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가는 카피 손이 가는 브랜드 - 카피라이터 3년, 마케터 2년, 광고 같은 기록들
김화국 지음 / 시공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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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시공사를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눈이 가는 카피 손이 가는 브랜드>


어느 아침엔 멀쩡했던 회사가 저녁엔 사라져 있고
그 공백 위에서 다시 길을 고르는
한 사람의 고백이 이어진다.
카피라이터와 마케터 사이
잿더미처럼 남은 마음을 들여다보며
새로운 생을 발굴해 나가는 일과
삶의 전환을 정직하게 기록한 책.


📖 책을 읽고 나서


낡은 직함을 잠시 내려놓고 나면
삶은 뜻밖의 질문을 건네곤 한다.
익숙한 책상도
오래 붙들어온 역할도 순식간에 흔들릴 때
사람은 자신이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시험대에 올라서게 된다.
이 이야기의 페이지들은 바로 그 순간들로 가득하다.
회사의 이름이 지워져 버린 어느 날
방향을 잃은 채 시부야의 인파를 헤치던
그 마음의 형태가 또렷하게 남아 있다.
갑작스러운 상실 앞에서 주저앉지 않으려
애쓰던 흔적이 아니라
선택을 새로 그리는 과정에서
뒤척이는 인간의 무언가에 가깝다.

기존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손짓과
단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문을 두드려 보라는 충동이
동시에 속을 흔들 때 우리는 결국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내게 더 가까운 이름은 무엇인가.’
이 기록에서는 그 질문에 선뜻 답하지 않는다.
대신 흔들림 속에서 매일 조금씩
중심을 다시 세우는 시도를 응시한다.
카피 한 줄을 붙잡고 씨름하던 시간도
마케팅이라는 언어를 새로 익히며
낯선 세계를 헤아리려던 순간도
모두 한 사람의 변화라는 여정을 구성하는 조각들이다.

변명하지 않고 화려하게 포장하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일과 삶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인간의 몸짓을 담담히 보여준다.
패배처럼 보이는 일과
시작처럼 보이는 일이 뒤섞인 자리에서
누군가는 주저하고 누군가는 나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의 사실이 드러난다.
방향을 잃는 순간은 무너지는 시간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가정이 깨지고
새로운 선택이 태어나는 자리라는 것.

이 책은 변화 앞에서 가장 먼저 흔들리는
마음의 표면을 숨기지 않고 펼쳐 보인다.
실직이라는 낯선 충격도 새 직무의 낯설음도
그 모든 파동을 끌어안고
스스로 살아갈 이름을 다시 골라내는 한
사람의 여정이 오래도록 번져 나온다.

마침내 선택의 문턱에서 머뭇거리던
발걸음이 움직이는 순간 이 기록은 자국을 남긴다.
잃어버린 자리가 끝이 아니며
혼란도 방향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
삶이 예상치 못한 모양으로 뒤집힐 때조차
사람은 또 다른 자신으로 이어지는 길을
어렵사리 찾아낸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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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 있는 물리학 - 일상과 세상을 다시 이해하는 힘
다구치 요시히로 지음, 오시연 옮김, 정광훈 감수 / 그린북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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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쓸모 있는 물리학>


빛이 직진한다고 믿어온 세상이
아주 작은 틈 앞에서
꺾여 나가는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
이 책은 그 순간을 잡아 눈앞에 펼쳐놓듯
우리가 매일 통과하고도 몰랐던 물리의 규칙들이
어떻게 세계의 해상도를 바꿔 놓는지 보여준다.


📖 책을 읽고 나서


세계는 늘 보이는 만큼만 존재한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눈앞의 현상들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나 있었고
그 빈틈을 들여다보는 일은 ‘당연하다고 여긴 세계’가
얼마나 허술한 토대 위에서 서 있는지를 드러내곤 한다.
전류가 흐르는 방향이 뒤집혀 있었다는 사실
빛이 무게도 없으면서 굽어 들어간다는 사실
압도적인 질량 하나가
모든 힘의 균형을 바꾸어버린다는 사실.
이런 깨달음은 사소한 호기심의 형태로 시작되지만
결국엔 ‘세계가 이렇게 운영되고 있었다’는
더 큰 문을 열어젖히게 만든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자동차가 왜 급정거를 피하는지
인덕션이 어떤 방식으로 불을 켜는지
깊은 바다에서 왜 몸이 그렇게 짓눌리는지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 날개에
어떤 힘이 숨어 있는지 따져 묻지 않는다.
묻지 않아도 세상은 돌아가고
남들은 이미 알고 있는 법칙처럼 굴러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그 ‘이미 알고 있는 것’이란
사실 오래전부터 이어진 오해와 수정
추측과 실패, 그리고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탐색의 흔적 위에서 자리 잡은 것임을 알게 된다.
그 역사에 귀를 기울이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세계는 결코 단순한 힘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보는 모든 현상에는
겹겹의 이유와 숱한 개념들이
서로를 밀고 당기며 맞춰 온 필연성이 있다는 것.

정교한 퍼즐 조각을 맞추는 과정처럼
물리의 개념이 서로를 향해 연결될 때
마침내 사물의 움직임이 선명한 구조를 드러낸다.
가속도는 숫자가 아닌 감각의 방식이 되며
만유인력은 우리가 서 있는 장소에 대한 설명을 넘어
‘왜 이 힘이 다른 모든 힘을 누르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중심축이 된다.
수심이 깊어질수록 짓누르는 물의 힘이 달라지는 이유
전자가 공기 속에서 멈추는 이유
빛이 되돌아가지 않고 직진하려 하는 이유
이런 질문들은 어느새 일상의 주변부가 아니라
세계를 읽는 새로운 시점이 된다.

이해한다는 행위가 지닌 힘은 늘 한 방향으로 모인다.
세계가 조금 더 선명해지고 그 선명함이 다시 일상을 비춘다.
당연하다고 여긴 규칙들이 사실은 정교하게 조정되며
살아 움직이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 그 순간
익숙한 풍경들은 다시 해석을 요구한다.
그 변화가 번지는 동안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도 조금씩 바뀌어 간다.
한 걸음만 더 들어가면 보이지 않던 질서가 드러나고
한 번만 더 고개를 기울이면
세계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은 거대한 장면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그 장면은 말한다.
우리가 몰랐던 것이 너무 많았다고.
그러나 바로 그 미지의 여백 덕분에
세계는 다시 배워볼 가치가 있는 풍경으로 남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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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텃밭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캐시 슬랙 지음, 박민정 옮김 / 로즈윙클프레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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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텃밭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무너진 마음을 끌고 겨우 흙 위에 서던 어느 날
작디작은 씨앗 하나가 삶의 방향을 다르게 틀었다.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을 것 같던 밭이
어느 순간 잿빛 하루들을 천천히 밀어내기 시작했다.

절망을 끌어안은 손끝에서 새싹이 오르고
다시 살아야겠다는 감각이 깨어났다.
눈에 보이지 않던 희망이
흙속에서 올라오는 걸 지켜보며
인간은 얼마나 작은 것으로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하는 책.


📖 책을 읽고 나서

삶이 한순간에 기울 때가 있다.
지나던 길의 모서리처럼 별 의미 없어 보이던 자리에서
갑자기 균열이 일어나는 순간.
이 책에서 만난 여성은 바로 그 지점에 서 있었다.
일의 속도가 사람의 속도를 삼켜버리던 시절
몸과 마음이 차례로 내려앉고
세상 전체가 비틀린 각도로 굴러가기 시작하던
그 흐름 한가운데.
이름 붙이기도 어려운 공포가
잔잔하게 퍼져 하루를 잠식하고
새벽이 오는 것이 두려움의 또 다른 얼굴로 다가오던
시간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무너짐 속에서 그녀가 붙잡은 것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작은 밭
흙 한 겹 아래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생명이었다.
모양도 없고 특징도 없는 씨앗들이
땅속에서 틈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하고
초여름의 빛을 따라 서로 밀고 자리를 넓히며
식물의 형체를 갖추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세상이 완전히 무너졌다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자연은 전혀 다른 시간의 길을 열어 보이는 듯했다.

그녀가 밭으로 걸어가는 장면들에는
어떤 완고한 힘이 있었다.
처방처럼 반복되는 몸의 움직임
파고, 심고, 덮고, 물을 건네는 리듬에
마음이 천천히 끌려 들어가는 이미지가 겹겹이 쌓였다.
복잡하게 얽히던 불안이 이 흙의 세계에서는
제 방향을 잃어버리고
식물들이 스스로의 방식으로 자리를 잡아 가는 동안
그녀의 마음도 조금씩
다른 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흐름이 있었다.

밭에서의 계절들은
각기 다른 얼굴을 가진 장면으로 그려진다.
초여름의 초록은 종종 넘치도록 번져서
밭 전체를 밀어내고
서로의 줄기와 잎이 얽혀 있는 그 혼란 속에서도
삶이 성장하려는 힘만은 또렷하게 드러났다.
열매의 무게에 줄기가 휘어지기도 하고
빛을 향해 방향을 바꾸기도 하며
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꽃이 터지며 색을 더했다.
그 광경 자체가 이 책에서 가장 강렬한 언어였다.

우울이라는 거대한 덩어리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람을 짓누르곤 한다.
책 속의 그녀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밭일을 하는 동안에는 그 무게가 잠시 다른 곳에 머물렀다.
흙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식물을 따라 자라는 듯한 움직임이 생겼고
자연이 보여주는 질서는 삶이 얼마든지
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단서를 건네듯 다가왔다.

이 이야기는 ‘치유’라는 단어를 굳이 꺼낼 필요가 없다.
대신 흙이 만들어 놓은 이 세계의 장면들
뒤틀린 일상, 흙을 파는 몸짓, 씨앗의 성장
초록의 확장, 두려움 속에서 다시 만들어지는 하루
이 모든 것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하나의 서사처럼 다가온다.
그 안에는 의지나 결심보다
더 오랫동안 남는 종류의 힘이 있고
그 힘이 한 사람의 삶을
다시 움직이게 했다는 사실만이 남는다.


어둠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상처가 치유된 것도 아니었지
흙이 조금씩 밀어 올린 생의 힘이
마음 어딘가를 천천히 바꿔놓고 있다는
증거 하나만 또렷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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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대의 소년
카를 올스베르크 지음, 장혜경 옮김 / 모스그린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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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생각의집을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무한대의 소년>


빛과 회로, 기억과 살의 경계가 무너지는 지점에서
한 소년이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 질문이 인간과 기계를 가르는
마지막 선을 집어삼킨다.
숨을 삼키게 하는 추적
존재를 뒤흔드는 선택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깨어나는 정체성의 이야기.


📖 책을 읽고 나서

거의 끝까지 몰려온 세계의 숨죽임 속에서
한 존재가 스스로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선택을 거듭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생의 시간이 짧다는 사실을 일찍 알아버린 아이는
미래라는 말이 주는 부드러운 환상을
애초에 손에 쥐어보지도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그 결핍이 오히려 명료함을 부른다.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그 두 문장이 서로를 맞부딪치며 빛을 만든다.

그 지점에서 다른 장면이 스친다.
생각이 너무 빨라 종종 주변의 속도를 앞질러 버리는 친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말
모든 문장은 이미 펼쳐져 있으며
우리는 그 문장들을 읽어내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말.
그 가파른 사유는 삶을 향한 질문을 새로 고쳐 쓴다.
현재라는 틀을 붙잡지 못하는 인간은
선택의 연속 위에 자신을 세울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한다.

기계를 향한 탐구가 시작되면서 경계는 느슨해진다.
기억과 목표, 불안과 바람, 사랑과 근심
이 모든 것이 몸이라는 하드웨어에
깃들어 돌아가는 소프트웨어라면
인간이란 무엇으로 정의될 수 있을까.
인간을 옮기듯 옮겨지는 의식이
하나의 가능성이 되는 순간
존재의 정체는 물리적 몸을 벗고 확장된다.
이 세계가 요구하는 질문 역시 달라진다.
“너는 무엇이냐”가 아니라
“너는 어떤 선택을 하려 하느냐”로.

납치와 실종,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순간들 속에서
하나의 존재가 지워질 가능성이 점점 짙어지지만
그 공백은 더 많은 가능성을 품는다.
잔혹한 희망이 되살아났다 꺼졌다 반복되는 동안
인간이든 기계든 결국 ‘알 수 없음’ 속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세우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스며든다.
가장 잔인한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인지 아닌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숨을 이어가는 마음의 무게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질문이 던져진다.
“넌 인간이니?”
그 질문은 존재의 근원을 가르는 칼날 같은 구분이다.
한 존재는 자신이 무엇으로 불리는지보다
어떤 삶을 선택하는지가
자신을 규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선택이 쌓여 하나의 인간을 만든다는 결론은
그가 몸을 새로 얻었든 잃었든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대답한다.
단순한 선언 이상의 의미로 자신을 지켜낸 이의 목소리로.

“나는 인간이에요.”

그 결론은 자신을 다시 세상에 기입하는 행위에 가깝다.
세계가 어떤 모습을 띠고 있든
존재는 선택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증명하는 장면.
그렇게 이야기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문을 연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다움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그 질문은 다시 읽는 이의 앞에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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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있는 집의 질문들 - 돈 걱정, 사교육 고민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부너미 지음 / 어떤책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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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있는 집의 질문들>


아이와 함께 사는 일상은 조용히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서 어른의 마음은 끊임없이 방향을 바꾸고
형태를 다시 잡는다.
저자는 그 흔들림을 숨기지 않고 펼쳐 놓으며
익숙한 규칙에 길들여진 삶을 다시 묻는다.
아이에게 가르치는 모든 순간이
사실은 어른이 자기 삶을 새로 고치는 시간임을
그래서 한 집의 변화가
한 사람의 변화로 번져 간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 책을 읽고 나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하루는 언제나
단순한 육아의 목록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멈춰 서는 순간마다 보이지 않던 질문들이 기척을 드러내고
그 질문들은 한 번 들리기 시작하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 질문들 뒤에 숨어 있는 무게를
모른 척하며 지나가는 일이 아니라
그 무게를 굳이 말로 정리하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조금씩 헤아려 가는 과정일지 모른다.

어떤 날은 아이의 웃음이 방 안을 한순간에 밝히고
어떤 날은 작은 떼쓰기가 폭풍처럼 들이닥치며
내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를 시험한다.
그런데 마음이 가장 흔들리는 건
거센 순간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장면들이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던 페이지들
그러면서도 나를 좁혀가며 버티던 선택들
그 작은 일화들이 나도 모르게 마음에 층층이 쌓여
아이와 나 사이의 공기를 바꿔 놓을 때가 있다.

아이를 품고 사는 집에서는
사람의 생각이 종종 방향을 잃고 길게 이어졌다가
어느 순간 날카롭게 꺾인다.
어른은 아이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아이는 어른의 기색을 살피며 자신의 감정을 배운다.
그 사이에서 드러나는 건
우리가 서로의 삶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믿어도
여전히 닿지 않는 영역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 닿지 않는 곳에서 질문이 생기고
그 질문이 어른을 다시 배우게 한다.

때로는 ‘좋은 부모’의 얼굴로 버티는 대신
상황에 따라 흔들려도 괜찮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가
아이에게 더 넓은 세계를 보여준다.
어른이 약해지는 순간이 아이에겐 불안이 아니라
자기 삶을 스스로 꾸리는 연습이 되기도 한다.
가까운 존재라고 해서
언제나 붙어 있어야 하는 건 아닌 것처럼
떨어져 있는 시간이 서로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각자 다시 설 수 있는 바닥을 마련해 주기도 한다.

관계의 어려움은 집 밖 사건보다
집 안의 침묵에서 더 자주 시작된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쌓인 기대들
당연히 감당해야 한다고 여겨진 역할들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되지만 실은 설명되지 못한 감정들.
이 구조가 무기력과 분노와 서운함을 번갈아 낳는다는 걸
우린 알고 있으면서도 익숙하다는 이유로 외면해 왔다.
하지만 아이가 질문을 던지고
어른이 그 질문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장면이 반복될수록
그 구조는 조금씩 흔들리고
숨겨졌던 문제는 더 이상 ‘집 안 이야기’로 묻히지 않는다.

이렇듯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어른이 예상하지 않은 방향으로 세계를 비튼다.
어른이 자기 삶의 한계를 조용히 인정하는 순간
아이도 타인의 영역을 존중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익히고
어른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날에는
아이 역시 자신이 버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가족은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써 내려가는 서사라는 것을
이 집에서의 하루하루가 말없이 증명한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아이를 가르치는 일만이 아니라
나라는 인간을 다시 고쳐 쓰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과정은 언제나 조용하지만은 않고
때로는 낯설고, 때로는 불편하고
그러나 반드시 한 걸음 더 깊은 방향으로 이끈다.

아이의 질문이 어른의 감춰 둔 생각을 끄집어내고
어른의 선택이 아이의 세계를 넓힌다는 이 반복 속에서
가정이라는 공간은
매일 새롭게 재구성되는 작은 우주처럼 움직인다.
그 우주는 어른이 완벽해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마음과 미숙한 선택들이
서로에게 충돌하면서 만들어 낸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그 모든 과정을 지나며
아이와 어른은 각자 다른 속도로 성장하고
그 성장은 서로의 삶에 깊이 스며든다.
이 집에서의 시간은
누가 더 옳고 누가 더 성숙했는가를 따지는 여정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이다.

어른이 하루를 버티며 찾은 작은 지혜는
아이의 미래를 위한 단단한 발판이 되고
아이의 질문은 어른의 새로운 삶을 여는 문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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