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근묵란도> 민영익. 종이에 수묵. 128.5x 58.4cm. 호암미술관 소장
<노근묵란도(露根墨蘭圖)>는 예사 난초그림이 아니다. 고운 자태와 그윽한 향기를 자랑하는, 그저 고상한 옛 그림만은 아니다. 그것은 작가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분신이다.
1910년 8월 29일, 벌써 일주일 전에 이완용(李完用) 등이 남몰래 조인해두었던 매국(賣國)의 한일합방조약이 순종(純宗)의 조칙을 가장하여 공식으로 발표되었다. 오백 년 조선 왕조가 하룻밤 꿈인 양 스러진 것이다. 비보(悲報)를 접한 민영익은 쓰라린 통한과 오갈 데 없는 절망감 속에서 ‘뿌리 뽑힌 난초’를 그렸다. 가슴 저미는 망국(亡國)의 아픔을 난 이파리마다 아로새길 적에 난꽃이 눈물에 흠뻑 젖은 눈처럼 그려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림에는 빼앗긴 국토의 흙 한 줌도 그리지 않고, 연약한 뿌리는 마치 쑥대머리인 양 처참하게 드러내었다. 청나라 상해(上海)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민영익은 합방의 소식을 듣자 날이면 날마다 폭음으로 지새웠다. 그리하여 1914년 윤5월 15일, 뿌리 뽑힌 난초 같았던 그의 삶도 마감하였다.
민영익은 조선후기의 정국을 주도했던 노론(老論) 명문가 출신이었다.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가 일찍이 그 총명함을 눈여겨보고 친정의 양자로 끌어 들였다. 그는 황후의 조카로서 약관 19세에 이미 민씨 세도(勢道)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하여 1883년에는 서양 문물을 확인코자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고 남모르게 개화(開化) 의지를 키워 나갔다. 그러나 이듬해 갑신정변에서 뜻밖에도 자신이 키워왔던 김옥균(金玉均) 등에게 습격을 받고 생부(生父)마저 잃는 비극을 맞았다.
이후 민영익은 복잡다단한 정세 때문에 27세부터는 홍콩, 상해 등지에서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하게 되었다. 30세에 일시 귀국해 이조판서에 오른 일도 있었지만, 대체로 중국에 머문 날이 더 많았다. 그리고 1895년 다시 을미사변이 터졌다. 자신의 절대적 후원자였던 국모(國母) 명성황후가 일인들에게 비참하게 시해되고 나자, 이제는 정치적 포부를 완전히 접어두고 시서화(詩書畵)에 남은 뜻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민영익은 원래 추사 김정희의 학문을 이어받았던 인물이다. 그의 호 운미(芸楣)는 청나라의 대학자 완원(1764~1849)의 호 운대(芸臺)의 ‘운(芸)’ 자를 취한 것으로, 이것은 김정희가 스승으로 모셨던 완원의 성(姓)을 따서 ‘완당(阮堂)’이라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운미는 15세 어린 시절부터 서화로 이름났고 특히 문인화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묵란을 잘 쳤으니 이 또한 바로 김정희 문하의 학예일치(學藝一致) 전통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귀인자제요, 왕실 외척으로서 소년세도(少年勢道)라는 말까지 들었던 그였지만 이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상해에서 민영익은 우창쉬(1844~1927), 포화(蒲華.1834~1911) 등 서화와 전각(篆刻)의 대가들과 어울리며 나날을 보냈다. 당시 중국의 지우(知友)들은 민영익이 연마한 최고의 학예 수준과 조선 귀공자의 고고한 품격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는 중국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최고의 전각자였던 우창쉬가 그를 위해 무려 300알이 넘는 인장(印章)을 새겨준 사실로 증명된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께서 을사늑약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얼빈 역에서 쏘아 죽이고 여순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이 머나먼 상하이까지 들려왔다. 당시 민영익은 사기를 당하여 재정적으로 큰 손해를 보고 있었지만 즉각 거금 4만 원을 쾌척하여 러시아와 프랑스인 국제변호사를 사서 고국의 열혈남아를 구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이들 두 외국인 변호사는 일본의 거부로 끝내 법정에 설 수 없었지만 민영익은 이국의 동떨어진 삶 속에서나마 끝까지 조선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가 <노근묵란도>를 그린 뜻을 미루어 짐작케 하는 이 일화는 <매천야록>에 보이는 것인데, 그 저자인 황현(黃玹) 선생 역시 한일합방을 목도하고 통분했던 나머지, 일개 선비의 신분이었지만 참담한 책임감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난(蘭)은 예부터 고고한 인격자를 뜻했다. 특히, 왕조시대에는 임금을 향한 충신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을 상징하는 꽃이었다. 일찍이 <예기(禮記)>에 “5월 여름에 난초를 모아 우려낸 향기로운 물로 몸을 씻어 깨끗이 한다.(五月蓄蘭 爲沐浴也)”고 하였다. 또 [주역] <계사전>에는 “마음을 함께하는 착한 사람의 말은 그 향내가 마치 난초와 같다.(同心之言 其臭如蘭)”는 글이 있으니, “그런 까닭에 착한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갖가지 난초가 놓인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오래 있으면 저절로 그 향내가 몸에 배게 된다.”는 말이 나왔다. 이로부터 훌륭한 벗끼리의 사귐을 일러 지란지교(芝蘭之交)라 불렀다. 난꽃은 이른 봄에 피지만 추운 겨울에도 그 고결한 모습은 한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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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노근묵란도>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분은 정녕 우아하기 이를 데 없는 1896년 작 <노엽풍지도(露葉風枝圖)>부터 감상해보시는 편이 좋을 성 싶다. 이 작품은 먹빛이 윤택해서 참기름이 물 위를 떠다니는 듯하고, 낭창낭창하게 뽑아 올린 긴 이파리의 미끈한 탄력이며 빼어난 자태가 비할 데 없이 곱다. 꽃 이파리를 보아도 거침없이 시원스럽게 펼쳐서 망울진 작은 봉오리와 함께 길고 짧고 크고 작은 조화의 극치를 보이며 작은 한 획 속에도 드러난 농담의 변화가 천연스럽다.
향그러운 꽃은 물론이요, 흙 위에 툭툭 친 이끼점(苔點)조차 너글너글하고 유정하며 물기가 낙낙하니 그야말로 귀인자제의 고상한 품격 그대로다. 여백의 균형 또한 수려하기 이를 데 없다. 그리하여 왼편 위쪽에 중국 서화가 포화(蒲華)는 다음과 같은 화제(畵題)를 적었다.
나라(중국)안에 난 그리는 사람 드무니
마땅히 나라 밖에서 구해야 하리
그대(민영익)는 참된 이치 터득했구려
먹 향기 이파리에 드러나 바람을 타네.
海內華蘭人少 當於海外求之 君家能悟眞諦 墨香露葉風枝
이제 <노근묵란도>를 보자. 한눈에 빽빽하게 떨기를 이루어 타는 듯한 먹선들이 시커멓게 엉겨 있다. <노엽풍지도>의 여백은 얼마나 여유롭고 풍치가 있었던가? 그러나 민영익은 이제 고통에 압도되어 숨쉬기도 어려웠던 모양이다. 난 이파리가 촘촘해서 마치 파 묶음 몇 단을 세워놓은 듯, 바람이 들고날 작은 틈새조차 없다. 쭉 뽑아 내친 듯 격렬한 이파리들은 다시 가늘어짐 없이 갑자기 툭 끊겨버렸다.
<노엽풍지도>의 이파리는 얼마나 사랑스럽게 굽이쳤던가? 그러나 이제 민영익은 마치 ‘철사를 잘라놓은 선(鐵線)’인 양 퉁명스레 붓을 세워 그냥 꼿꼿하게 꼿꼿하게만 쳐내고 있다. 그것도 매우 급박하게 몰아붙였으며, 심지어 잎 위에 잎을 거듭 때려 넣기도 하였다. 막대기처럼 뻣세고 짤막짤막한 저 이파리들, 끝에 가서 오히려 더 굵어진 저 이파리들을 보면, 그것은 마치 화가가 무력한 자기 자신을 매질하는 화초리인 양 느껴진다. 지나친 감상일까? 이파리 묵선은 물기가 적고 까슬까슬해서 완전히 메말라 타버린 작가의 가슴속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꽃줄기는 흐리고 좀 더 물기가 많은 묵선(墨線)으로 세웠다. 이어 꽃이파리를 붙였는데 먹이 채 마르기 전에 그 위로 짙은 묵점(墨點)들을 번지게끔 덧찍어 화심(花芯)을 묘사했다. 그러나 잎은 활짝 핀 것이 거의 없고 이제 막 벌어지려는 것이 대부분이다. 비를 맞은 듯 하나같이 아래로 수그러진 꽃망울들은 마치 눈물에 흠뻑 젖은 사람의 퉁퉁 부은 눈처럼 느껴진다. 저 많은 눈들이 하나같이 울고 있다.... 왼편 떨기 중간에 고개 숙인 두어 송이 꽃을 보라. 머리를 깊이 처박고 하염없이 울고 있다.... 허옇게 드러난 뿌리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중간 농도의 먹선을 천천히 끌어당겨 그렸는데 흐트러진 머리칼인 양 심란하기 그지없다. 이리저리 봉두난발처럼 송두리째 드러난 뿌리를 한 줄 두 줄 그어가던 민영익의 핏기없고 처량 맞은 눈빛이 언뜻 뇌리에 어른거린다. 그러나 역시 그는 소년 재상을 지낸 인물이다. 오른 편 위로 아주 길게 쭉 뽑아낸 이파리며, 오른편 아래 구석 올곧게 똑바로 세운 꽃대의 의연함은 결코 현실의 비참함 속으로 함몰되지 않는다.
운미(芸楣)의 난잎은 당시 유행하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화법에서 말하는 이른바 ‘세 번 꺽어내기(三絶法)’에 전혀 얽매임 없이 곧게만 곧게만 뻗어나간 것이다. 이렇듯 호방하게 ‘이파리를 길게 뽑아내는 방법(長葉法)’은 중국의 조맹견(1199~1295), 조맹부(1254~1322), 문징명(1470~1559) 등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오래된 예술 전통 위에 서 있는 특징이다. 하지만 <노근묵란도>의 그것은 저들 중국 대가들의 작품보다 더욱 매섭고 옹골찬 기세를 보인다.
그것은 작품이 기본적으로 민영익의 비극적인 삶에서 연유한 절절한 개인감정으로부터 흘러나온 까닭이겠지만, 한편으론 추사 김정희의 강경하면서도 엄정했던 예술 유산에 힘입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난이란 본래 결코 부드러운 식물이 아니다. 여린 듯한 그 잎사귀를 가만히 만져보라. 강인하고 뜨거운 혼이 뿌리 깊이 숨어있다. 오주석 <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 p.176~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