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켜낸다는 것 - 칭화대 10년 연속 최고의 명강, 수신의 길
팡차오후이 지음, 박찬철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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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에 따르면 심장동맥질환 사망률이 최근 10년간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돌연사를 야기하는 질병이 노년층의 전매특허였지만, 지금은 청년층에까지 만연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청장년층을 대상으로 대사 증후군이 유행하고 있다고들 합니다. 야근이 잦은 회사원, 휴식할 시간이 없고 불규칙한 식사에 길들여진 미디어 종사자, 오랜 시간 운전하느라 비만에 노출된 운전기사 등 이 분야의 종사자들이 누적된 피로, 충동적인 감정, 전해질 교란, 과도한 긴장 등으로 고혈압, 고지혈증 등 대사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현재 적지 않은 청장년층이 장기간에 걸친 불규칙한 생활과 커다란 심리적 스트레스, 심장, 간, 신장 등 인체 주요기관의 지속적인 기능 장애로 죽음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이처럼 커다란 심리적 스트레스를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외부환경, 특히 사회적 풍조뿐만 아니라 심리 소양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몸만 피로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피로는 훨씬 심각합니다.

 

과로로 인해 돌연사하는 현상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오늘날 유행하는 ‘슈퍼맨 증후군’입니다. 슈퍼맨 증후군은 각 업종에서 특출한 성취를 이룬 엘리트들이 정신적으로 심각한 괴로움을 겪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엘리트 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증후군은 아마도 두 단어로 개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피곤한 마음’이 그것입니다. 엘리트는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영역에서 잘 나가는 사람으로 뭇 사람들의 선망과 추종을 받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실제 그들의 정신 상태를 살펴보면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든 거대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심리적으로는 장기간 아건강 상태(亞健康狀態 :증상은 분명히 있으나 의학적인 진단이 나오지 않는 상태)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심리가 마치 전갈처럼 매 순간 엘리트들의 정신을 물어뜯고 그들의 심신을 고달프게 하는 것입니다. 엘리트들은 통상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고 진지하고 성실하게 일을 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과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통 주목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엘리트들이 내세우는 책임감이란 항상 남보다 앞서려고 하는 마음과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대중적 이미지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아래의 몇 구절은 신문보도에서 발췌한 내용으로, 엘리트들의 심리를 잘 묘사하는 글입니다.

 

“언제나 훌륭하게, 최상의 태도를 유지하라. 이것이 엘리트가 취해야 할 자세이다. 커다란 사회적 관심도는 일종의 추동력이면서도 압력이다. 많은 엘리트들의 특수한 사명은 항상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병이 날 수 있어도 엘리트는 병이 나서는 안 된다. 이렇게 버티다 결국에는 끊어지고 만다. 많은 엘리트들이 보기에 사회에는 무형의 손과 보이지 않는 잣대가 있어 그들을 채찍질하며 평가한다. 놓으려 하지도 않고 기준을 낮추려고도 하지 않는다. 결국 마지막으로 자신을 고통 속으로 이끈다. 이는 엘리트의 고통이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어떤 사람은 고통 속에서 무감각해지고, 어떤 사람은 고통 속에서 미쳐 버린다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삶의 조건은 갈수록 나아지고 있고 하는 일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어떤 것에 의해 주재되는지를 잠시라도 살펴보게 되면 왜 우리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렇게 많은 문제를 갖게 되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 할 때입니다!

 

능히 부귀를 가벼이 여기어도

부귀를 가벼이 여기는 그 마음까지 가벼이 여기진 못하고,

명예와 의로움을 중히 여겨도

또한 명예와 의로움을 중히 여기는 그 마음까지 중히 여기진 못한다.

 

能輕富貴, 不能輕一輕富貴之心.

能重名義, 又復重一重名義之念.

 

<채근담>의 이 구절은 사람의 승부욕을 분석한 말입니다. 사람은 얼핏 돈과 지위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고 의기와 명예를 중시하는 듯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저에 숨은 욕망까지 완벽하게 조절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에서 가장 미묘하고 복잡한 것이고 또 스스로 자각하고 없애기가 쉽지 않은 심리입니다. <명심보감>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마음이 편안하면 누추한 집도 평온하고

정서가 안정되면 나물국도 향기롭다.

세상의 일이란 고요한 가운데 바야흐로 드러나고

사람의 정이란 담백한 가운데 비로소 자라난다.

 

心安茅屋穩, 性定菜羹香. 世事靜方見, 人情淡始長.

 

마음이 불안하면 ‘평온한(穩)’ 감각이 있을 리 없습니다. 욕망이 너무 크면 옛 선비들처럼 안빈낙도하며 나물의 뿌리를 씹으면서도 감칠맛을 느끼는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성정채갱향(性定菜羹香)’, 즉 정서가 불안정하면 당연히 나물국의 향기를 맡을 수 없습니다. ‘세사정방견(世事靜方見)’, ‘인정담시장(人情淡始長)‘ 이는 진정으로 안정된 마음으로 살펴야 인생살이의 오묘함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계의 부품처럼 시대의 수레바퀴에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이유로 멍한 상태에서 일생을 보내는 것이 과연 바른 삶인가? 또 마음의 평정도 없이 자아를 상실한 삶을, 현대화가 우리들에게 가져다 준 위대한 성과라고 할 수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오직 금전적 이익만을 생각하고 안빈낙도는 생각하지 못하며, 오직 업적을 남겨 이름을 날리는 것만 생각하고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으면서도 묵묵히 살아가는 삶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돈과 명예가 없다고 해서 잘살지 못하는 것은 아닌데도, 돈과 명예가 없으면 잘못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범한 자연의 뜻을 오랫동안 음미하고 소박하며 조용하게 체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몸을 너무 바쁘게 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한가로울 때 바쁜 일이 생기면

또한 게으름이 생기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지만

가다듬은 후 놓으면

또한 순수한 본성을 격발할 수 있다.

 

身不宜忙, 而忙於閑暇之時, 亦可儆惕惰氣.

心不可放, 而放於收攝之後, 亦可鼓惕天機.

 

이 구절도 <채근담>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는 몸의 바쁨과 한가함, 마음에 품는 것과 놓는 것의 관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명리를 위해 몸을 희생하고 정신을 소모하느니 마음을 고요히 하고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낫고,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이미지와 지위를 위해 온갖 정력을 쏟아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치는 것보다는 몸 이외의 것은 버리고 안빈낙도하고 물아일체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을 찾고자 한다면 마음의 여유와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p.136~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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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침 一針 - 달아난 마음을 되돌리는 고전의 바늘 끝
정민 지음 / 김영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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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훈(白光勳. 1537~1582)은 아내와 자식들을 고향에 두고 서울에서 혼자 자취 생활을 했다. 그가 자식에게 보낸 편지 24통이 문집에 실려 있다. 편지 중에 특별히 내 눈길을 끈 것은 형남(亨南)과 진남(振南) 두 아들에게 막내 흥남(興南)이의 교육을 당부한 대목이다.

 

45세 때인 1581년에 쓴 편지에서는 “흥남이도 공부를 권유하되 마구 힐책하지는 마라. 향학의 마음이 절로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고 했고, 다른 편지에서도 “흥남이는 늘 잘 보살피고 북돋워 일깨워서 저절로 배움을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절대로 나무라거나 책망해서 분발함이 없게 해서는 안 된다.”고 적었다. 또 “흥남이의 글 중에 간간이 기특한 말이 있더구나. 이 아이가 능히 배운다면 내가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느냐. 기뻐 뛰며 좋아할게다. 너희는 곁을 떠나지 말고 권면하고 가르쳐서 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하도록 하여 마침내 성취가 있게 한다면 다행이겠다.”고 적었다.

 

서울에서 머무느라 어린 막내에게 사랑과 훈도를 베풀 수 없었던 아버지는 이처럼 형들에게 계속 편지를 썼다. 칭찬을 통해 향학열을 분발시켜야지, 야단과 책망으로 의욕을 꺾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일관된 당부였다. 퇴계 선생의 <훈몽(訓蒙)>시에 이런 것이 있다.

 

많은 가르침은 싹을 뽑아 북돋움과 한가지니

큰 칭찬이 회초리보다 훨씬 낫다네.

내 자식 어리석다 말하지 말라.

좋은 낯빛 짓는 것만 같지 못하리.

 

어떤 이가 자기 밭에 심은 곡식이 싹이 잘 안 자라자 싹을 강제로 뽑아 올라오게 했다. 그리고는 자라는 것을 도와주었다고(助長) 자랑했다. 다음 날 보니 싹은 다 말라 죽어 있었다.

<맹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덮어 놓고 많이 가르치고, 이것저것 배우게 하는 것은, 욕심 때문에 멀쩡한 싹을 뽑아 올려 싹을 죽이고 마는 어리석은 농부의 행동과 같다. 정색을 한 매질보다는 칭찬이, 어리석다는 야단보다는 신뢰를 담은 기쁜 낯빛을 짓는 것이 자식의 바른 성장에 훨씬 낫다는 말씀이다.

 

아이가 불쑥 영어 한두 마디 한다고 무슨 천재라도 난 줄 알고 영재교육이다 뭐다 해서 호들갑 떨 일이 아니다.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부모의 칭찬과 든든한 신뢰, 그리고 환한 낯빛이다. p.107~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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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오십 남달리 살피고 사랑하라 - 윤재근의 삶이 깊어지는 고전 산책
윤재근 지음 / 산천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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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는 어떤 지식을 전달하려는 것보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이나 사람이 되는 법을 주로 말씀해놓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되는 법이나 사람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란 무엇인가요. 이것을 공자는 인의(仁義)의 길이라고 밝혀두고 있습니다.

 

인(仁)은 남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고 의(義)는 인(仁)을 실천하지 못하면 부끄러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논어>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길을 밝혀놓은 책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논어>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낚시질은 하지만 투망질은 하지 않는다.” 욕심을 너무 지나치게 부리지 말라 함입니다. 노력한 만큼 획득하는 것으로 만족하라 함입니다. 턱없이 남보다 많이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거나 탐을 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낚시질은 물린 고기만 낚습니다. 이것은 욕심을 절제하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투망질은 물속에서 노니는 고기를 통째로 끌어올립니다. 이것은 사납게 탐욕을 부리는 것을 비유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일한 만큼 얻는 것은 욕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탐욕은 일은 조금만 하고 얻어내기를 엄청나게 탐합니다. 이른바 한탕주의란 투망질과 같습니다. 투망질을 하면 수많은 고기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습니다. 망에는 큰 고기도 있고 아주 어린 새기도 걸려들게 됩니다. 요즘의 속된 말로 한다면 싹쓸이를 하자는 짓입니다.

 

현대인은 탐욕을 주저치 못하여 여러 가지 뒤탈을 불러옵니다. 맹자는 물질을 사용하는 데 예(禮)로써 하라고 했습니다. 맹자의 당부도 역시 투망질을 하지 말라 함입니다. 내가 투망질을 하면 남도 투망질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강의 고기는 씨가 마르고 투망질만 일삼는 어부는 고기가 없는 강을 떠나야 합니다. 이처럼 탐욕을 멈추지 않으면 살 곳이 없습니다.

 

물질의 풍요를 누리려는 탐욕 탓으로 물이 썩어가고 흙이 썩어가고 바람이 썩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루를 잘 먹기 위하여 내일 먹을 양식마저 다 먹어버리는 꼴이 공해(公害)라는 문제의 등장입니다.

 

살아가는 데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런 질서를 자연법칙이라고 합니다. 그 법칙을 어기면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낚시질을 하되 투망질은 않는다고 밝힌 공자의 말씀은 우리를 반성하게 합니다.

 

강태공은 낚시꾼의 대명사. 그는 욕심이 없는 자를 상징합니다. 강물에 낚싯대만 드리우고 낚싯줄에는 낚시를 매달지 않았던 강태공. 그의 낚싯대는 무욕(無慾)의 상징입니다. 무욕은 너무나 어려운 경지입니다. 그러나 욕심을 알맞게 지닌다는 마음이 있다면 욕심이란 것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러한 능력을 극대화하라. 이렇게 <논어>의 말씀이 외치고 있는 셈입니다. p.168~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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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근담 (하) - 세상을 읽는 천 년의 기록
홍응명 지음, 양성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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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봄날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호탕하게 해주지만, 흰 구름과 맑은 바람, 꽃다운 난초와 향기로운 계수나무, 물과 하늘이 한 빛으로 천지가 맑고 밝아 사람의 몸과 마음을 함께 맑게 해주는 가을만 하겠는가.

 

春日氣象繁華(춘일기상번화) 令人心神駘蕩(영인심신태탕) 不若秋日雲白風淸(불약추일운백풍청) 蘭芳桂馥(난방계복) 水天一色(수천일색) 上下空明(상하공명) 使人神骨俱淸也(사인신골구청야)

 

 

높은 곳에 올라 가을날의 맑은 바람과 눈부신 햇살에 온 세상이 황금빛으로 변해 가는 것을 바라보노라면 마음이 탁 트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저 멀리 빼곡히 둘러싸인 산봉우리에 구름바다가 출렁거리고, 드넓은 바다의 물빛과 하늘의 푸른빛이 하나로 이어져 있고, 저녁노을 사이로 줄지어 날아가는 천둥오리를 보면 어찌 상쾌하고 유쾌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심신이 맑아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음력 9월 9일은 중국의 전통 명절인 중양절(重陽節)이다. 이 날이 되면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올라 가을 경치를 만끽하고 술을 마시며 국화를 감상한다. 중국인들의 전통사상 속에 9라는 숫자는 가장 큰 양수(陽數)이다.

 

그러므로 9월 9일은 가장 큰 양수가 두 번 중복되기 때문에 중양절이라 칭했다. 숫자 9(九)는 구(久, 오래다)자와 동음이다. 그래서 중양절은 오랠 '구'자의 의미를 차용하여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의미로 풀이되기 때문에 중국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날이다.

 

중양절에 높은 곳에 오른다는 것은 여유롭고 한가롭게 즐거움을 누리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다. 중양절은 하늘이 높고 공기가 상쾌한 가을 절기에 해당하므로 높은 곳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면 다양한 가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것은 옛 사람들에게 가장 큰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자고로 문인들은 산정상에 올라 새로운 풍경을 접하면 마음이 설레고 감정이 북받쳐 올라 시상을 떠올리곤 했다. 특히 가을날의 풍경은 더욱 신선해 이 계절을 노래한 수많은 명시가 탄생했다.

 

그 예로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가 지은 <9월 9일 억산동형제(九月九日憶山東兄弟)>라는 시가 있다.

 

“홀로 타향 땅에서 나그네 되어, 명절이 될 때마다 가족 생각이 배가 되네. 먼 곳의 형제들은 높은 곳에 올라, 두루 수유를 꽂으며 한 사람이 없는 것을 알겠구나.”

 

이 시에는 중양절을 맞아 높은 곳에 올라 가을 풍경을 바라보면서 가족과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고(糕)‘와 ’고(高)’는 동음이다. 옛날에 높은 곳에 올라갈 수는 없지만 중양절의 액을 막으려는 사람들은 떡을 먹으며 한스러움을 달랬다. 중양절에 떡을 먹는 풍습은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발전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중양절에 높은 곳에 올라 높은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가 아득히 멀어지는 가운데 해와 달의 정기를 가슴에 끌어안을 수 있으니, 자연스럽게 호방한 기백으로 그득하다. 인생의 참된 즐거움은 높은 곳에 올라야 알 수 있다.. p.20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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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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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자왈 부여귀 시인지소욕야  불이기도득지 불처야)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빈여천 시인지소오야 불이기도득지 불거야)

<논어 이인(里仁)>

 

이 구절을 함께 읽자고 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부귀와 빈천의 가치중립성에 대한 환상을 지적하자는 것이지요. 이 구절의 해석에는 다소의 이견이 있습니다. 가장 널리 통용되는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그것을 누리지 않으며, 빈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이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해석상의 이견이 있는 부분은 불이기도득지(不以其道得之)’입니다. “그 도로써 얻지 않은 것이란 뜻입니다.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는 쉽게 이해가 가지만 빈천의 경우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닌 빈천이 과연 어떤 것인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지요. 특히 도로써 얻은 빈천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욱 막연합니다. 그래서 다산(茶山)은 이 경우의 득()을 탈피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벗어날 수 없는 한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대부분의 해석이 이를 따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도로써 얻은 빈천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꼭 빈천은 아니라 하더라도 처음부터 부귀와 상관없는 삶을 선택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경우는 그 도로써 얻은 빈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부귀를 얻기 위해 부정한 방법에 의존했다가 빈천하게 되는 경우가 이를테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어느 경우든 우리가 이 글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부귀와 빈천에 대한 반성입니다. 부의 형성과정이 정당한 것인가, 그 사람의 출세가 그 능력에 따른 정직한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물음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보편적인 시각은 오로지 그 결과만을 두고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빈천의 경우도 그것을 당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세태입니다. 게으르거나 낭비적이라거나 하는 시각이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귀와 빈천의 역사를 주목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간과하지 않는 일입니다. 몇몇 드러난 사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그가 누리고 있는 부귀의 형성과정에 대해 전혀 무지합니다. 특히 서울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내려가면 그곳에서는 그 역사 선명하게 보입니다. 조선조 말에서부터 일제강점기, 해방 후, 자유당, 공화당, 신한국당 집권 시기를 거치면서 그와 그의 가계(家系)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역사가 줄줄이 구전(口傳)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부귀와 빈천이 있기까지의 전 과정이 소상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줄곧 고향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면 주로 나누는 대화가 그런 것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과 역사가 드러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청산은커녕 과거가 은폐되고 있는 역사를 우리가 살고 있기도 하지요. 그 과정과 역사는 완벽하게 망각되고 오로지 그 결과만을 바라보게 하는 사회를 살고 있지요.

  

개인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국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이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근대 사회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한마디로 침략과 수탈의 역사입니다. 엄청난 집단적 학살로 점철된 20세기를 청산하고 평화의 세기를 갈망하는 우리들의 소망이 21세기 벽두부터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의 부귀에 대하여 그 과정과 그 도()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나 무지합니다. 우리가 선진 자본주의를 국가적 목표로 하여 매진하고 있는 한 자본주의의 그 어두운 역사는 드러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모든 침략과 수탈까지도 합리화되고 미화되고 선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역사의식과 이러한 사회의식이 청산되지 않는 한 개인의 부귀와 빈천의 온당한 의미를 읽어내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보학(譜學)이라는 문화 전통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래야 자손을 위해서라도 부정한 방법으로 부귀를 도모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보학으로 될 일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사회의 관계망과 역사의 관계망, 즉 시공(時空)을 관통하는 관계망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구조를 만들어내고 그러한 망()을 뜨개질하는 것이 근본적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들은 우리들의 천민 의식(賤民意識)에 대한 반성이 선행되지 않는 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p.175~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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