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부 한국적 행서 시리즈 7
황성현 지음 / 서예문인화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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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의 신종(神宗.1068~1085) 원풍(元豊) 5년(1082년) 10월 소식(蘇軾)은 친구들과 다시 적벽을 다녀와 <후 적벽부(後赤壁賦)>를 지었다.

 

이 해 음력 10월 15일에 설당(雪堂: 황주에 있는 소식의 별당 이름)으로부터 걸어서 임고(臨皐 : 소식의 거주지인 임고정 臨皐亭을 말함)로 돌아가려고 할 때 두 손(客)이 나를 따라서 황니(黃泥 : 누른 진흙)의 고개를 지나가게 되었네.

 

서리와 이슬이 이미 내리고, 나뭇잎은 모두 떨어졌네. 사람의 그림자가 당에 길게 끌리기에 우러러 밝은 달을 보았네. 달을 보니 즐거운 마음이 되어 걸으면서 노래 부르며 서로 화답했네.

 

얼마 후 내가 탄식하며 말했네. “손님이 있어도 술이 없고, 술이 있다 하되 안주가 없구나! 달은 밝고 바람은 시원한데, 이처럼 좋은 밤에 어찌하면 좋을까?”

손이 말하기를, “오늘 해질 무렵에 그물을 들어 올려 고기를 잡았는데, 입이 크고 비늘이 가느다란 모습이 흡사 송강(松江: 송강의 농어는 맛이 좋음)의 농어와 같았네. 그런데 어디에서 술을 얻을 수 있을까?”

 

돌아와 아내와 상의하니, 아내가 말하기를, “저에게 한 말의 술이 있는데, 그것을 간직한 지 오래 되었사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이 불시에 필요할 것에 대비했던 것이옵니다.”

 

이렇게 해서 술과 물고기를 가지고 다시 적벽 아래에서 놀게 되었네. 갈물은 소리 내어 흘러가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대단히 높아, 산은 높고 달은 작게 보이며, 물은 줄어 바닥의 돌이 드러났네.

 

일찍이(7월 기망 이후 지금까지) 세월이 얼마나 지났기에 강산을 다시 알아볼 수 없단 말인가! 이에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강 언덕 위에 올라, 험준한 바위를 밟고, 수북하게 자란 잡초를 해치기도 하고, 호랑이와 표범 모양의 바위에 쪼그려 앉기도 하고, 용 모양처럼 꾸불꾸불한 나무에 오르기도 하고, 송골매가 서식하는 위태로운 둥지에 오르기도 하고, 풍이(馮夷 : 水神 하백을 말함)가 산다는 물 속 깊숙한 궁전을 내려다보기도 했네. 두 손(客)은 따라올 수 없었네.

 

때는 바야흐로 한밤중이 되어 사방을 둘러보니, 아무런 기척도 없이 조용해졌네. 때마침 외로운 학이 있어서 강을 가로질러 동쪽에서 날아왔으니, 날개는 수레바퀴만 하고 몸은 하얗고 꼬리는 검었는데, 길게 울면서 내 배를 스쳐 지나서는 서쪽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네. 잠시 후 손도 떠나고 나 역시 잠자리에 들게 되었네.

 

꿈에 도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새의 깃으로 만든 옷을 입고서 춤추듯이 펄럭이며 날아서 임고정(臨皐亭) 아래를 지나다가 나에게 읍(揖)하면서 말하기를, “적벽에서 노는 것이 즐거우셨습니까?” 이름을 물었으나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네. “오호라! 내가 그대를 알겠소이다. 지난밤에 울면서 내 배를 스쳐 지나간 학이 바로 그대가 아니시오?” 도사가 돌아보면서 웃는 순간, 나 또한 놀라 깨어나, 문을 열고 내다보았지만 그가 있는 곳을 알 수가 없게 되었네.

 

이 글은 풍경을 주로 묘사했다. 초겨울 밤 강상(江上)의 경물(景物)을 잘 묘사했고, 세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작자의 심정이 멋들어지게 표출되었다. 그의 탁월한 문장력은 읽는 이로 하여금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별히 꿈속에서 도사로 변한 학의 모습을 묘사하여 글의 신비감을 한층 더하고 있다.

 

이렇듯 <전․후 적벽부>는 비록 부체(賦體)로 씌었으나, 한(漢), 위(魏), 육조(六朝)시대 사륙병려체의 장편 부(長篇賦)와 크게 다르다. 오히려 산문에 가까워 글자 수가 일정치 않고 압운(押韻)에 매이지 않아 참신하면서도 유창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예술적으로 매우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두 편의 <적벽부>는 이후, 희곡, 회화, 조각 등에 창작 제재를 제공함으로써 중국문학과 예술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청대(淸代)의 어느 문인은 아예 황주의 적벽을 동파적벽(東坡赤壁)이라 명명하고, 이를 누대(樓臺)의 편액(扁額)에 새겨 그 명성을 천하에 전했다. 오늘날에도 황강(黃岡)의 동파적벽에 ‘이부당(二賦堂)’, 뇌강정(酹江亭)‘, 파선정(坡仙亭)’ 등의 명승지가 남아 있는 것은 중국문학 속에 이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을 실감나게 한다. 한편 소식은 이 시기에 많은 시문을 썼는데, 적벽을 시로 읊지 않은 점은 특기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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