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언의 탄생 - 명언으로 읽는 100명의 인생철학
김옥림 지음 / 팬덤북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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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진 백사 이항복은 어린 시절부터 영민했을 뿐만 아니라 장난기가 넘쳤는데 그의 장난에는 해학이 넘쳤고, 지혜가 번뜩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도승지로서 선조를 의주까지 호위했으며, 전란 중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후 이조판서에 올랐다가 정유재란이 일어나 병조판서를 맡았고 공을 인정받아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며 오성군에 봉해졌다.

 

“스승의 말은 곧 스승이다. 반드시 스승의 말은 따라야 한다.”

이항복의 스승이 남긴 말인데, 이항복은 이 말을 항상 가슴에 새겨 두고 떠올렸다. 이 말에 얽힌 일화이다. 어느 날 이항복이 집에서 쉬고 있는데 하인이 소리치며 말했다.

“대감마님, 스승님께서 오셨습니다!”

“뭐라, 스승님께서 오셨다고?”

이항복은 자리에서 일어나 버선발로 뛰어나가 스승을 맞았다.

“스승님, 어서 오십시오.”

그의 스승은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항복은 허리를 굽히며 정중하게 스승을 방으로 모셨다.

 

“스승님,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나는 잘 지내고 있소.”

“스승님, 말씀을 놓으십시오.”

이항복은 존대하는 스승 앞에서 몸 둘 바를 몰랐다.

“영의정인 정승에게 내 어찌 말을 놓겠소.”

그의 스승은 이렇게 말하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니옵니다. 스승님. 스승님께서는 어린 시절 저의 무지를 깨우쳐 주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어찌 제게 존대를 하시는지요?” 이항복은 이렇게 말하며 더욱 자세를 낮추었다.

“그때는 어린 개구쟁이였고, 지금은 정승이 아니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스승님의 제자일 뿐입니다.”

이항복은 이렇게 말하며 스승을 극진히 모셨다.

 

다음날 스승이 갈 차비를 하자 그는 면포 십여 단과 쌀 두 섬을 노자로 드렸다.

스승은 너무 많다며 받기를 주저하였다.

“스승님, 그냥 받아 주십시오.”

“아닐세. 이것은 내가 받기에 너무 많네. 이것도 다 나라의 재산이 아닌가.”

“아닙니다. 이것은 나라의 재산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러신가? 그래도 나는 쌀만 가지고 가겠네.”

“스승님. 그냥 받아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부끄럽습니다.”

“말로는 스승이라고 하면서 어찌 나의 뜻을 거역하려고 하시는가. 제자라면 내 말대로 하시게.”

이항복은 스승의 말에 더 이상 권할 수가 없었다.

청렴한 스승을 두었기에 이항복 또한 검소하게 생활하여 청백리로 존경을 받았다. 스승의 위엄이 땅에 떨어진 지금, 우리는 이항복을 통해 스승을 향한 공경의 태도를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p.270~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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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첫 만남과 같다면 - 중국 고전 시와 사의 아름다움과 애수
안이루 지음, 심규호 옮김 / 에버리치홀딩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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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행(怨歌行)

반첩여(班婕妤:첩여는 비빈의 품계칭호)를 이야기할라치면 <원가행(怨歌行)>부터 시작하고, 양귀비(楊貴妃)를 언급할라치면 <장한가(長恨歌)>를 꺼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겠지요. 청나라 초기 사(詞)로 이름을 날린 납란성덕(納蘭性德 : 1655~1685)의 시 한 구절 “인생이 첫 만남과 같다면”이 있고부터 모든 것에는 존재의 이유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깊은 밤 잠 못 이루며 <음수사(飮水詞)> 전편을 읽고 난 후 역시 이 구절만큼 빼어난 시구는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기실 이 시집은 평범하고 담담하지만 “인생이 첫 만남과 같다면” 이 한마디는 사람을 절로 아연케 만듭니다. 이는 마치 장승요가 용을 그릴 때의 ‘화룡점정’ 같은 점이고, 고룡의 <육소봉전기(陸小鳳傳記)>에 나오는 서문취설(西門吹雪)의 검이 정확하고 우아하게 소리 없이 당신의 목을 겨누는 것에 견줄만 합니다. 그 섬뜩한 검기를 느꼈을 즈음 이미 당신은 저 세상 사람이 되었겠지만 말입니다.

 

“어찌 가을바람은 화선을 슬프게 하는가(何事西風悲畵扇)?” 이는 한나라 성제(成帝.BC 52~BC 7) 의 비인 반첩여(BC 48~BC 2) 를 두고 이른 시구입니다. 역사서에 전하는 그 명문가 출신의 고결하고도 현덕한 여인 말입니다. 그녀는 성제 초년에 입궁하여 뛰어난 미모와 현명함으로 남다른 총애를 받았다고 합니다. 한번은 성제가 그녀를 불러 함께 수레에 올라 바깥나들이를 가자 했다지요. 이에 그녀는 “예부터 모든 성군은 훌륭한 신하를 곁에 두었으나, 하․상․주 삼대의 마지막 군주만이 폐녀(총애하는 여자)를 곁에 두었답니다.” 하고 말하며 감히 황제의 명을 받들지 않았답니다.

 

당시는 성제의 사랑이 무르익던 시절, 반첩여의 이러한 언행은 현명하다고 칭송 받았고, 후궁들 또한 그녀에게 아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일은 하나의 미담이 되어 그녀가 마치 초 장왕의 번희나 이세민의 장손현후인 것같이 여겨졌습니다. 그녀 역시 이에 큰 자부심을 가졌고, 황은을 깊이 받았다고 여겼으며, 또한 다함없는 가훈으로 삼아 서로 돋보이게 되었습니다. 허 황후는 우둔한 사람이었고, 반첩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총애가 육궁 가운데 으뜸이었으니, ‘장신(長信)‘이란 궁궐의 이름처럼 이런 좋은 나날이 영원히 계속되길 바랐겠지요. 그러나 어느 날 그녀가 왔습니다. 그녀뿐 아니라 그녀의 동생 합덕(合德)도 함께 입궁한 것입니다.

 

조비연(趙飛燕. BC 45~BC 1)이 궁궐에 들어오는 날로 반첩여의 외로움은 시작되었습니다. 예측불허, 모든 것은 말 그대로 의외였습니다. 그 깊은 사랑과 총애도 제비처럼 가볍게 춤을 추는 그녀가 궁에 들어오면서 깨끗이 사그라지고 말았습니다. 사랑의 맹세는 변함이 없건만 애정은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세상사라는 것은 맑은 하늘에 느닷없이 몰려드는 비구름처럼 변덕스럽기 마련입니다. 이는 마치 능가산인이 “매정한 임 까닭 없이 마음 바꾸며, 사랑은 원래 쉽게 변하는 것이라 말하네.(等閑變卻故人心, 卻道故人心易變)”라고 한 것이나 유우석(劉禹錫)이 <죽지사(竹枝詞)> 11수 중 제6수에서 “한스럽네! 사람의 마음은 강물만 못해 까닭 없이 평지에서도 파란을 일으키네.(長恨人心不如水, 等閑平地起波瀾)”라고 노래한 것과 같습니다. 그녀는 <원가행>, 일명<단선가(團扇歌)>를 지어 자신을 둥근 부채에 빗대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새로 자른 제나라 흰 비단, 서리나 눈처럼 선명하고 깨끗하여

재단하여 합환선을 만드니, 둥근 것이 보름달 같구나.

임의 소매 드나들며 흔들어 미풍을 일으켰지만

항시 두려운 것은 가을이 되어 차가운 바람이 더위를 앗아가면

대나무 상자 안에 버려져 임금의 사랑도 중도에 끊기게 됨이라.

 

新裂齊紈素(신열제환소), 皎潔如霜雪(교결여상설).

裁爲合歡扇(재위합환선), 團圓似明月(단원사명월).

出入君懷袖(출입군회수), 動搖微風發(동요미풍발).

常恐秋節至(상공추절지), 凉飇奪炎熱(양표탈염열).

棄捐篋笥中(기연협사중), 恩情中道絶(은정중도절).

 

이는 한낱 아녀자의 입장이기보다 지식인다운 그녀만의 마음 달래기였습니다. 그녀는 허 황후와는 달랐습니다. 비연이 한창 총애 받던 시절. 허 황후는 자신의 자리에서 결코 물러나지 않으려다가 끝내 버림을 받았습니다. 반첩여는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태후 모시는 일을 자청하거나, 성제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성제의 능묘를 지키다가 외롭게 늙어 죽지는 않았을테지요.

 

그녀는 다만 예상치 못했을 뿐입니다. 맑고 고고하며 속세에 물들지 않은 자신이 훗날 궁원(宮怨, 궁궐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과 원망에 관한 이야기)의 대변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왕창령(王昌齡. 698~756)이라는 인물은 마치 <단선가>에 담긴 그녀의 아픔을 엿보기라도 한 듯, <장신추사(長信秋詞)> 5수를 지어 그녀의 삶을 애석해했습니다.

 

우물가 오동나무 가을 잎 누렇게 바래고,

걷지 않은 주렴에 밤새 서리 내렸네.

향로와 옥 베개는 빛을 잃었고,

자리에 누운 채 남궁의 긴 물시계 소리 듣고만 있네.

 

높은 궁전의 가을 다듬이 소리 한밤에 울려 퍼지고,

서리 짙어지니 어의 차가워질까 걱정되네.

푸른빛 자물쇠 잠긴 궁 등잔 아래에서 바느질 멈춤은

여전히 황금빛 성안의 영명하신 주상 보려 해서네.

 

이른 아침 빗자루로 청소하고 궁전 문 열어놓고,

이어서 단선 흔들며 잠시 이리저리 서성이네.

옥처럼 아름다운 얼굴 갈까마귀 빛깔만도 못함은,

소양전(성제가 머무르는 곳)이 해 그림자 여전히 가져와서 일세.

 

진정 박복한가 한참이나 생각하여,

꿈속에 군왕을 뵈었으나 깨고 나니 헛것이었네.

불빛 환한 서궁에선 연회가 한창인 듯

은총 받들던 시절 아직도 분명한데.

 

중추절 장신궁의 달은 밝기만 하고

소양전 아래 다듬이질 소리.

이슬 내린 집 안에 애기 풀 흔적 남아

붉은 비단 휘장 안에서 정을 이기지 못하네.

 

추측건대, 그녀는 결코 이렇게 외로운 신세가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알았더라면 비록 등불만 비추는 장신궁의 냉랭한 방 안의 고독일망정 견뎌냈을 것이며, 고운 이를 악물어가며 <원가행>을 지어 사람들의 웃음거리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우인불숙(遇人不淑. <시경> 왕풍(王風)에 나오는 ‘중곡유퇴(中谷有蓷)’에 나오는 말로 여자가 남자를 잘못 만남을 가리킴)이란 말이 딱 어울립니다. 그녀는 이를 데 없이 현숙한 여인이었으나 그녀의 부군은 ‘말 한마디로 천하를 떨게 할’ 패기가 없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녀는 옛날 ‘번희’에 비길만하지만 그녀의 부군은 ‘초 장왕’ 에 비길 수 없었겠지요. 사실 그녀는 연약하지 않았고 미모와 재기를 두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예법에 얽매이고 엄격할 정도로 규정에 따르고자 한 것이 패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황실 주렴 사이를 에돌며 춤추는 조비연의 나긋나긋함이 없었고, 합덕처럼 함께 목욕을 하며 애교를 부리지도 못했습니다.

 

그녀는 지나치게 엄숙했고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예교를 따르려 했지만, 정작 자신은 첩여에 불과할 뿐 황후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비의 자리에 올랐다 해도 영원히 첩에 불과했을 터. 천하의 여인이란 황궁에 있건 아니건 결국 똑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황제가 원하기만 하면 그녀들은 기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첩여와 무희는 본질적으로 같은 수준, 단지 명칭이 다를 뿐이었으니 무슨 의미가 더 있겠습니까? 황궁은 그저 금빛 찬란한 기루에 불과하며, 황제는 천하제일을 난봉꾼이었던 것입니다.

 

주성치가 주연한 <녹정기>를 혹 기억하실는지요. 위소보가 처음 천지회(天地會)에 가입했을 떼 진근남은 짐짓 정색을 하며 그를 밀실로 데려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외치는 것은 사실 돈과 여자를 빼앗기 위함이다.” 위소보가 그렇다면 왜 얼토당토않는 반청복명 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묻자 진근남이 대답합니다. “똑똑한 사람은 오직 똑똑한 사람한테만 진실을 말하는 법, 저 밖에 있는 멍청한 무리들은 그저 헛된 이상 하나만 갖고도 요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에 큰 깨달음을 얻은 위소보는 진근남과 의기투합합니다. 밀실에서 나온 두 사람은 정색을 하고 밖에 있는 조무래기들을 향해 분기 어린 어조로 일장연설을 늘어놓습니다. 연설은 제대로 먹혔습니다.

 

나중에 누군가로부터 무엇을 타도하고 무엇을 되살려야 한다는 따위의 말을 듣게 되면, 바로 이 장면이 떠올라 씁쓸한 웃음을 물게 됩니다. 역시 영화 <녹정기>를 감독한 왕정의 단순명쾌함과 주성치의 예리함은 마음에 듭니다. 남자는 남자가 봐야 그 악독함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할까요? 사실 남자들이란, 황제든 누구든 결국 오입쟁이끼리의 투쟁을 치를 뿐입니다.

 

비연과 합덕, 이 두 자매는 경국지색이었고, 남자를 꾀는 데 타고난 재주가 있었습니다. 성제는 합덕의 온유향(溫柔鄕. 미인의 품 안)에서 늙어 죽고 싶다고 말했는데, 이 한마디가 그의 예언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반첩여가 사랑한 남자가 마침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것도 다른 여자 합덕의 품에 안겨서 말이지요.

 

화려하고 아름다운 시절이 다하여 천자 또한 범인들과 마찬가지로 차가운 무덤에 눕게 되었을 때, 황제에게 버림받았던 여인, 냉대 속에서 버려졌던 반첩여는 아이러니하게도 평생토록 황제의 능원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반첩여 역시 눈을 감아야 했을 때, 혹시 처음 입궁하던 시절을 떠 올리진 않았을까요? 그 옛날 황제가 높은 황금수레에 앉아 미소 띤 얼굴로 손을 내밀 때, 차마 그 손을 잡을 수 없어 함께 수레에 오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을까요? 궁금증은 거기에 미칩니다. 두 사람이 서로 다정히 기대고 있던 그 시절, 어쩌면 그때가 그들의 유일하고 또 가장 친밀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 너무 짧기만 한 시절. 인생이 첫 만남과 같다면...  p.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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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강해질 필요가 있다 - 마음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멘탈의 힘
김병준 지음 / 예문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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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있듯이, 인생을 사는데도 `멘탈`의 중요성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외부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강력한 멘탈을 유지하는 노하우를 배워 무한경쟁의 시대를 슬기롭게 헤쳐나가고 싶다.강한 멘탈을 가진 사람은 이미 반은 성공한 거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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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인물 사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박시백 지음, 휴머니스트 편집부 엮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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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조선개국 이전부터 조선멸망까지 조선왕조와 운명을 같이 한 700여명의 인물을 망라한 인물백과사전이다. 요즘 스마트폰에서도 쉽게 인물검색은 가능하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아, 기억에 오래 남지 않는다. 이 책은 각 인물마다 얼굴의 특징을 만화로 그려 초상화를 보는 듯 오래  기억되고, 인물의 일생사에 핵심만을 간추려 간결하게 정리했다. 시사 및  역사상식을 기르는데에도 도움이 되겠고, 노소 구분없이 누가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실록하면 어렵게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박시백 화백의 조선왕조 인물사전은 누구나 쉽게 읽고 우리 선조들을 생애를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게 재미있게 구성된 책이다.

 

책 제목이 그렇듯이 조선왕실록의 편제에 따라 왕이 등장하고 ,다음 그 왕의 재위기간에 활동했던 인물들이

열거되는 식이다. 수많은 인물들을 통해 조선왕조의 흐름을  개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더불어 역사지식도 함양할 수 있어 중,고등학교 역사 보습교재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 역사공부를 하다보면 밤하늘의 뭇별처럼 수없이 등장하는 인물에 지레 겁먹고 흥미를 잃는 경우도 많은데, 이 책 한 권이면 조선왕조의 인물에 대해서는 그런 염려를 놓아도 되겠다.  역사가 이루어지려면 시공간과 더불어 그 시대를 살다간 인물이 어우러져야 하기에, 인물을 떠나 역사를 논할 수는 없다. 인물이 사건을 만들고 그 사건이 바로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물을 자세히 연구하는 것은 곧 역사를 낱낱이 해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 권쯤 책상에 비치해 두고 역사공부에 활용하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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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6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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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7대 선덕왕 즉위 5년인 정관 10년 병신년(636년)에 자장법사가 서쪽(중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바로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에게 감화되어 불법을 전수받았다.

문수보살은 자장법사에게 말했다.

 

“너희 나라 왕은 천축 찰리종(刹利種)의 왕으로 이미 불기(佛記)를 받았기 때문에 특별한 인연이 있어 동이(東夷) 공공(共工 : 요순시대 흉포하기로 이름난 종족)의 종족과는 다르다. 산천이 험준한 탓에 사람의 성품이 거칠고 사나워 사교(邪敎)를 믿어 때때로 천신이 재앙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법문(法文)을 많이 들어 알고 있는 승려들이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이 편안하고 모든 백성이 평화롭다.”

 

말을 마치자 문수보살은 이내 보이지 않았다. 자장법사는 이것이 보살의 변화임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다. 그가 중국 태화지(太和池) 둑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신령한 사람이 나타나 물었다.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는가?”

자장법사가 대답했다.

“보리(菩提)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신령한 사람이 그에게 절하고서 다시 물었다.

“너희 나라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

자장법사가 대답했다.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말갈과 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왜와 이어져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가며 국경을 침범하여 이웃의 침범이 잦으니, 이것이 백성의 고통입니다.”

 

신령한 사람이 말했다.

“지금 너희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 나라가 침략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거라.”

자장법사가 물었다.

“고국으로 돌아가 무슨 일을 해야 이롭겠습니까?”

신령한 사람이 말했다.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 : 불교나 불법을 보호하는 용)은 바로 내 큰아들인데, 범왕(梵王 : 인도 바라문교의 최고 신)의 명령을 받고 가서 절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본국으로 돌아가서 절 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하고 동방의 아홉 나라(九韓)가 와서 조공을 바치며 왕 없이도 영원히 편안할 것이다. 그리고 탑을 세운 후에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죄인을 풀어 주면 밖의 적이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나를 위해 서울 남쪽 언덕에 정사를 하나 짓고 함께 나의 복을 빌어 주면 나 역시 덕을 갚을 것이다.“ 말을 마치자마자 신령한 사람은 자장법사에게 옥(玉)을 바치고는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정관17년 계묘년(643년)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내려 준 불경, 불상, 가사, 폐백을 갖고 본국으로 돌아와 왕에게 탑을 세울 것을 권했다.

선덕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자 신하들이 말했다.

“백제에 부탁해 공장(工匠)을 데려와야 가능합니다.”

선덕왕은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로 가서 공장을 청하게 했다. 아비지(阿非知)라는 공장이 명을 받고 와서 재목과 돌을 다듬고, 이간(伊干) 용춘(龍春)이 수하 공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다.

 

처음 이 탑의 기둥을 세우던 날 아비지는 백제가 망하는 형상을 꿈꾸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의심이 되어 손을 떼려 했다. 그러자 갑자기 대지가 진동하고 사방이 캄캄해지더니 한 노승과 장사가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공장은 뉘우치고 탑을 완성했다. <찰주기(刹柱記)>에 이렇게 말했다.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는 42자, 그 이하는 183자다.”

자장법사는 오대산에서 받은 사리 백 개를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戒壇 : 승려가 계를 받는 제단) 및 대화사(大和寺) 탑에 나누어 모셔, 못에 있는 용의 청원을 들어 주었다.

탑을 세운 이후에 천지가 태평하고 삼한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그 뒤 고구려왕이 장차 신라를 정벌하고자 계책을 세우고 이렇게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무엇을 말하는가?”

“황룡사의 장륙존상과 9층탑, 그리고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고구려왕은 신라를 치려는 계획을 그만 두었다. 주(周)나라에 구정(九鼎 : 중국 하나라 우 임금 때 전국의 쇠를 모아 아홉 주(州)를 상징하는 솥을 만들었다.)이 있어서 초(楚)나라 사람들이 감히 북쪽(周)을 엿보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귀신이 받치는 힘으로 수도 장안을 누르니,

휘황찬란한 금벽색이 기왓장을 움직이네.

올라가 굽어보니 어찌 구한(九韓)만 복종하랴.

천하가 특히 태평함을 비로소 깨달았네.

 

또 해동(海東) 명현(名賢) 안홍(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 제27대에는 여자가 임금이 되니 비록 도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이 침략했다. 대궐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운다면 이웃 나라의 침략을 억누를 수 있을 것이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거란(丹國), 8층은 여적(女賊), 9층은 예맥(穢貊)을 억누른다.”

 

또 <국사>와 <사중고기(寺中古記)>를 살펴보면, 진흥왕 14년 계유년(553년)에 절을 세운 뒤 선덕왕 때인 정관 19년 을사년(645년)에 탑을 세웠다. 제32대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한 (698년)부터 고려 숙종(肅宗) 병자년(1096년)까지 여섯 번째로 다시 지었지만, 고종16년 무술년(1238년) 겨울에 몽골이 침입하여 탑과 절, 장륙존상과 전각이 모두 불에 타 버렸다.

p.306~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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