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시 - 증보
김희보 엮음 / 가람기획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해

                              박두진(1916~1998)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라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라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무한한 시간 속에 인류가 잘게 쪼개 놓은 한 해가 가고 또 새해가 밝았다.

매년 느끼게 되는 거지만, 새해가 시작되는 첫달에는 푸짐한 과자 봉지를 한껏

풀어놓은 것처럼, 필요한 물건들을 많이 사서 쟁여둔 것 같이 마음이 든든하고

많은 일을 설계하느라 내심 부산하다. 

 

해가 바뀌면 뭔가 달라지고 좋아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살아온 지도 수십 년,

세상은 내 생각과는 달리 좋은 세상으로 나아가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모습이다. 

지나간 과거는 늘 아름답게 생각되고 그때가 좋았다고 망각하는 인간의 특성이

있긴 하지만, 요즘은 정말 개천에서 용 나기 힘들고 삶이 팍팍한 세상이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늘 해가 바뀌면 내게 힘이 되는 시가 있다. 박두진 님의 '해'인데,

운율때문인지, 시의 내용이 좋아선지, 시 한 편 읽고 나면 마음이 훈훈하다.

진실로 이런 세상이 도래해야 할텐데 기대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사분오열 진흙다툼을 벌이는 정치판과 공생을 모르고 끝없이

달려가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모순이 해결되는 그날이 우리가 이상으로 그리는

티없이 맑고 고운 해가 힘차게 솟아오르는 날이 될 것이다. 

서민이 살기 좋은 그런 세상이 구현되길 바라면서 새해 아침부터 시 한 수 읊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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