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우리말 백과사전
이재운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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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궁금해하던 모호한 단어들의 의미를 명쾌하게 정리했다. 어원 공부와 어휘의 적확한 활용에도 도움이 되겠다. 한번쯤 의문을 가졌던 우리말의 쓰임에 관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비교를 통해 일목요연하게 일별해서, 긴가민가하는 우리말의 여러 의문점들이 책을 읽고 난 후 많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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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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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읽었는데, 내용이 파격적이다. 간혹 육식을 싫어하는 채식주의자가 있긴 하지만, 주인공 영혜는 꿈을 꾸고나서 거식증 환자처럼 육식을 거부한다. 그로 인한 남편과 가족과의 불화, 예술을 가장한 불륜 등이 전개되는데 주제가 난해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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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부자 - 살아있는 조선의 상도를 만난다, 개정판 조선을 움직인 위대한 인물들 3
이준구.강호성 엮음 / 스타북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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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부자에 나오는 11명의 부자들 중 남성도 있고, 여성도 있지만 대부분 조선시대인만큼   남자들이 대부분이다. 여성들의 활동이 제약이 많았고, 그들의 사회적 활동이 제약이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당연한 이야기다. 저자가 의도적으로 부자들 중에서 선행을 베푸는 사람들만 골라서 선정을 한 지는 모르겠지만 십중팔구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격언처럼 초년에 아주 힘들게 산전수전을 다 겪고 자수성가하여 노년에는 학교를 세우는데, 혹은 독립자금을 대는데, 가난을 구제하는데 거금을 쾌척했다.

 

누구나 온갖 고난을 당하며 번 돈은 쉽게 내놓기가 망설여지고, 악착같이 돈을 더 벌 궁리를 하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부의 배포에 맞게 의로운 일에 조금도 망설임 없이 거금을 내놓았다.

 

주로 18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살았던 인물들인데, 완전한 자본주의 체제가 형성되지는 않아도 초기 상업주의 형태가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에 그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 지 몸소 체험하며 그 방법을 체득했다.

 

지금으로 보면 돈이 될 물건을 매점매석하여 이윤을 많이 남기는 좋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많이 벌었지만, 작금의 현실도 재벌들의 돈벌이를 보면 독점에 의한 이윤추구가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가  잘 아는 거상으로 18세기 '임상옥'을 들 수 있는데, 그의 이야기는 수십 년 전 TV에서도 방영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조선후기 인삼은 특히 중국 상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매년 가격이 오르다 보니 상인들이 단합하여 인삼불매운동을 펼쳤다.

 

보통 수천리를 운반해 가서 중국 현지에서 사지 않으면 싸게라도 파는 게 상인의 심리인데, 역시 배포가 큰 임상옥이는 중국 상인들의 불매동맹을 눈치채고 가져간 인삼을 한 곳에 모아놓고 불을 질러 버렸다. 사색이 된 중국상인이 달려와 제지하며 몇 배의 가격을 더 줄테니 팔라고 간청하는 바람에 불을 끄고 평소보다 훨씬 비싸게 팔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일설에서는 그게 인삼이 아니라 도라지라는 말도 있지만, 상대의 허를 찌르는 교묘한 방법을 행동으로 옮긴 임상옥의 배포는 알아줄 만하다.

 

그러나 그는 노년에 두 형제가 자기보다 일찍 죽고 자식도 일찍 죽는 바람에 쓸쓸한 노년을 보냈고 누가 재산을 물려받았는지 모르는 채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가고 있다.

 

거상들의 돈을 버는 방법에는 매점매석이 태반이었지만, 혹 어떤 이는 구한말 왕실과 인맥과 친분을 통하여 중국교역권을 따내 엄청난 이윤을 남기기도 하고, 일부 거부들은 한일합방 후 일본의 비호아래 독점사업권을 따내 거부가 된 이도 있다. 사람이 사는 형태는 천차만별이고 정의의 관점에서 보면 친일을 해서 억만장자가 된 이도 있지만 조선의 부자를 소개하는 주제에 맞게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거부들을 소개한다.

 

또한 젊은 청상과부로 일찍 남편을 잃고 삯바느질, 남의 허드렛일 등 온갖 궂은 일을 해서 돈을 모아 종잣돈을 만들고 그것을 불려 사업에 투자하여 큰 돈을 번이도 있었는데, 자신이 못배운 게 한이 되어 교육사업에 거금을 쾌척했다. 더 원대한 목적으로 일제 강점기 국권회복을 위해 교육에 아낌없이 돈을 내놓았다. 국민이 몽매한 의식에서 깨어나고, 일제치하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교육에 달렸다는 일념으로 학교를 세우는데 평생 번 돈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이런 훌륭한 선각자가 있었기에 암흑기를 이겨내고 독립을 챙취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일부는 일제의 혜택으로 돈을 번 만큼 태평양전쟁이 벌어진 시기에 거금을 내어 일본의 비위를 맞추고 자신의 사업기반을 더욱 탄탄히 하려는 친일파도 있었다. 금광개발이 한창이던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엄청난 금맥을 발견하여 일거에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된 '최창학'은 독립자금을 내놓으라는 독립투사의 청을 거절했다가 목숨을 잃을 뻔도 했다. 20세기 초반 세계 최고급차 한 대가 천오백원 정도하던 시기에 하루 2천원의 거금을 벌어들인 최창학은 많은 사람들의 표적이 되었다.

 

옛말에 '가난하면 시장통에 살아도 찾아오는 이가 없고, 부자는 산속에 살아도 찾는 이가 넘쳐난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사는 세상 인정(人情)의 부침(浮沈)이 야단스럽다. 전국의 부자로 명성이 나면 '수십 억의 로또 당첨자'들 처럼 온갖 개인이나 단체에서 기부하라고 전화가 오고 애걸복걸을 한다고 하는데, 예전의 거부들 또한 그랬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그들의 목숨은 항상 위태로웠다. 인덕을 베푼 자는 사방에 소문이 나서 죽어서도 명예로운 이름을 남기기도 했지만,  때로는 귀찮은 모기떼처럼 나날이 찾아드는 빈객(貧客)들을 맞이하느라 골치께나 아프기도 했다. 장사밑천을 좀 대달라고, 노름판에서 전 재산을 날렸다거나 관청에서 돈을 횡령하고 들켜 죽음에 직면했다고,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오는 이들을 맞을 때 냉정하게 거절하면 자신의 목숨조차 위태로울 것 같아 거금을 내어 주거나, 돈을 벌만한 배포나 자질을 한 눈에 알아보고 미련없이 자금을 대주어 원금에 이자까지 넉넉히 받았다는 미담도 수없이 소개된다.

 

거상(巨商)은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보통사람들과는 뭐가 달라도 다른 점이 있다. 모험을 하지 않으면 그저 평범하게 살게된다. 또한 큰 부자는 하늘이 내고, 작은 부자는 부지런함에 달렸다는 옛말도 있지만 거상들은 대개 배포가 크고 모험심이 강했다. 그리고 성공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강해 모진 고난을 거뜬히 견뎌냈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요즘 세상도 당시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조선시대만큼 서민이 일확천금을 모을 확률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돈이 될만한 사업은 대기업들이 장악해서 돈을 끌어모으다시피 하고 있으니 자본금이 없는 일개 서민이 어찌 그런 꿈을 꿀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미지의 분야에 뛰어드는 용기와 배포와 세상의 흐름을 꿰뚫는 안목, 근검절약 정신 등 조선의 거부들에게서 배울점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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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과 체찰 - 조선의 지성 퇴계 이황의 마음공부법
신창호 지음 / 미다스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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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선생의 면모를 잘 살펴볼 수 있는 글이다. 주로 편지글 형태가 많이 실렸는데, 성리학에 관한 서로의 의견을 주고 받는 내용이다. 자신의 안부와 함께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가 곡진하고 친절하다.

 

거목 퇴계가 왜 이토록 유명하게 되었고, 그의 학문이 동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는지 그가 쓴 글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회적 명망이나 지위로 봤을 때  보통의 유명인사라면 큰소리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려 할텐데, 퇴계의 글에서는 전혀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다. 나이 차이가 아무리 많이 나도 같은 학문의 길을 걷는 동반자로서 깍듯한 예우와 함께 상대방을 배려하는 여유가 묻어난다. 

 

당대의 학자 기대승과 나눈 '사단칠정론' 논쟁만 보아도 그렇다. 서른 살이나 아래인 젊은 학자 기대승의 지적을 받고 흔쾌히 잘못되었다고 인정할 것은 인정했고,  동등한 학자의 지위로 상대를 높여 주면서 조목조목 따질 것을 따졌다. 노학자의 고매한 인품이 문장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

 

퇴계는 가정환경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진사출신인 아버지를 생후 7개월에 여의고 3세에 양자로 백부의 집에 기탁하면서 고난이 시작된다. 온갖 고난을 전전하면서도 배움에 있어서 게을리하는 법이 없었다. 청운의 꿈을 품고 학문에 너무 매진하다가 일찍 병을 얻어 평생 질병의 고통에서 괴로움을 당하는데, 그도 글에서 밝혔듯이, 단기간에 무엇을 이루겠다고 공부에 너무 욕심내는 것을 경계했다.

 

인생이 몇십 년이 되는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자신은 단번에 많은 것을 이루려고 너무 몸을 혹사한 나머지 병을 얻은 것을 크게 후회하면서 후학들에게 큰 학문을 성취하려면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공부할 것을 권했다. 공부에 왕도가 없듯이 하루아침에 학문을 완성하는 것도 어리석은 생각이고, 성실하게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어느 때에 크게 이룰 것이라고 했다.

 

몸이 노쇠해지고 눈이 침침해지면서 학문적 물음에 일일이 답변을 못해주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장면에서 문득 비애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상대방은 양해를 구하는 퇴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아픈 와중에도 배움을 향한 학구열은 여전히 불타고 있음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데, 배우고는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슬프다는 퇴계의 탄식이 들리는 듯하다.

 

조선사에 있어 퇴계만큼 공직의 부름을 많이 받은 학자도 드물 것이다. 퇴계의 공직생활은 주로 중종이나 명종조에 있었지만 어느 왕이 집권하든 퇴계는 항상 공직 임명 1순위였다. 우아한 인품과 적이 없을 정도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에 왕조차 그의 인품과  학식을 흠모하여 곁에 두기를 간절히 원했다.

 

퇴계는 노년이 될수록 악화되는 건강과 후학양성이라는 자신의 포부를 실천하기 위해 안동으로 내려가 칩거한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학문을 병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걸 몸소 체험한 퇴계는 하는 일 없이 녹봉만 축낸다는 미안함에 매번 공직에서 물러났다 다시 부름을 받고 공직생활을 하는 반복의 연속이었다.

 

16세기 중후반이 되면서 붕당이 생기고 당파세력들이 서로를 헐뜯고 싸울 때 그것을 조정해 줄 명망있는 대신이 왕은 필요했을 것이다. 국운이 기울고 탐관오리들이 설쳐되는 조선 중기의 정세는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그나마 이런 상황을 지탱해 줄 버팀목으로 퇴계가 적격이었을 것이다. 수대에 걸쳐 공직생활을 하면서 왕은 퇴계만큼 미더운 신하가 없었다. 퇴계는 병마를 핑계로 낙향을 간청하고 왕은 마지못해 허락하는 것이 수차례 반복되면서 왕의 요청을 거부하는 거만함이 극치에 이르렀다는 모함과 세상의 비난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퇴계는 백척간두의 위기에 놓인 조선 중기를 율곡과 더불어 슬기롭게 이끌고 간 현신임에 틀림없다. 사심없이 청렴하게 살았고, 왕에게 간언을 아끼지 않았다. 성학십도를 지어 현명한 왕이 나아갈 길을 밝혔고, 동아시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퇴계학파를 형성하기도 했다. 비록 유교의 폐단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조선의 성리학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그의 공로도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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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향기 2016-10-03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명 조식과 관련해 유명한 일화는 `을묘사직소`인데 명종이 단성현감에 남명 조식을 제수하나, 남명 조식은 관직을 받을 수 없음을 상소로 고한 것이다. 유독 이 상소가 유명한 것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쓰러져가는 고목에 비유했음은 물론이고 명종을 선왕의 단지 어린 고아로, 문정왕후를 구중궁궐 내의 과부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화를 입었을 뻔 하였으나 당시가 선비들의 기강이 흐트러졌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는 선비가 바로 서 있음을 나타낸다고 하여 많은 선비들과 학자들이 남명을 두둔했다. 이에 명종은 이 일은 불문에 처한다고 사건을 마무리한다.(이황과 조식 선생을 제가 혼동해서 처음에 잘못 올렸습니다.)
 
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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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과 그의 수제자 황상의 평생 변함없는 사제의 정을 기록한 책이 정민 교수님이 쓴 '삶을 바꾼 만남'이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은 없다. 바위도 세월이 지나면 풍화되어 자갈이 되고, 더 오랜 시간이 흐르면 모래가 되듯이, 이 우주에 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다산의 삶을 보면 변화무쌍한 세상의 이치가 그대로 증명되는 듯하다. 스물여덟의 나이로 정조의 총애를 받아 정계에 입문하면서 승승장구하던 그가, 보호막이 돼 주던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자 하루아침에 날개잃은 새처럼 끝없이 추락한다. 벽파(공서파)의 집권으로 시파의 탄압이 시작되고 특히 다산은 본보기가 되어 신유박해(1801)때 천주교 신봉의 죄를 물어 유배의 길에 오른다. 한때 벽파의 시기로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였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목숨만은 부지한다.

강진으로 유배가서도 중죄인이 되어 주민들이 그를 만나기를 꺼려하고 피하기만 하였다. 본래 죄인이 마을에 오면 그 마을에서 숙식을 제공하고 부양을 해야 하는데, 다산은 처음엔 강진의 주민들에게도 환대받지 못했다. 기거할 집을 구하지 못해 주막에다 거쳐를 마련하고 잠시 머문다는 것이 1년 넘게 기숙하게되는데, 강진(전라도)에서 그 정도로 다산을 꺼려하고 아무도 자기 집으로 들이려 하지 않았다.

다행히 다산은 중앙에서 요직을 맡았고 글을 읽은 선비라 마을의 학동들을 가르치는 일을 맡았다. 아무 일도 없이 무료한 나날을 보낸다는 것이 다산에게도 참 괴로웠을 것이다. 그때 만난 학동이 15살 더벅머리 아이 '황상'이었다. 다산은 당시 41살이었다. 1802년경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면서 배타적이던 마을의 민심도 다산을 좀 이해하는 듯했다. 대개 그렇듯이 자식을 가르치는 선생에게 부모된 도리로 고마움과 함께 미운 감정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다산의 제자들은 벽촌의 구석에서 글과는 담을 싼 무지렁이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선생이 똑똑하면 그 제자도 닮아가듯이 다산의 매서운 학구열에 제자들도 서서히 몽매에서 벗어나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한 학구열이 대부분 과거시험을 위한 과정으로 전도되면서 많은 제자들이 과거시험에 목을 매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다산이 10여년간 중앙에 머물렀던 연줄을 매개로 시험청탁이나 관직청탁을 하는 편지가 다산에게 자주 오게 되는데, 다산의 성품이 청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청렴하고 강직한 탓에 모든 청탁을 거절하게 된다. 이를 섭섭하게 여긴 제자들은 다산을 음해하고 사제의 연을 끊으면서까지 노골적으로 다산을 괴롭혔다.

오직 황상만은 과거의 뜻을 접고 산촌 벽지로 들어가 논밭을 일구며 다산의 유지를 받들어 농부로 살아간다. 다산이 강진에서 풀려난 후 서울로 상경하면서 황상과 헤어지게 되는데 이후 둘의 만남은 오랫동안 없었다. 다산이 몸이 안좋으니 꼭 한번 보고 싶다는 편지를 몇번 보내고 한참 지난 1836년 황상은 다산이 사는 경기도 광주를 찾게되는데, 당시에 다산은 몸이 극도로 좋지않은 상태였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다산과 황상, 스승과 제자의 만남은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서글퍼기도 했다. 오랜만에 만난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생과사의 문턱에서 희미해져가는 스승을 보는 것 또한 큰 슬픔이었다.

다산은 사흘 머문뒤에 떠나는 제자에게 붓과 벼루 등의 선물과 노자까지 챙겨준다. 그러나 떠난지 얼마되지 않아 다산의 부고를 들은 황상은 다시 울며불며 스승의 집을 찾아 장례를 치른다. 다산의 두 아들 학연과 학유도 황상과 연배가 비슷해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아버지 밑에서 글을 배우며 황상과도 글을 주고 받기도 하고 시문을 돌려가며 잘잘못을 짚어주기도 했다. 잘했을 때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미흡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하여 보충토록 했다. 아버지의 제자인 동시에 막역한 지우이기도 했으니, 다산이 돌아가고도 황상과는 각별한 사이를 유지했다. 대대로 두 집안이 변치말고 잘 지내자며 계를 조직하기도 했으니 대단한 인연이 아니겠는가!

다산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황상만큼 다산의 사랑을 많이 받은 이는 없었고, 또 황상만큼 다산을 변함없이 스승으로 받들고 끝까지 사제의 정을 지킨 이도 없었다. 요즘같이 참된 스승도, 참된 제자도 없는 불행한 시대에 다산과 황상의 만남은 오래도록 우리에게 훌륭한 귀감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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