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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 - 절망의 한복판에서 부르는 차동엽 신부의 생의 찬가
차동엽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미국의 한 병원에서의 일입니다. 어느 환자가 수술을 받았는데 회복되기는커녕 증세가 자꾸만 악화되어갔습니다. 주치의를 비롯한 의료진이 연일 모여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고 분석해보았지만 그 이유를 도통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의학적인 시술도 완벽했고 병 역시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환자는 소생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들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도 의료진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한 의사가 조용히 일어나 자리를 뜨더니 환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런 다음 환자에게 정중히 사과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수술 준비를 도왔던 의사입니다. 그러나 마취 상태에 있던 선생님께 제가 그만 심한 농담을 했습니다. 그게 자꾸만 마음에 걸려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기회를 못 얻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환자의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이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나도 모르는 일을 어떻게 용서하나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진실한 의사를 만났다는 것이 제게 행복입니다.” 놀랍게도 그날부터 환자의 병세는 눈에 띄게 호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굳이 귀담아 듣지 않아도 우리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말들이 어떻게 우리 내면에 상처로 남게 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용서’라는 절차를 통하여 소멸되지 않으면 얼마나 우리 자신에게 해악이 되는 지를 드러내주는 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일생의 숙제로 안고 살고 있음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죽어도 그를(또는 그녀를) 용서할 수 없다.”고 이를 박박 갑니다. 어떤 사람은 “용서를 하고는 싶은데 잘 안 된다.”고 하소연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미 용서했는데, 갑자기 미움이 되살아났다.”며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어떤 때는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가 더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이런 내용의 대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는 온 인류를 사랑할 수 있다. 그들 모두를 나는 사랑한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사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그가 나에게 한 잘못은 내가 아무리 용서하려해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어려운 일이다.” 자신과 크게 상관이 없는 일에 대해서는 용서하기가 어렵지 않지만, 자신과 관계된 일에서는 하찮은 것도 용서되지 않는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나치 치하에서 호된 학정을 겪은 독일인 헬무트 틸리케는 나치 정권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용서라는 일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좋아, 상대가 잘못을 알고 용서를 빌기만 한다면 다 용서하고 싸움을 끝내지.’ 우리는 용서를 상호 교환하는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곧 양쪽 모두 ‘저쪽에서 먼저 시작해야 돼’하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상대방이 눈짓으로 무슨 신호라도 보내지 않는지 혹은 상대의 편지에 미안함을 표하는 작은 표시라도 없는지 매처럼 잔뜩 눈만 굴린다. 나는 언제나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옳은 것이다.”
헬무트 틸리케만이 아닙니다. 우리도 “상대방이 공식적으로 사과하기 전에는 절대!”라며 용서의 문을 걸어 잠근 채 보복의 가슴앓이로 뒷걸음질 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당한 건 난데 왜 내가 먼저 용서해야 해?” 그렇게 버티며 꿈쩍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저 사람은 이번 일을 통해 무언가 깨달아야 해. 한동안 속을 끓이게 내버려둬야지. 본인한테도 그게 이로울 거야.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걸 배워야만 해. 내가 먼저 손을 내미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나도 이런 항변을 수없이 들어 왔습니다. “나는 절대로 그놈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내가 당한 상처를 생각하면 용서하려고 해도 안돼요.” 이렇게 용서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두 가지를 지적합니다. 우선, 산수를 못하니까 용서를 못하는 것이라고.
“한번 계산해보세요. 만약 미움이 내 맘속에 있어 계속 품고 살면 누가 잠을 못잡니까? 내가 잠을 못 잡니다. 그러면 누가 병에 걸립니까? 바로 납니다. 내가 병에 걸리면 누가 일찍 죽습니까? 이것 역시 납니다. 내가 이렇게 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내가 미워했던 그놈이 좋아합니다. 딱 계산이 나오잖아요. 그러니 용서를 안 하면 나만 손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못 하는 것은 이기적이지 못해서 못하는 것이라고.
“결국 용서는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그놈에겐 아무 득도 되지 않으니 아까워하지 마세요.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평화롭기 위해서 용서하는 것입니다. 한번 눈 딱 감고 해 보세요. 그러면 기쁨이 와요! 행복이 솟아요!”
‘용서’라는 말뜻이 재미있습니다. 한자로 ‘容恕’는 받아들이고 소화하고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容’과 헤아려서 이해하는 것,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如心)을 의미하는 ‘恕’가 더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양적인 의미에서는 용서는 소화하고, 헤아려주고, 마침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로 용서는 ‘forgive'입니다. ’위한다.‘는 ’for'와 ‘주다’라는 뜻의 ‘give'의 합성어입니다. 또 ’pardon'이라는 단어도 있는데 ‘donum', 즉 선물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거저 베푸는 것이 용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동양적 사고방식과 서양적 사고방식의 차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보다 근원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화하고, 헤아려주고,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주면 사실 모든 것이 끝납니다. 다 청산됩니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실용적인 방법을 제시합니다. 소화하고 헤아리다가 오히려 미움의 수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용서치 못할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하자, 좋다, 옳다, 인정한다. 그러나, 그래도, 선물처럼 거저 베풀어라 이겁니다. “그까짓 거 그냥 줘버려!”라는 식입니다. 내 생각에 여기에는 아무래도 그리스도교의 복음사상이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용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결단입니다.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용서할 줄 압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분노와 마음이 독이 되어 본인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용서의 길을 몰라서 화병이 들어 죽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독한 미움이 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답니다. 미움의 독을 풀어내는 길이 바로 용서입니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가득 차면 우리 몸이 견디지 못합니다. 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해지고, 심장이 아프고, 소화가 안 되고, 잠을 이룰 수 없고, 안절부절 못하고,,,,, 가슴에 가득 차 있는 적개심, 분노, 화는 우리의 몸과 영혼을 죽이는 독소들입니다.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울화병은 화날 일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가슴에 화가 부글부글 끓고 신체에 이상이 생기는 병을 일컫습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스스로 ‘과거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것은 용서를 할 수 있는 ‘통제권’을 타인, 즉 원수에게 내어주고서 자기 자신은 상대방의 잘못으로 입은 상처에다 미움의 속박까지 당하는 운명을 자초할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서 ‘치유’받는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사람은 바로 ‘용서하는 자’입니다. 진실한 용서는 포로에게 자유를 줍니다. 용서를 하고 나면 자기가 풀어준 ‘포로’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시인이자 구도자인 칼릴 지브란은 용서라는 문제를 가장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아예 단죄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섣부른 판단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이렇게 경고합니다.
"그대들은 누구에겐가 잘못을 저지른다.
또한 그대 자신에게도.
의로운 자가 사악한 자의 행위 앞에서
전혀 결백할 수 없으며
정직한 자가 그릇된 자의 행위 앞에서 완전히 결백할 수 없는 것.
그대들은 결코 부정한 자와 정의로운 자를
사악한 자와 선한 자를 가를 수 없다.
이들은 다 태양의 얼굴 앞에 함께 서 있기 때문이다.
(.......)
정의란, 그대들이 기꺼이 따라가려는
법의 정의란 무엇인가?
바로 뉘우침이 아니겠는가?
죄인의 가슴에서 뉘우침을 빼앗지 마라.
뉘우침이란 청하지 않아도
한밤중에 찾아와
사람들을 깨우며 스스로를 응시하도록
만들고 있으니."
그렇습니다. 용서하는 것 이전에 판단하지 않는 것, 단죄하지 않는 것이 더 지혜로운 길입니다. 그럴 때 상대에게 뉘우침의 기회가 생깁니다. p.282~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