 고상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느 대학생들처럼 치열하게 과제와 시험을 준비하고, 취업을 고민한다. 오히려 미대생이기에 지원할 수 있는 자리 자체가 현저히 적다고 한다. 특히 그녀는 젊은 나이에 미술 교육과 관련된 사업을 시작했기때문에 남몰래 눈물 흘려야 했던 날도 몹시 많았던 것 같다. 그녀는 담담하게 사랑과 이별의 기쁨과 아픔, 그리고 삶의 고단함과 소소한 행복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렇듯 그녀가 그림과 함께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몹시나 평범하고 우리의 일상과 닮아있다. 그녀의 친절한 안내 덕분에 그림들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다채로운 감정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물론 그녀나 예술 작품들이-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만나게 되는,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삶과 관련한 무수한 질문들에 대해 해답을 들려주는 것은 아니다. 대신에 그림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해답을 찾아갈 것인지 생각할 시간과 여유를 준다. 그리고 그 그림을 보며 같이 울고, 웃는 과정에서 오래전부터 나와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존재해 왔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마음 속 깊이 응어리져있던, 이름모를 감정들이 마침내 제 이름을 찾고 흘러 나가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녀는 인생을 살아온 선배로써 그림을 보여주고, 그 그림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떻게 마음을 추스렸는지 이야기해준다. 누구나 해왔던 고민이자 경험해야하는 과정이었음을 알려준다. 멋진 백마디 말보다 그림 한장이 주는 공감과 위로란 얼마나 뭉클하고 잔잔하게 전해져 오는지. 

역시 그림의 힘, 그림이 건네는 위로란 대단하다. 매일밤 그녀의 이야기를 읽고, 관련된 작품들을 보고 나면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내일에 대한 자그마한 희망과 함께. 매일 지옥같이 느껴지고 별 것 없는 나의 일상이 누군가의 눈과 손을 통해 이렇게 멋진 그림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되었기 때문이다. 눈부신 순간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누리는 이 일 분, 일 초를 어떻게 바라보고 느끼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러한 심미안과 날것 그대로의 감정들을 찾게 된다. 내가 대충 흘려버린 하루가 누구에겐 너무나 간절했던 하루일 수 있고, 예술가의 눈을 통하면 그것 역시 작품이 되니까. 행복하고 빛나는 순간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열심히 보고 듣고 느껴야겠다. 그리고 나의 하루를 좀 더 아름답게 만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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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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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작가님의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을 무척 좋아했다. 어쩜 이렇게 내 마음을 콕콕 집어내 멋지게 풀어내주는 것처럼 주옥같은 문장들이 많은지. 그럼에도 이 분의 소설책은 잘 읽히지가 않았다. 선물 받은 원더보이도 도무지 진도가 나가질 않아 십분의 일도 읽지 못한 채 책꽂이로 직행해야 했다. 지나치게 섣부른 판단인지도 모르겠지만 한 두어권 읽다가 포기하게 되는 작가님들의 소설은 절대 들춰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을 짚어들게 된 이유는 다음의 한 문장 때문이다.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 -p. 327

이 문장이 궁금증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일종의 경쟁심을 불러일으켰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샘솟았다. 마치 추리소설을 읽으며 트릭를 깨기 위해 집중할 때처럼 꼼꼼하게 책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도입 부분은 카밀라의 엄마 앤의 죽음으로 인한 감정 상태와 과거 회상이 주를 이룬다. 미국에 입양되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의문을 품고 있던 한국인 소녀의 사춘기 시절, 두 번째 엄마 앤을 떠나 보내야했던 것, 아빠의 재혼,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삶을 더욱 슬프게, 공허하게 만들었다. 책을 다 읽고난 지금은 우울하고 두서없이 느껴지는 도입부가 그녀의 내면 세계를 오롯이 반영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지만 처음에는 이야기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고독과 허무, 회한과 그리움의 감정들이 모호하게 뒤엉켜 있었으며 그녀의 일상은 난해한 장면들의 연속처럼 느껴졌다. 책이 어렵다라는 생각에 포기하고 싶을 때쯤 카밀라가 유이치를 만나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효과를 불러와 결국 카밀라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 한국의 진남으로 떠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바로 이 때부터 이야기는 흥미로워지기 시작한다. 그녀의 삶에 뚜렷한 목표가 생기게 되면서 뿌옇기만 했던 그녀의 감정과 생각들이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을만큼- 뚜렷해진다. 그리고 무언가 그녀의 출생에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엄마 정지은에 대한 실마리를 쥐고 있는 진남여고의 교장 신혜숙의 태도는 무언가 석연치 않다. 그것을 밝히려는 자와 숨기려는 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과 진실을 파헤치고 싶은 욕구가 솟구친다.   

 
두 번째 장인 지은에서는 이미 고인이 된 정지은의 시점에서 카밀라의 상황을 말해주고, 과거 어떠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 자신을 찾으러온, 이미 바다의 차가운 물거품이 되버린 17살의 정지은이 카밀라를 바라보는 따스하고 안쓰러운 시선이 가슴을 저민다. 특히 자신보다 훌쩍 나이를 먹어버린 딸을 바라보는 어린 엄마의 심정은 얼마나 기묘할지. 그렇게 딸을 아꼈던 17살 정지은은 왜 아이를 멀리 입양 보내고 자살을 했던 것인지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세 번째 장인 우리에서는 지은의 여고 시절 친구들이 등장한다. 똑같은 사건을 각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았고,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네 번째 장 특별전에서는 이희재가 어떻게 지은을 만났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매 장마다 갑자기 화자가 바뀌는 것은 신선하게 느껴지지만 한 편으로는 굉장한 집중력을 요한다. 그 사건에 실재했던 여러 가지 사실들을 각자의 입장에서 단편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은의 임신과 자살에 대해서 누구 하나 답을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을 시간순으로 배열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 된다.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과거의 점들이 모두 드러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 한다. 앞으로 어떤 점들을 밟고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인생은 지금보다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너 같은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과거의 점들이 모두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네 인생은 몇 번이고 달라지더라. 인생의 행로가 달라진다는 말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 자체가 갈라진다는 것이다. -p. 202

 


 

카밀라가 미국에 보내지기 이전, 그 때의 과거의 점들은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숨어있던 여러 점들을 찾아내 선의 인생으로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우후죽순 찾아낸 점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으며 일방적으로 그녀의 정체성을 뒤바꿔놓았다. 자신의 어머니가 어떠한 소녀였는지, 그의 아버지가 정재성, 최성식, 이희재 중 누구였는지에 따라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카밀라, 즉 정희재라는 사람의 뿌리, 그것과 관련된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단순히 나를 낳아준 부모님을 만나고, 나를 버려야만 했던 그 이유를 듣고 당신들을 이해하고 용서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자신의 본질과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인간에게 삶이라는 것은 그저 두렵고 애매하며 겉도는 궤도같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 나름 행복한 입양 가정에서 자란 카밀라마저 젊은 날의 언젠가 약물 중독에 빠져 현실로 부터 도피를 한 것이라. 결국 아무리 카밀라가 잊으려 해도 본인이 정희재가 된 그 순간부터 그것이 기존의 자신을 바꿔도 좋을만큼 중요하고 생에 꼭 해내야 하는 일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멍한 눈동자로 타임라인을 읽어가다가 윤경은 트위터에다 '그런데 난 잘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지은이는 왜 자살한거지? 외로워서 그런건가? 누구 아는 사람?'이라고 썼다. (......) 대신에 트위터에는 열 시간 전에 유진이 보낸 멘션이 있었다. '우리가 걔를 죽인 거잖아.' -p. 249

우리가 정지은에 대한 진실에 근접할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씁쓸함이다. 똑같은 사물이라 할지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그것은 달리 보인다. 하물며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떠한 사건을 바라보는 입장과 생각은 개개인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 막는 거대한 심연이 존재한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어떠한 사람과도 그 심연을 넘을 수도, 없앨 수도 없다. 그래서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그 사람의 깊숙한 내면에 존재하는 본심에는 닿을 수가 없다. 그 심연을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아 헤매지만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너와 나사이의 넘을 수 없는 투명한 장벽일 뿐이다. 그 장벽은 서로를 밀어내어 일정한 거리 이내로, 즉 한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는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섣불리 누군가를 판단해서도, 내가 바라보고 듣고 느끼고 기억하는 모든 것들을 절대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라는 사람을 통과해 가는 순간 진실은 이미 나의 생각들로 가득 채워진 그럴싸한 거짓으로 변해 버린다. 사람들의 말, 말, 말. 그것들이 진실을 가리고,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며, 누군가를 자살로 몰아넣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 꿈과 같은 일이라 네 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지만, 결국에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날개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 그 이유를 잘 알아야만 합니다. 날개는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었다면, 하늘을 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테니까요.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생각도 못했을 테지요. -p.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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