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강전도(金剛全圖)> 정선. 종이에 수묵담채. 국보 217호. 호암미술관 소장
금강산은 겨레의 영산(靈山)이다. 한민족의 자랑이요, 국토애(國土愛)의 원천인 것이다. 금강산의 수려한 일만 이천 봉우리는 바로 배달겨레의 정기(精氣)를 상징한다. 그래서 지금도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의 대표작으로 사람들은 <그리운 금강산>을 즐겨 부른다. 금강산은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산이었다. 조선시대에 일본에 갔던 통신사(通信使) 중에는 저들이 자랑하는 후지산과 금강산을 놓고 어느 산이 더 훌륭한가에 대하여 서로 시를 지어 민족 자존심 경쟁을 벌였던 일까지 있었다.
이렇게 온 겨레가 금강산을 사랑하고 외경했으므로 이 산엔 별명이 많다. 우선 철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바뀐다. ‘금강산’은 새싹 트고 향기로운 꽃이 만발하는 봄 산을 가리킨다. 그러다가 녹음이 짙푸르게 깔리는 여름이 오면 신선이 사는 봉래산(蓬萊山)이 되었다가, 깎아지른 검은 절벽에 새빨간 단풍이 온 산에 핏빛 불을 지르는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으로 바뀐다. 그리고 <금강전도(金剛全圖)>에서 보는 것처럼 잎이 진 겨울에는 차가운 암봉(巖峰)만이 뼈다귀처럼 우뚝 서서 새하얗게 눈을 이고 있는 장관을 일러 개골산(皆骨山)이라 한다.
금강산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도 이름을 달리 했었다. 삼국시대에는 그저 ‘풍악(楓嶽)’이라고 불렀다가, 통일신라와 발해, 곧 남북국시대에는 ‘상악(霜岳)’이라고 일컬었으니 이 또한 새하얀 뭇 봉우리가 서릿발처럼 삼엄한 기세를 보인다는 뜻이다. 여름 금강산을 뜻하는 ‘봉래(蓬萊)’란 이름은 원래 신선 사상에서 말하는 삼신산(三神山), 즉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 가운데 하나이거니와, 불교가 널리 퍼지기 이전에는 그저 ‘선산(仙山)’, 즉 신선이 사는 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금강(金剛)’이란 이름은 불교경전 <화엄경(華嚴經)>에서 빌려온 말이다. 즉 “동북쪽 바다 가운데 금강산이 있어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일만 이천 권속(眷屬)을 거느리고 상주하고 있다. 이 보살은 법기보살(法起菩薩)이라고도 하는데 중향성(重香城)의 주인으로 항상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설법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라는 말이 이로부터 나왔다. 그 외에 ‘열반산(涅槃山)’이니, ‘중향성(重香城)‘, ’기달산(怾怛山)’이니 하는 것도 모두 불교에 연원 둔 이름이다. 그중 ‘기달’은 우뚝 솟았다는 뜻이다.
한양에서 금강산을 가자면 단발령(斷髮嶺)이란 고개를 넘게 되는데 여기서 비로소 금강산의 위용을 처음 대면하게 된다. 그런데 이곳에 서서 금강산을 보는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진 화려하고 장엄한 경관에 감동한 나머지, 문득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고픈 생각이 든다고 한다. ‘머리 깎는 고개’라는 이름이 생겨난 연유다. 또 정양사(正陽寺)에 오르면 그 앞의 절고개(拜岾) 언덕에서 내금강(內金剛)의 갖가지 봉우리들을 속속들이 둘러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이때 보는 이가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장엄한 뭇 봉우리를 향해 절을 올리게 된다고 하여 ‘절고개’라는 이름이 생겼다.
우리 속담 가운데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제 아무리 좋은 일이 있다 해도 밥 먹는 일만큼은 건너뛸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 말하면 옛사람들이 밥 먹기조차 잊을 만큼 오매불망 꿈에도 그리워했던 것이 다름 아닌 금강산 구경이었다는 말이 된다. 여북하면 정수동(1808~1858) 같은 괴짜 시인은 아내가 아기를 낳다가 난산이라 급히 약방에 가서 탕제를 지어 오던 중에, 때마침 금강산 유람을 가는 친구를 만나 깜빡 모든 걸 잊고 소매 속에 약봉지를 넣은 채 덩달아 구경을 떠났다는 말이 전하겠는가?
그런가 하면 우리가 잘 아는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도 바로 금강산을 무대로 하고 있다. 금강산은 정녕 선녀가 내려와서 목욕을 할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천신만고 끝에 두레박줄을 타고 하늘에 올라 부인과 두 아이 모두 일가상봉을 하고 행복하게 살았다던 나무꾼 가족들도 결국은 꿈결 같은 금강산을 잊지 못해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고 전한다. 나무꾼이 하늘나라를 버리고 돌아왔다는 금강산, 하늘나라에도 없는 선경(仙境)이 바로 금강산이었음을 웅변해주는 설화다.
금강산에는 혈망봉(穴望峰)이라는 묘한 봉우리가 있다. <금강전도>에서 시계 방향으로 2시 방향 끝에 보이는 암봉이 그것인데, 꼭대기에 커다랗게 네모진 구멍이 뚫려 있어 그리로 하늘이 내비친다. 여기에도 전설이 서려 있다. 옛날 조물주가 세상을 만들 때, 마지막으로 천지간에 가장 아름다운 산 하나를 만들고자 온갖 심혈을 다 기울였다. 그게 바로 금강산이었는데 완성한 후 스스로 바라보아도 정말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렇듯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산을 보고 있노라니 불현 듯 근심 걱정에 휩싸였다. 장차 억겁의 세월이 지나 천지가 다시 개벽할 때면 다른 뭇 산들과 함께 이 절경 또한 속절없이 부서져버리고 말지 않을까....? 그러자 금강산만은 어떻게 해서라도 원래대로 간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혈망봉에 큰 구멍이 뚫린 것은 세상이 망하는 그날, 이 구멍에 금실을 꿰어서 금강산을 도로 하늘로 끌어올려 건지기 위함이라 한다. 이처럼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둘러싼 겨레의 전설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비단 우리 겨레뿐만 아니라 중국 사람들조차 예로부터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 한번 보았으면!(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 하는 시를 지었을 정도로 이 산을 동경하였다. 이 시구의 작가는 소동파(蘇東坡)라는 말이 전하지만 분명히 확인되지 않는데, 역사 기록에 보이는 가장 이른 예로는 <조선왕조실록> 태종 4년(1404)조에 보이는 것이 있다. 중국 사신들은 금강산에 직접 가보기를 원하였고, 그것이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그림이라도 얻어 보기를 바랐으므로 조정에서 저들에게 <금강전도>를 그려 주었다는 기록도 여럿 전한다.
우리 민속 신앙에서는 살아생전에 한 번이라도 금강산에 오른 사람은 죽어서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가지가지 수많은 민화(民畵) <금강전도>가 전하는 것은 이러한 속신(俗信)과 연관이 있다. 금강산은 우리 조상들이 남긴 기행문학 가운데서도 단연 인기 최고였다. 고려 말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로부터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 이율곡의 3,000구 오언장시(五言長詩) <풍악행(楓嶽行)>을 거쳐서, 근래 이광수(李光洙)의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너무 많아서 그 이름을 댈 수가 없을 지경이다.
마지막으로, 그림 위쪽에 적힌 제시(題詩)을 살펴보자. 글씨가 정선 필적이 아니라는 학계의 주장이 있고 확실히 평소 정선의 필체와는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약간 흘려 쓴 다른 작품과 비교해 볼 때 겸재 정선이 제시를 짓고 쓴 것이 분명하다.
일만 이천 봉 겨울 금강산의 드러난 뼈를
뉘라서 뜻을 써서 그 참모습 그려 내리
뭇 향기 동해 끝의 해 솟는 나무(神木)까지 떠 날리고
쌓인 기운 웅혼하게 온 누리에 서렸구나!
암봉은 몇 송이 연꽃인 양 흰빛을 드날리고
반쪽 숲엔 소나무 잣나무가 현묘(玄妙)한 도(道)의 문(門)을 가렸어라
설령 내 발로 직접 밟아보자 한들 이제 다시 두루 걸어야 할 터
그 어찌 베개 맡에 기대어(내 그림을) 실컷 봄만 같으리오!
오주석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 P.102~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