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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6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신라 제27대 선덕왕 즉위 5년인 정관 10년 병신년(636년)에 자장법사가 서쪽(중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바로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에게 감화되어 불법을 전수받았다.
문수보살은 자장법사에게 말했다.
“너희 나라 왕은 천축 찰리종(刹利種)의 왕으로 이미 불기(佛記)를 받았기 때문에 특별한 인연이 있어 동이(東夷) 공공(共工 : 요순시대 흉포하기로 이름난 종족)의 종족과는 다르다. 산천이 험준한 탓에 사람의 성품이 거칠고 사나워 사교(邪敎)를 믿어 때때로 천신이 재앙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법문(法文)을 많이 들어 알고 있는 승려들이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이 편안하고 모든 백성이 평화롭다.”
말을 마치자 문수보살은 이내 보이지 않았다. 자장법사는 이것이 보살의 변화임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다. 그가 중국 태화지(太和池) 둑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신령한 사람이 나타나 물었다.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는가?”
자장법사가 대답했다.
“보리(菩提)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신령한 사람이 그에게 절하고서 다시 물었다.
“너희 나라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
자장법사가 대답했다.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말갈과 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왜와 이어져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가며 국경을 침범하여 이웃의 침범이 잦으니, 이것이 백성의 고통입니다.”
신령한 사람이 말했다.
“지금 너희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 나라가 침략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거라.”
자장법사가 물었다.
“고국으로 돌아가 무슨 일을 해야 이롭겠습니까?”
신령한 사람이 말했다.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 : 불교나 불법을 보호하는 용)은 바로 내 큰아들인데, 범왕(梵王 : 인도 바라문교의 최고 신)의 명령을 받고 가서 절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본국으로 돌아가서 절 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하고 동방의 아홉 나라(九韓)가 와서 조공을 바치며 왕 없이도 영원히 편안할 것이다. 그리고 탑을 세운 후에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죄인을 풀어 주면 밖의 적이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나를 위해 서울 남쪽 언덕에 정사를 하나 짓고 함께 나의 복을 빌어 주면 나 역시 덕을 갚을 것이다.“ 말을 마치자마자 신령한 사람은 자장법사에게 옥(玉)을 바치고는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정관17년 계묘년(643년)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내려 준 불경, 불상, 가사, 폐백을 갖고 본국으로 돌아와 왕에게 탑을 세울 것을 권했다.
선덕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자 신하들이 말했다.
“백제에 부탁해 공장(工匠)을 데려와야 가능합니다.”
선덕왕은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로 가서 공장을 청하게 했다. 아비지(阿非知)라는 공장이 명을 받고 와서 재목과 돌을 다듬고, 이간(伊干) 용춘(龍春)이 수하 공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다.
처음 이 탑의 기둥을 세우던 날 아비지는 백제가 망하는 형상을 꿈꾸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의심이 되어 손을 떼려 했다. 그러자 갑자기 대지가 진동하고 사방이 캄캄해지더니 한 노승과 장사가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공장은 뉘우치고 탑을 완성했다. <찰주기(刹柱記)>에 이렇게 말했다.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는 42자, 그 이하는 183자다.”
자장법사는 오대산에서 받은 사리 백 개를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戒壇 : 승려가 계를 받는 제단) 및 대화사(大和寺) 탑에 나누어 모셔, 못에 있는 용의 청원을 들어 주었다.
탑을 세운 이후에 천지가 태평하고 삼한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그 뒤 고구려왕이 장차 신라를 정벌하고자 계책을 세우고 이렇게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무엇을 말하는가?”
“황룡사의 장륙존상과 9층탑, 그리고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고구려왕은 신라를 치려는 계획을 그만 두었다. 주(周)나라에 구정(九鼎 : 중국 하나라 우 임금 때 전국의 쇠를 모아 아홉 주(州)를 상징하는 솥을 만들었다.)이 있어서 초(楚)나라 사람들이 감히 북쪽(周)을 엿보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귀신이 받치는 힘으로 수도 장안을 누르니,
휘황찬란한 금벽색이 기왓장을 움직이네.
올라가 굽어보니 어찌 구한(九韓)만 복종하랴.
천하가 특히 태평함을 비로소 깨달았네.
또 해동(海東) 명현(名賢) 안홍(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 제27대에는 여자가 임금이 되니 비록 도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이 침략했다. 대궐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운다면 이웃 나라의 침략을 억누를 수 있을 것이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거란(丹國), 8층은 여적(女賊), 9층은 예맥(穢貊)을 억누른다.”
또 <국사>와 <사중고기(寺中古記)>를 살펴보면, 진흥왕 14년 계유년(553년)에 절을 세운 뒤 선덕왕 때인 정관 19년 을사년(645년)에 탑을 세웠다. 제32대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한 (698년)부터 고려 숙종(肅宗) 병자년(1096년)까지 여섯 번째로 다시 지었지만, 고종16년 무술년(1238년) 겨울에 몽골이 침입하여 탑과 절, 장륙존상과 전각이 모두 불에 타 버렸다.
p.306~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