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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시 - 증보
김희보 엮음 / 가람기획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눈 오는 밤에
김용호(1912~1973)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콩기름 불
실고추처럼
가늘게 피어나던 밤
파묻은 불씨를 헤쳐
잎담배 피우며
“고놈, 눈동자가 초롱 같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
바깥엔 연방 눈이 내리고,
오늘 밤처럼 눈이 내리고,
다만 이제 나 홀로
눈을 밟으며 간다.
오우버 자락에
구수한 할머니의 옛 얘기를 싸고,
어린 시절의 그 눈을 밟으며 간다.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누구나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 하나쯤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간다. 세상살이가 겨울 찬바람처럼 매몰차고 시릴지라도 혈육의 한없는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자란 소싯적 추억 때문에 험난한 세파도 거뜬히 이겨내고,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대물림 사랑을 이어간다.
어릴 적 추억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인생의 튼실한 밀알이다. 이제 너무나 변해버린 세상 탓에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지만, 가끔씩 옛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빙그레 웃음 짓는다. 세파에 조금도 물들지 않았던 티없이 맑은 시절, 먹을 게 귀해 늘 고구마, 밤을 군것질 삼아 잿불에 구워먹었어도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
요즘 같이 매섭게 추운 날이면, 몽실하게 군불 지핀 아랫목에서 올망졸망 할머니의 얘기를 들으며 몸을 녹였다. 시간에 쫓겨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의 한켠에서 종종 푸근하고 여유롭던 옛 시절이 그립다. 그래서 이 시를 읽을 때면 근심 걱정 없이 마냥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희열에 빠져든다. 눈이 내리고 찬바람이 쌩쌩 부는 날이면 시인이 느꼈던 할머니의 온정처럼, 나도 타임머신을 타고 잠시 그 시절로 돌아가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알알이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